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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27화)“가서 동양을 펼쳐라”
동백림 사건의 예술가들
2016-07-25 06:00:00 2016-07-25 06:00:00
베를린 장벽(1961~1989)은 28년을 버티고 무너졌으나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위해 그어진 군사분계선 38선은 1945년 8월 11일 처음 등장―그 구상 자체는 오래되었음을 학술 연구들이 밝히고 있다―한 후, 1953년 7월27일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에 따라 직선이 곡선으로 바뀌었다. 독일의 분단은 1949년부터 1990년까지인데 한반도의 분단은 1948년 남북한 정부의 수립 이래 2016년에도 지속되니, 여전히 강대국들의 힘겨루기 속에서, 민주적 의사결정 절차를 무시한 정부의 사드(THAAD) 배치 결정을 듣게 되는 것이 우리 국민의 현실인 셈이다.  
 
사건의 배경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분단 시절에도 서독인들은 동독으로 갈 수 있었다. 서베를린이 동독 영토에 둘러싸여 있는 섬 같은 존재였던지라 서독의 다른 지역과 서베를린 사이를 왕래하려면 소정의 절차를 밟아 동독 땅을 반드시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가는 것도 물론 가능해서 서독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왕래가 가능했다.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가 ‘동백림(東伯林, 동베를린) 사건’을 발표해 대규모 간첩단을 만들어냈을 때, 사건에 연루된 194명 중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교민과 유학생 다수가 포함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동백림 사건에는 베를린의 이러한 지정학적 특수성, 현재와는 반대였던 남북한 경제 발전 수준의 차이, 파독 광부·간호사, 유학생 등으로 구성된 교포사회의 형성, 국내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1967년 6월8일 부정총선에 대한 대규모 시위 등 복합적인 배경이 얽혀 있었다.  
 
동백림 사건 관련 편지와 신문기사. 사진/뉴시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006년 1월26일에 발표한 '동백림 사건' 조사 결과보고서를 보면, "당시 한국유학생들은 본국의 어려운 형편과 정부의 엄격한 송금 제한으로 인해 상당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었"고 "반면 북한은 이 당시 체제우위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유럽 거주 한국인 및 유학생들에게 적극적인 선전공세를 벌였다"고 되어 있다(국정원 '진실위' 보고서·주요 의혹사건편 상권(II), 2007년, 296쪽). 또한 6·8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무력화하고자 중앙정보부가 서울대 학생조직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를 동백림 공작단의 일원으로 확대·왜곡해 동백림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기술하고 있다(앞의 보고서, 425쪽).
 
동베를린으로의 왕래가 가능했던 덕에 독일과 프랑스의 유학생(그리고 유학생 출신의 교수), 예술가들은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고 활동을 한 간첩으로 둔갑되었다. 사실, 동백림 사건의 발단은 서독에서 유학하고 귀국해 교수로 활동 중이던 헤겔철학의 대가 임석진 교수의 자수에서 비롯된다. 그는 조선일보 서독주재 이기양 특파원이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취재차 1967년 4월14일 체코에 입국했다가 실종되었다는 보도(1967년 5월14일)를 접하고 자신의 대북접촉 전력 노출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유학 시절 친분이 있던 박정희의 처조카 홍세표의 중개로 5월17일에 대통령을 면담하고 유럽 유학생들의 대북 접촉상황을 직접 진술함으로써, 해외 인사 30명이 광복절 초청 명목과 같은 중앙정보부의 거짓말, 납치에 가까운 임의동행 등에 의해 국내로 강제 송환된다.
 
윤이상(1917~1995)
 
동백림 사건 당시 이미 유럽에서 잘 알려진 작곡가였던 윤이상은 경남 산청 출생이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산청의 바로 정면에 자리 잡은 지리산 하늘 위를 상처 입은 용이 날고 있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이 내용은 <윤이상-루이제 린저의 대담: 상처 입은 용>에 실려 있다). 용이었으나 상처를 입어 승천하지 못하고, 세계가 알아주는 음악가였으나 고향에는 끝내 돌아올 수 없었던 불운한 인연을 고국과 맺은 윤이상. 그가 1958년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을 방문했던 것은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친구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고, 1963년 북한에 처음 간 이유는 고구려 벽화인 강서고분 사신도를 보고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침대 머리맡에 자신이 자란 통영의 사진을 붙여두고 서재에는 강서대묘의 사신도를 걸어두고 늘 쳐다보았다고 한다.
 
고 윤이상. 사진/뉴시스·윤이상평화재단
 
가서 동양을 펼쳐라
바다 밑 용왕으로부터 명을 받았다
한 마리 다친 용은
그렇게 태어났다
그렇게 떠났다

그 용이 광복절 초청의 이름 아래
한밤중 잡혀왔다
그 용이 감방 벽에 쇠붙이에 머리를 치받았다
타살을 거부할 마지막 자결의 힘으로
쏟아지는 피로 유서를 썼다
아들아 나는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러움 없다 간첩 사건은 조작이다……
그는 죽어가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무기수의 겨울이었다
떠다 둔 식수가 얼어버리는 감방
용은 웅숭그린 채
담요 둘러쓰고
엎드린 채

양자강 언저리 장주(莊周)의 나비를 꿈꾸었다
그의 오선지는 살아났다
천둥 치고
무너지고
그리고 적요했다

세계는 그의 음악을
정장(正裝)의 경건성으로 받들었다
< … >
('윤이상', 10권)
 
"물고문을 견디어"내고 "전기고문을 견디어"냈으나 "견디어내는 것은 / 못 견디어내는 것"이어서 "취조관 유리재떨이 집어들어 / 자신의 뒤통수를 쳤"던('머리칼 장미', 23권) 감수성과 천부적 재능의 이 불운한 작곡가는 자살 시도의 대가로 음악작업을 허락받는다. 그는 옥중에서 오페라 <나비의 꿈>을 쓰게 되는데, 이 작품은 1969년 2월23일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어 큰 호평을 받았다. 고문수사 후 윤이상은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스트라빈스키와 카라얀 등 200여 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제출한 탄원서와 독일연방공화국의 항의에 힘입어 1969년 2월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다. 1972년 뮌헨 올림픽 축전(祝典) 오페라를 위촉받아 ‘심청’을 공연하기도 했던 이 세계적 음악가는, 그러나 국내 정치상황과 맞물려 대한민국 입국이 번번이 좌절되었고 그의 음악은 오랫동안 연주가 금지되었다.
 
이응로(1904~1989)와 천상병(1930~1993)
 
일제강점기 조선땅에서 서예·사군자·묵화를 배우고 일본에서 미술학교를 다니며 서양화를 배우기도 했던 고암 이응로 화백은, 세계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장의 초청으로 1958년 12월 프랑스로 건너가 먼저 독일에서 1년간 체류한 후 1960년 1월부터 프랑스에 정착해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그가 동백림사건에 연루된 이유는 한국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기 때문이었다.   
 
동백림사건으로
고국에 왔다
고국의 중앙정보부에 왔다
고국의 대전교도소에 왔다

웬일인지
감방에서 붓과 페인트를 구할 수 있었다
4·6배판 정도의 책뚜껑만한
베니어판이면 되었다

거기에 뚝 멈춰선 황소를 그렸다
정지된 분노와도
발기된 성기의 화석과도 같았다
한 송이 꽃도 그렸다

대전교도소 사상범 사방
겨울의 철창을
비닐로 막았다
방 안은 영하의 냉방
손 곱아
붓이 잡히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여
붓을 잡았다

가까스로 봄이 와 꽃이 피었다
베니어판 위
그리하여 빠리로 돌아간 뒤
그의 한지 묵화
그의 상형문자 묵화
그의 민중무한 묵화
그것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졌다

< … >
으스스한 빠리 교외의 겨울
보리밭처럼
보리밭 위 종달새처럼
조국이 녹아들어
질척거렸다
(‘이응로’, 10권)
 
이응노 '군상'(137×208㎝, 한지에 먹, 1985). 사진/뉴시스
 
문자추상과 <군상> 연작―<만인보>의 표지 그림이기도 하다―으로 유명한 이응로 화백 역시 윤이상처럼 자신의 예술세계에 조국과 동양을 투영했던 예술가이다. 한편, 동백림 사건으로 가장 억울하게 희생된 예술가는 아마도 천상병 시인일 것이다. 해외에서의 명성으로 인해 사건 당시 타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윤이상이나 이응로가 동베를린을 방문했었던 것과는 달리, 천상병 시인은 단지 서울 상대 동문인 친구 강빈구 교수가 동베를린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건에 얽히게 된다. 동베를린을 방문하는 것이 ‘죄’가 되는지도 몰랐던 이 천진무구한 시인은, 평소 친구들에게 그랬듯이, 강빈구로부터 막걸리 값으로 오백 원, 천 원씩 받아썼는데 이것이 공작금으로 둔갑되었다. 
 
천상병 시인과 그의 부인 목순옥 여사를 찍은 김종구 전 한국일보 기자의 사진. 사진/뉴시스·유카리화랑
 
폐허 명동이 그의 문학의 시작이었다
< … >

그 명동 거리
천상병

누런 이빨이 웃어댄다
검정 얼굴이 꺼이꺼이 웃어댄다
울음과 웃음이 하나

친구 만나면

백원만 다우
이백원만 다우

< … >

그리하여
막걸리값
밥값 몇푼 받아

동백림간첩단사건
간첩공작금으로 되어버렸다

남산 지하실
고문
고문
와이셔츠에 
전기다리미 지나가는
고문
그 고문 6개월

재판받고 나와
행려병자로
시립정신병원에 어찌어찌 유치되어버렸다

그 천상병 죽었다고
친구들이
유고를 모아
시집 『새』를 만들었다
국판 양장본
친구들이 들고 다니며
팔았다

그는 살아 있었다
세상에 다시 나왔다
백원만 다우
내일 줄게
야 너 미래파로구나
(‘천상병’, 23권)
 
막걸리 한 병, 담배 한 값이면 하루 종일 부러울 게 없이 행복했다던 천상병 시인.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행려병자 취급을 받아 정신병원에 갇히고 폐인 같은 삶을 살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노래했듯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갔다('귀천(歸天)', <새>). 이런 불운한 희생자들을 양산한 후, 동백림 사건은 최종 선고심판에서 결국 피고인들 중 누구에게도 간첩죄를 적용시키지 못했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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