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재판' 흰 수염 재판장, 남의 일 아닙니다"
(이범종의 게임 읽기)역전재판②법관이 본 서심재판
게임 속 속도전 재미주지만…현실 적용시 "부실 판결 난무"
'재판의 꽃'은 판결문인데 현실은 "24시간이 모자라"
사건 줄었지만 난이도 급상승···법관 고령화도 걱정
현실적 문제 불구 "끝없이 질문하고 법리 연구하는 게 매력"
2024-01-26 06:00:00 2024-01-26 17:41:44
[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지난 시간에 강지현 변호사와 함께 게임 '역전재판'의 가상 법정과 현실 법정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짚어봤는데요("변호사는 누구 편?…역전재판 '나루호도'의 고민을 안고 삽니다").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인 '서심(序審)재판' 제도에 대한 얘기가 나왔었죠. 늘어가는 범죄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재판을 '서심재판'과 '본심재판'의 2심제로 나눈다는 설정인데요. 이 서심재판 제도에 의거해 게임에선 모든 형사사건 1심이 첫 공판기일부터 사흘 안에 끝납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주인공 변호사 '나루호도 류이치'와 '오도로키 호스케'는 살인 누명 쓴 의뢰인이 무죄 선고를 받도록 하기 위해 검사의 주장과 목격자인 척하는 진범의 증언 탄핵에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주인공인 변호사의 고충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게임 속 판사의 입장은 어떨까요? 판사도 골치아프긴 매한가지일 겁니다. 흰 수염을 기른, 나이 지긋한 재판장 역시 사흘 안에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해야 하니까요.
 
역전재판 시리즈에서 주인공이 수임한 대부분의 사건을 심리하는 재판장. (사진='역전재판 123 나루호도 셀렉션' 실행 화면)
 
"서심재판 현실화? 실체적 진실 못 찾아"
 
역전재판 속 재판부는 공판준비기일과 결심공판, 심지어 선고기일도 따로 없이 유무죄를 가려야 합니다. 이후 본심 재판에서 구체적인 형량이 결정되지만, 중요한 건 유죄냐 무죄냐를 가리는 서심재판 일정이 촉박하단 겁니다.
 
게다가 변호사는 고비마다 새로운 증거를 제출합니다. 이 때 검찰의 반대 의견을 배척하고 재량으로 증거를 채택할지, 갑작스러운 증인 신청도 받아들여 즉시 증인 신문을 진행할지도 결정해야 합니다. 흰 수염 재판장의 업무 부담이 늘어나는 건 자명합니다.
 
속도전을 내세우는 이 서심재판에 대해 현직 법관들이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의견을 물었더니 모두들 게임의 장치라는 점에서 재미를 주긴 하나, 현실에 적용해선 안 된다고 입을 모았는데요. 무엇보다 현실에선 진실이 묻히고 피해자만 억울한 상황이 반복될 우려가 크다는 지적입니다. A 법관은 "증인신문과 현장 검증, 감정 등 증거조사가 곤란해 실체적 진실 발견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작업 자체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인 데다 증인이 바로 출석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 속 국민 참여 재판은 하루나 이틀 사이 선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A 법관은 "공판 일정에 대한 협의, 검사와 변호인의 적극적인 증인 출석 독려 등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B 법관은 "피고인 측이 3일 안에 반대 증거를 제시하며 검찰 측 증거들을 탄핵할 여유가 있겠느냐"며 "3일 안에 반드시 판결을 선고해야 한다면, 검찰이 제시한 증거의 신빙성 판단은 판사의 자의에 맡겨지게 돼 합리적 근거 없는 유죄나 무죄 판결이 난무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사진=이범종 기자)
 
변호사는 변론에, 판사는 판결문에 '사력'
 
역전재판은 판타지 법정 드라마입니다. 그래서 앵무새가 증인석에 앉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는데요. 앵무새에게 특정 질문을 던지면, 그 주인인 진범이 무엇을 위해 범행을 계획했는지 알아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게임 속 재판부는 변호인의 '앵무새 증인 신청'에 당황하다 예외를 인정하는데요. 현실에선 예외마저 없다는 게 판사들의 설명입니다. '증인'은 사람을 전제로 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앵무새는 검증이나 감정 대상으로 증거 제출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고 합니다. 다만 앵무새에 증명력을 부여할지는 법관의 판단에 달렸습니다.
 
B 법관은 "형사소송법상 증인은 '거짓 증언을 하면 위증의 벌을 받는다'는 선서를 해야 하는데, 앵무새는 자연인이 아니므로 선서도 불가능하고 위증의 벌을 받을 수도 없다"며 "이미 새장에 갇혀있다면 무기징역 상태라고 봐야 하느냐"고 웃으며 물었습니다.
 
실제 한국 판사들의 현실에 대해 좀 더 들어봤는데요. 가상의 일본 법정이 무대인 역전재판과 달리, 일단 한국 법원엔 '땅땅땅' 두드리는 법봉이 없습니다. 피고인이 무죄 선고 받을 때 천장에서 종이꽃 가루가 뿌려지지도 않죠. 대신 현실 재판에선 주문과 그에 대한 이유 설명이 마치 게임 속 뿌려지는 꽃과 같은 하이라이트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재판부는 판결문 한 부를 작성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건의 실체와 씨름합니다.
 
A 법관은 "변론 종결 때까지도 결론을 내지 못하다가 판결문 작성 단계에서 전체적으로 기록을 여러 번 보며 사건의 실체를 파악할 때가 있다"며 "어떤 경우는 변론 종결 때까지 이쪽 결론이었다가 결심 후 저쪽으로 결론을 바꾸기도 하므로, 판결문 작성 단계에서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말했습니다.
 
B 법관도 "밥 먹고 자는 시간 말고는 계속 일 할 때가 있어서 간이침대를 사무실에 두던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살인 사건 진범이 기르는 앵무새가 증인석에 앉아있다. 특정 질문을 던지면 진범의 범행 동기가 드러나는 대답이 나온다. (사진=루리웹 콘솔 스크린샷 게시판)
 
한국 판사 사건 처리, 일본의 세 배
 
판사들의 분투에도, 법원의 사건 처리 기간은 늘고 있습니다. 대법원 사법연감을 보면, 민사(종이+전자) 본안 1심 평균 처리 기간은 2012년 합의부가 236.5일, 단독이 157.6일 걸렸습니다. 2022년에는 합의부가 420.1일, 단독이 229.3일로 길어졌습니다.
 
형사사건 1심 평균도 불구속 사건 기준 합의부 사건이 95.1일에서 141.3일, 단독 사건이 70.7일에서 116.8일로 늘었습니다.
 
언뜻 보면 사건은 줄고 법관은 늘었습니다. 전국 민·형사 본안 1심 사건 접수는 2012년 140만8485건에서 2022년 102만8051건으로 줄었습니다.
 
하지만 법관 증원은 급증하는 변호사에 비해 미미한 수준입니다. 사법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13년 약 1만5000명이던 변호사 수는 2023년 3만3000명을 넘었습니다. 반면 법관은 2013년 2844명에서 2023년 3126명으로 소폭 늘었을 뿐입니다.
 
이에 대해 이영창 사법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고법판사)는 지난해 12월 '재판 장기화와 그 해법' 학술대회에서 기술 발전으로 복잡해진 사건, 경쟁이 심해진 변호사들의 다양한 소송 (지연) 전략, 미미한 법관 증원, 근무 법원이 2~4년마다 바뀌는 인사이동 등을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형사공판사건 제1심 처리기간이 해마다 늘고 있다. 막대 그래프 단위는 일. (자료=대법원)
 
특히 복잡해진 사실관계로 건당 살펴볼 기록이 대폭 늘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부의 사건 당 평균 기록 면수는 2014년 176면에서 2019년 377면으로 두 배 넘게 늘었습니다.
 
B 법관은 "현대 사회에서는 소 제기와 주장, 증거 제출이 예전보다 양적으로 수직 상승했다"며 "그에 따라 방대해진 기록을 검토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법리가 갈수록 고도화돼 연구하고 쫓아가야 할 법리가 늘어간다"고 설명했습니다.
 
역전재판을 만든 캡콤의 나라 일본은 어떨까요. 일본 판사는 2019년 기준 3800명입니다. 민·형사 본안 사건은 58만 건 접수했습니다. 그 해 접수 사건은 법관 1인당 151건인데요. 당시 한국은 2966명이 137만 건을 접수해 1인당 464건을 처리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법원 내에선 "내가 죽거나 사건이 죽거나 둘 중 하나"라는 씁쓸한 농담이 나옵니다.
 
이 밖에 고법 부장 승진 제도 폐지로 승진 기회가 줄어 인력이 나간다는 보도가 많지만, 그에 대한 법원 내 의견은 다양합니다. "법원장 보직을 승진으로 보는 세태는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재판장이 심리 도중 고민에 잠겨있다. (사진='역전재판 123 나루호도 셀렉션' 실행 화면)
 
신입 판사 '노안' 걱정해야
 
역전재판의 흰 수염 재판장처럼 판사들이 장년층으로만 채워지는 것도 사건 처리 속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사법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13년 법관 평균 연령은 39.8세였지만, 2022년에는 44.2세로 뛰었습니다. 30대 판사 비율은 2010년 48.6%에서 2022년 32.3%로 폭락했습니다.
 
법관 고령화는 일정 경력을 쌓은 변호사 자격자 중에서 판사를 뽑는 '법조일원화'로 가속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옵니다. 법관 임용 자격 경력은 올해까지 5년입니다. 하지만 2025~2028년엔 7년 이상, 2029년부터는 10년 이상 경력이 있어야 합니다. 30대 초반에 변호사 자격을 얻어도 나이 마흔이 넘어야 신참 법관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변호사 경력을 쌓은 인재들이 고수익과 서울 거주, 전문성 계발이란 이점을 두고 법원에 들어오게 할 방법도 고민거리입니다.
 
우선 체력 저하에 따른 사건 처리 속도 감소가 거론됩니다. 법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특정 직역에 기울여져 형성된 사고방식과 그때까지 맺은 인연과의 관계도 우려됩니다.
 
B 법관은 "법관도 나이가 들수록 젊었을 때만큼 일하기는 어렵다"며 "만일 모든 법관이 이미 노안이 시작된 40대 초중반에 법원 업무를 처음 하게 된다면, 법원에서는 법관 증원뿐 아니라 노령화에도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로스쿨 수료 즉시 검사 임관이 가능한 검찰에서는 사건 처리 지연 문제가 별로 없는 데 반해, 법원의 사건 처리가 늦어지는 이유에 법관 노령화는 없는지에 대한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재판부가 서심재판을 마치며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있다. 법관들은 일에 쫓길 때 사무실에 간이 침대를 놓고 주말도 없이 사건 검토와 판결문 작성을 한다. (사진='역전재판 123 나루호도 셀렉션' 실행 화면)
 
"묵묵히 일하는 법관이 존중받기를"
 
그래도 판사들은 지금 다니는 직장이 좋다고 합니다. 쟁점을 정리하고 법리에 따라 정답을 맞히다 보면, 문득 이 직업을 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는데요.
 
A 법관은 "현실의 문제로 다소 빛이 바래긴 했지만, 여전히 법관은 인권 옹호와 권리 구제를 하고 억울함도 풀어주는 사람"이라며 "이를 위해 끝없이 질문하고 법리를 연구하는 등 매력 있는 직업이고, 이런 점을 좋아하는 분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B 법관도 "운 좋게도 처음 이 직장을 선택한 이유가 오늘 회사에 출근한 이유와 같다"며 "당사자들이 말하고 있거나 하고 싶은 주장을 놓치지 않고 상세히 파악하면서, 제출된 증거가 사실인지 판단하는 데 실수가 없도록 유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점만은 알아주길 바랐습니다. "보통 민사재판에서 승소한 사람이나 형사재판에서 무죄 선고 받은 피고인이 '자신이 재판받은 법관이 최고'라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법관 모두 사명감으로 책임감 있게 판결하고 있습니다. 법원 인사와 관계없이 열심히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법관이 존중받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좋겠습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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