인기 기자
(시론)지금, 다시, ‘조선통신사’의 의미를 생각한다
2021-12-03 06:00:00 2021-12-03 06:00:00
“조선왕조로부터 에도 막부의 쇼군 교체에 즈음하여 파견된 사절. 각지에서의 교류가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싸움(1600년)에 승리하자마자, 쓰시마의 소우지를 중재자로 삼아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꾀했다. 조선 왕조는 국교회복의 조건으로, 두 번 다시 조선을 침략하지 말 것. 침략 때 왕릉을 파헤친 범인을 인도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에야스는 그 요구를 받아들여, 1607년에 조선은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약속하고, 이후, 에도 막부 말기인 1811년까지 12회 파견하게 된다. 
 
통신사는 정사, 부사 외에 유학자, 의사, 화가 등을 포함하여, 모두 50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통신사가 에도(도쿄)로 향하는 동안, 각지에서 일본의 문인, 학자들과 서로 교류를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의 사절은 한양까지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부산의 왜관에서 응대를 받았다. 일본에 대한 불신이 완전히는 씻겨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글은 일본에서 발행된 '중 고교생을 위한 조선 · 한국의 역사'라는 책에서 인용한 ‘조선통신사’에 관한 서술의 일부다. 필자가 직접 번역하여 소개한다,  
 
보통의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조선통신사는 그야말로 “조선시대 조선에서 일본의 막부 장군에게 파견되었던 공식적인 외교사절”이었다. 한국에서 조선통신사를 소개하는 몇 개의 글도 일본에서의 그것과 비교하면 거의 일치한다.  
 
조선통신사에서 ‘통신’은 ‘서로 신의를 갖고 교류하자, 좋은 인연을 갖고 교류하자’는 뜻을 머금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인용문에서 특히 주목해서 읽어야 할 문장도, “조선통신사가 에도(도쿄)로 향하는 동안, 각지에서 일본의 문인, 학자들과 서로 교류를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었다.”다. 중요한 것은 조선통신사는 ‘양국의 사람들은 더 이상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선린우호)의 정신으로 만남을 갖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실제로 통신사 일행이 들른 일본 땅 여기저기에서는 학문과 예술을 통해 풍부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들이 묵었던 숙소에는 통신사를 보고자 하는 여느 사람들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교류를 원하는 문인 등이 몰려들었다. 통신사는 대개 6개월에서 1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될 만큼 긴 여정을 소화했다. 그들의 행렬을 그린 병풍·회권·판화 등의 형태가 일본에서는 고스란히 남아서 후세의 사람들에게 당시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회권은 ‘두루마리 그림’이라는 뜻으로, 장대한 화면을 만들고 정경이나 이야기 등을 연속해서 표현한 회화형식의 하나다. 
 
조선통신사는 그야말로 거의 200년이나 계속된 두 나라의 우호적인 교류였다. 이는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소중한 사례. 지금도 일본에서는 매년 당시의 행렬을 재현한 조선통신사 관련 축제가 여기저기에서 열리고 있는데, 왜 이 축제가 유네스코의 ‘세계기억유산’으로 등록(2017년)되었는지 그 의미를 살필 필요가 있다.   
 
조선통신사는 부정할 수 없는 한일 문화교류의 상징이다. 통신사 중 일부는 일본인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는 기록도 보이지만, 대체로 그들은 일본의 정세나 정보, 그리고 일본인을 살피는 데 소극적이지는 않았다. 다만, “이들의 사고방식이 너무 경직돼 있었고, 중화적 질서와 주자학적 사상 체계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조선은 일본을 파악하는 데 지나치게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지만, 일본은 부산의 왜관과 대마도를 통해 늘 조선의 문물을 수입하고 있었기에, 조선을 잘 알고 있었지만, 조선은 일본을 너무나 몰랐다”(구지현 박사)는 주장에는 충분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작금의 한일 관계는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라는 표현이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악화일로다. 한 치 앞을 예견하기가 쉽지 않다. 더 늦출 수 없다. 우선, 문화적으로도 양국의 교류는 더 적극적으로 활성화되어야 한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잃고서는 일본의 평화는 없다’는 사 백여 년 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생각.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에 거짓이 없다고 판단하고 포로의 반환과 사죄를 조건으로, 조선통신사를 파견한 조선 정부. 지금이야말로 한일 양국은 조선통신사의 선린외교 정신을 되새기고 곱씹어 봐야 할 시점이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