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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34화)이산(離散)의 세월
“이제 어머니는 북이고 아들은 남이었다”
2016-09-19 06:00:00 2016-09-19 06:00:00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1964년에 방송된 라디오 드라마이자 1965년 영화로 만들어진 <남과 북>의 주제가이다(한운사 작사, 박춘석 작곡, 곽순옥 노래). 이 노래는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의 배경음악으로 패티김이 불러 더욱 잘 알려졌는데, 세계 방송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이 생방송의 근원은 이산가족을 낳은 한국전쟁이었고 남북분단이었다. 정전 63년, 이번 추석에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휴전선 너머 고향을 그리워하고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생각에 눈물지었을 것인가. 실향도 이산도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을진대, 아니 그저 강요당한 역사였을 뿐일진대.
 
유네스코의 어떤 ‘세계기록유산’
 한국전쟁 33주년과 휴전협정 30주년을 맞아 기획되었던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원래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일회성 방송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물밀듯이 밀려든 이산가족들의 모습에 놀라 정규방송을 모두 중단하고 5일간 릴레이방송을 하게 된다. 78%의 시청률을 기록한 이 생방송은 이후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무려 138일에 걸쳐 453시간 45분 동안 계속되었는데, KBS 아카이브에 의하면, 총 10만952건의 이산가족이 신청하고 5만3536건이 방송에 소개되어 1만189건의 이산가족이 상봉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상봉사건’의 기록물(총 2만522건)은 2015년 10월 9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등재되었으니, 이산가족의 문제는 실로,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민족의 비극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1983년의 ‘사건’은 남한 내에서만 이루어진 것이니 남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의 상봉은 얼마나 요원한 것이었겠는가.
 
한국방송공사(KBS)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시작일 1983.6.30.).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의 한장면. 사진/국가기록원
 
휴전 직전
서부전선에서
치열하던 전투가 갑자기 중단되었다
어디에도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착각인가?
 
다시 총소리가
적과 적 사이를 채웠다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착각인가?
 
그날밤
황해도 평산땅의 한 소년 변주섭이
비 오는 예성강을 건넜다
맨발로
산등성이를 넘고 넘어
기진맥진 발바닥 갈라진 아픔 이기고
임진강을 마저 건넜다
 
< … >
 
덜덜덜 떨리는 몸으로
윗니와
아랫니가 따로 떨며
어머니를 자꾸 불렀다
비가 멈추지 않았다
 
이제 어머니는 북이고 아들은 남이었다 목소리가 달라졌다
 
주근깨 많은 얼굴이었다
이제부터 혼자였다
거지 노릇도
좀도둑질도 혼자였다
그러다가
식당 배달도 혼자였다
장차 딸과 아들 열하나를 낳을 아버지인 줄
모르는 혼자였다 역삼각형 얼굴이었다
 
어머니를 부르며 엉엉 울었다
남과 북은
이렇게 사람의 분단이었다
다음날부터 소년은 울지 않았다 눈썹이 빽빽했다
장차 인쇄소 절단기에 손가락이 잘렸을 때도 울지 않았다
(‘두 강물’, 16권)
 
 1983년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1985년 9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최초로 실현하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1973년 7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적십자회담 제7차 본회담에서 대한적십자사측은 ‘이산가족 성묘방문단 교류’를 북한 측에 제의하였고, 본회담이 중단된 이후에도 남북적십자 실무회의(1974년 7월~1977년 12월)를 통해 남북한 이산가족들의 고향방문사업을 꾸준히 제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 사업은 1985년 5월 28일 서울에서 열린 제8차 본회담을 계기로 실현되는데, 8월 22일 제3차 실무대표접촉에서 작성한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에 관한 합의서’에 기초해 각기 151명으로 구성된 양측의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이 9월 20일부터 23일까지 서울과 평양을 상호방문하게 된 것이다.
 
한국방송공사(KBS)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시작일 1983.6.30.).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의 한장면. 사진/국가기록원
 
사라져가는 이산가족 생존자
 1988년부터 시작해 2016년 8월 31일 현재 통일부의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등록된 이산가족의 현황을 보면,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총 13만892명 중 생존자가 6만3152명, 사망자가 6만7740명으로, 전월 대비 신청자는 18명 증가, 생존자는 542명 감소, 사망자는 560명이 증가했다. 연령별 생존자 현황을 보면, 90세 이상이 10만322명으로 16.3%이고, 80-89세가 2만7600명으로 43.7%, 70-79세가 1만5260명으로 24.2%이다. 전체 생존자의 84.2%가 70세 이상의 고령층이다 보니, 이산가족 당사자들도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도 마음이 더욱 급해질 수밖에 없다. 이산가족 사망자 비율은 2016년 2월에 이미 50.4%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50%를 돌파했고, 6개월만인 8월에는 약 51.8%에 이르고 있어 사망자 비율이 빠르게 증가함을 알 수 있다.
 
 남북 합의에 의한 이산가족 상봉 횟수를 정권별로 살펴보면, 박정희 정부까지는 전혀 없었고, 전두환 정부 때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85년에 한번 있었으며, 노태우, 김영삼 정부 때도 전무했다. 이에 비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활발한 성과를 낳았는데, 그 물꼬를 튼 것이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결과로 발표한 ‘6·15남북공동선언’이다. 이 선언의 제3항은 다음과 같다.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한국방송공사(KBS)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시작일 1983.6.30.).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의 한장면. 사진/국가기록원
 
남으로 간 사람 3백만명 안팎
남에서
북으로 간 사람 10만 이상
그 10만명 처음에는 눈부시었다
그러나 하나하나 사라져가고
얼마 남지 않았다
 
남에 온 3백만명은 뿌리 같았다
뿌리뽑힌 자라고
노래했으나
뿌리가 깊숙이 내렸다
 
고향이란 가슴속 동산의 무덤이다
고향이란
그곳을 떠난 자의 기억이다
고향이란 시간이다
 
남북 이산가족 1천만은 한국사의 시작이다
결코 돌아가야 할 과거가 아니라
내일의 시작이다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두만강 기슭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대동강가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가서 썰매 타고 싶다
어머님
어머님 살아 계신지요
  
< … >
(‘고향’, 16권)
 
 6·15남북공동선언에 따라 2000년 8월 15일 광복절에 제1차 남북 이산가족 각 100명씩을 포함한 고향방문단 각 151명이 서울과 평양에서 상봉했고, 같은 해 11월 30일 제2차 남북 이산가족 교환이 남북 각 100명씩 다시 실현되었다. 김대중 정부 때 6번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은 노무현 정부 때 10번 이루어진 반면,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각 2회씩 이루어졌다. 총 21회의 상봉 중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이 16회(76%)를 차지하니 압도적인 셈이다.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을 늘 방해하는 정치적 요인들이나 남북한 정부 간의 이해관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상황 변화 등이 이때라고 없었을 리 없겠으나―사실 북한의 제1차 핵 실험이 2006년 10월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는 2007년 5월과 10월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했다―정부 수반의 의지와 정책에 따라 상이한 결과를 내올 수 있음이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들 중 사망자가 생존자보다 더 많아진 작금의 현실상, 고령의 신청자들이 사망하기 전 단 한 번이라도 60년 이상을 그리워해온 가족들을 만나려면 한 해에도 약 7000 명씩의 상봉이 이루어져야 할진대, 그동안 100명씩 야금야금 이뤄진 만남이 그나마도 남의 사드 배치니, 북의 핵실험이니 해서 감감무소식이 되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교류의 정례화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에게는 독특한 법이 있다. 2009년 3월 25일 제정되어 그해 9월 26일부터 시행된 ‘남북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및 교류 촉진에 관한 법률’(이산가족교류촉진법)이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또한 2008년에 완공한 ‘금강산 면회소’(2010년 비록 북한 측에 의해 몰수되었으나), 즉 이산가족 면회소가 있다. 문제는 이것들이 실효성 있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법률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최소한 남북 이산가족의 생사확인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류를 촉진하고 만남을 정례화해, 고향마을까지는 못 가더라도 면회소에서든 어디에서든, 고령의 신청자부터 ‘컴퓨터 추첨’ 없이 살아남은 가족들을 혹은 그 후손들을 만나게 해주어야지 않겠는가. 하다못해 영상편지라도 ‘전달’될 수 있게―제작, 보관만할 게 아니라―북한과 협상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쉬운 대로, 2005년에 3차례, 2007년에 4차례 실행한 ‘화상상봉’이라도 확대해야 하지 않을까.
 
 혹자가 말하듯이 “북한의 계속되는 도발과 위협” 때문에 이산가족 상봉을 포기할 게 아니라 더 현명한 방법을 찾아야 할 일이다. 남과 북의 정권들이 어떤 정치적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전장치를 걸어 이산가족의 문제를 온전히 인도적 견지에서, 정치로부터 독립시켜 꾸준히 일관되게 다루지 않는 한, 남북으로 찢긴 이산가족들의 시름과 통한은 깊어갈 따름이다.
 
 이들 가족 중에는 <만인보>의 시인이 “왜 그대 고향밖에 모르는가”로 시작해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월남인 ‘신현구’도 있다. “꽝꽝꽝 / 얼어붙어 터지는 얼음 두께 9쎈티미터의 추위 / 모진 밤 / 중국 의용군 떼거리들”을 피해 “어머니 손가락지 둘 / 몸에 품고 / 예성강 하류 나루를 헤엄”쳐 건넌 “열다섯살 신현구”. 이제 그는 “손자 손녀 일곱”의 할아버지가 되었으나 “새벽녘 해묵은 가락지만이 어둠속에서 / 그 멈춘 과거만이 먼동 속에서 / 그의 힘이었”고 “언제나 마음속 다시 강을 건너고 산을 넘었다”(‘신현구’, 16권). 그러나 다른 한편, 부정할 수 없는 이 민족의 거대한 비극 앞에 고은 시인은 애조 띤 고백 하나를 던져 우리의 내일을 위무하고자 하는 듯하다.
 
한국방송공사(KBS)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시작일 1983.6.30.).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의 한장면. 사진/국가기록원
 
자네한테 허물없이 말하고 싶으이
 
이번 난리에
북쪽 동포
남으로 쏟아져오고
남쪽 동포
북으로 가기도 하는 사연들이
꼭 재앙이라고만 말하고 싶지 않으이
  
사람에게 정든 산천 두고 도망치는 일이
어찌 재앙이 아니겠나
전란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 제 고향 떠나
삼팔따라지가 되겠나
누덕누덕 피난민 신세 되겠나
 
그러나 그런 일이 꼭 재앙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이
  
평양 기림리 인명식 씨가 외톨이로 내려와
남한 대구 과부 오경숙 여사와 짝짓고
북한 성천 처녀 위홍례 양이
전주 완산동 한준만 군의 애인이 되었으이
애인이다가
엊그제 예배당에서
신혼부부가 되었으이
 
< … >
 
자네한테 말하고 싶으이
 
너무 오랜 세월
한 고장에서만 살았던 것
이 전란 덕분에
한번 바꿔
이 겨레 장삼이사 뒤섞여
남이 북이 되고
북이 남이 되어
또다른 고향산천에 아픈 삶의 꽃 피어났으이
 
< … >
카아! 또 한잔
(‘신혼부부’, 16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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