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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36화)대종교와 독립운동
“그는 도덕 자체였다 꿈 자체였다”
2016-10-10 06:00:00 2016-10-10 06:00:00
이글거리던 여름의 무더위가 물러가고 마침내 가을이 찾아왔지만, 해결되지 않은 현안들로 인해 여기저기서 개최되는 집회들의 열기는 여전히 뜨겁다. 토요일인 지난 10월 8일에는 농민 고(故) 백남기씨 추모대회가 시민 3000여 명이 참여한 서울을 비롯해 전국의 여러 도시에서 열렸고, 내일 11일에는 사드 배치 철회를 요구하는 '원-피스(One-Peace) 종교·시민 평화결사'가 원불교 주최로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인데 성주·김천 주민, 7대 종단 대표단, 시민사회단체 등이 참석하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될 전망이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원불교 개교 100주년이다. 게다가 대종교의 나철 대종사 100주기이기도 하다.
 
홍암 나철(1863~1916), 단군교를 중광(重光)하다
지난주 월요일은 개천절―원래 음력 10월 3일이던 것이 양력으로 바뀌긴 했으나―이었다. ‘개천(開天)’, 즉 환웅이 천신(天神)인 환인의 뜻을 받들어 하늘문을 열고 태백산(백두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와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의 대업을 시작함을 뜻한다. 하늘을 연 이 날과 뗄 수 없는 것이 대종교(大倧敎)이다. 대종교는 나철 대종사가 1909년 ‘단군교’라는 이름으로 단군신앙의 원형인 전래 신교(神敎)를 계승해 중광(다시 일으켜 세움)한 것인데 1910년에 ‘대종교’로 개칭되었다. 이로써 몽고 침입 이후 약 700년간 단절되었던 민족의 고유한 종교가 재건된 것이다. 그러나 나철이 1909년 음력 1월 15일 오기호, 최전, 류근, 정훈모, 이기, 김인식, 김윤식 등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함께 “서울 북부 재동 취운정 아래 6간 초가집 북벽에 단군의 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하며 ‘단군교 포명서’를 공포”하게 되기까지는 일제에 침탈당해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고군분투한 그의 전사(前事)가 있었다.
 
조선 말기에 태어난 사람 역마살 한짐 지고 나왔다
나철 선생이 누구인고
을사조약 체결되자
왜국 조야에 담판하러
현해탄 돛배 타고 건너갔다 돌아와
그 조약 주도했던 매국노 암살에 나선 사람
벼슬이고 뭐고 버리고
테러리스트로 나선 사람
그뒤로 섬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그로부터 백두산 백봉도사 만나
이 땅 역대의 그늘 속으로 이어진 단군 종교로
대종교 새로 연 사람
그 사람 나철
(‘나철’, 2권)
 
전남 보성군 벌교읍 출신인 홍암은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했으나, 관직을 사퇴하고 귀향한 후 1904년 오기호, 이기 등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해 구국운동에 뛰어든다(당시 그의 이름은 나인영으로, 대종교를 중광하면서 나철로 개명했다).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얼마 전인 1905년 6월 오기호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위해 한ㆍ일ㆍ청 삼국이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정부의 대신들에게 전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하지만 이 외교교섭은 실패로 끝난다.
 
한편, 1906년 1월 24일 밤 나철은 서대문역(지금의 서울역) 근처를 걸어가다가 한 노인을 만나는데, 그는 백두산 백봉신형(白峯神兄)의 명을 받은 두암 백전이라는 인물로, 나철에게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를 주고 가지만 아직까지는 나철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다. 이듬해인 1907년 1월 1일을 기해 입궐하는 을사오적을 길 위에서 처단하기로 한 나철은 결사대들을 조직해 암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정미대거사건(丁未大擧事件)’). 이로 인해 그는 10년의 유형을 선고받고 신안군의 지도에 유배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고종의 특사로 사면된다.
 
그 후, 1908년 11월 12일 일본과 외교담판을 짓기 위해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나철의 숙소로 다시 한 노인이 찾아와 자신이 백봉신형의 제자인 미도 두일백임을 밝히고 나철에게 ‘단군교 포명서’와 단군신앙에 관련된 책들을 건네주며 미래의 사명이 이 정신의 중흥에 있다는 말을 전한다. 마침내 나철은 1908년 12월 9일 밤 미도 두일백으로부터 단군교 의식을 통해 영계(靈戒)식을 받고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이라는 문구를 가슴에 새긴 채 귀국하게 된다. 단군신앙의 중광에서 새로이 구국의 길을 찾고, 많은 이들을 위한 독립운동의 길을 닦게 된 것이다.
 
독립운동의 중심에 선 대종교
나철을 그린 앞의 시는 다음과 같이 계속 된다.
 
조선땅 곳곳 방방곡곡이요
만주벌판 드넓은 산과 들이요
백두산을 한복판으로
화룡현 청파호 물가에
대종교 총본사 두어
단군 고토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 신국이라
동서남북 4도 교구 두어
대종교도 30만으로 껑충 불어났다
조선동포 3할
게다가 김동삼 김규식 이시영 김좌진
이동휘 신채호 조소앙을 망라하고
이상설 이동녕 신규식 서일 강석화로
교구를 맡게 하여
대종교 사람으로 편대를 삼고
대종교 돈으로 총포 사들여
청산리 큰 싸움 앞서 크고 작은 싸움으로
대종교가 이렇게 떨치는데
왜적이 그저 두고 볼 일인가
대종교 해체를 명령하자
1915년 국내로 돌아와
구월산 삼성사에서
추석날 북으로 백두산에 절하고
남으로 고향 벌교 선영에 절하고
폐기법으로 숨 끊어 자결하였다
사 없이
공으로 살고 공으로 죽은 사람
조선땅 좁아라 하고
고조선 드넓은 땅 달린 사람
그가 죽자
< … >
제자 김헌 윤세복 서일이 이끌어가다가
그들 역시
독립군 거덜나면서 바닥났다
간도 의병과 독립군 시대 지나서
그 뒤로 유격전 시대 들어서자
나철의 고토노선 고조선노선이
새 노선으로 돌아섰다
이 싸움의 전환에 나철 선생이 달려온 것
대종교 나철!
그냥 나철!
첫째 그는 도덕 자체였다 꿈 자체였다
(‘나철’, 2권)
 
만주 동경성 시기(1935~1945) 대종교총본사와 직원(앞열 두번째-단애(윤세복)종사, 네번째-이수원 선생, 맨 오른쪽이 이현익 선생, 뒷열 두번째-중파 김진호 선생). 사진/대종교
 
만주 항일독립운동사의 인물들을 조금만 살펴본다면 그들의 대다수가 대종교인이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 독립운동에 직ㆍ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순교한 대종교인이 10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30만 대종교도의 3분의 1인 셈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정훈모를 비롯한 몇몇 친일분자들에 의해 교단의 내분이 발생하고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자 나철 대종사는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로 옮기게 된다. 앞의 시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대종교는 1911년 5월 백두산 기슭 화룡현 청파호에 총본사를 두고, 동만주 일대와 노령·연해주 지방을 관할하는 동도교구, 남만주에서 중국 산해관까지 관할하는 서도교구,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는 남도교구, 북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북도교구, 중국ㆍ일본 및 구미지역을 관할하는 해외교구까지 5개의 교구를 구축하였다.
 
만주에서 활동한 수많은 대종교인 무장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서일, 홍범도, 김좌진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나철의 제자 서일을 총재로 하는 북로군정서는 대종교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1920년 10월 만주 지린(길림)성 화룡현 청산리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전투에서 신화적인 승리를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청산리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의 전투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6월 봉오동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둔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장군 역시 대종교인이었다. 또한, 음력 1918년 11월 대종교 2대 종사 무원 김교헌(김헌)이 재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결집해 선언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는 1919년 동경유학생들에 의해 발표된 ‘2·8독립선언서’와 국내의 ‘3·1독립선언서’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대종교인들의 독립운동이 이렇게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혹은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홍암 나철 대종사가 1916년 자결로써 일제의 폭압에 항거한 데에 큰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가 191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을 공포해 대종교를 더 극렬히 탄압하자, 홍암은 ‘순명(殉命)’을 결심하고 1916년 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 환인ㆍ환웅ㆍ단군을 모시는 사당)에서 천제를 지낸 뒤 시자들을 물리치고 절식수도(絶食修道)’에 들어가 폐기절식(閉氣切息)의 방법을 사용해 스스로 숨을 멈춘다. 그의 수행이 매우 높은 경지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그의 자결을 통해 대종교의 무장투쟁은 본격화되고 항일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민족’에 머물지 않는 ‘홍익인간’ 사상
한편, 대종교가 우리의 국사와 국어에 미친 영향 역시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글날인 어제 떠오를 법한 인물인 주시경 선생은 ‘한글’이라는 낱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한글체계를 정립하여 보급한, 한국어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국어학자이다. 그런 그가 개신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하고 본격적인 한글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그의 수제자였던 김두봉이나 후일 조선어학회 사건에 휘말리는 최현배, 이극로 등도 대종교 정신을 토대로 한글연구를 진행하였다. 한국사에서도 2대 종사 무원 김교헌을 비롯해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등의 역사관이 대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언어와 역사가 한 민족의 정체성의 핵심을 구성한다고 볼 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대종교의 영향은 필연적이었으리라.
홍암대종사 묘비 "대종교 대종사 홍암 선생 신해지장(大倧敎大宗師弘巖先生神骸之藏, 대종교 대종사 홍암 선생의 신령한 영해가 묻힌 곳)". 사진/대종교
 
 
나철 대종사가 남긴 여러 유서들 중 딸에게 남긴 것은 한글로 쓰여 있어 인상적인데 옮기면 다음과 같다. “열네 해 동안 네 얼굴을 못 보고 오날 천고영별은 네 마암에 매친 한이 잇슬듯 하고 내 눈에 항상 걸일듯 하나 이 길은 곳 영생하는 한울길이니 부대 애회를 두지 말고 아비를 생각커든 대종교 큰 도를 졍셩으로 밋고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노 오라 림종에 두어자 유탁 잇지 말라. 친부 자필”.
대종교가 보통 민족종교로 불리지만, ‘홍익인간’의 이념이 사실 인류보편애적인 인본주의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대종교가 추구하는 이상이 하나의 민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물론 나라를 잃은 식민지의 현실 속에서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할 수 없으므로 당시로서는 나라/민족의 독립이 선행조건이었고 그를 위한 무장투쟁도 필연적이었지만.
<만인보>는 단군신앙과 관련해 우리에게 한 가지 주의를 주고 있다. 그것은 예전에 우리사회가 자주 사용하던, 이른바 ’단일민족‘, ’한핏줄‘이라는 표현과 우리가 성찰해 보아야 할 그 이면에 담긴 뜻에 관한 것이다.
 
역사 아니다 그러나
이 겨레에
처음으로 패권을 시작한 억센 당골 박수
그로부터 나라가 있었다 한다
그로부터 노예가 있었다 한다
그로부터 내 땅 오백리가 있었다 한다
그로부터 몇나라 갈라져 나와 있었다 한다
 
그런데 어찌
이 세상에 단일겨레 있겠느뇨
나 하나가
수많은 피와 씨 뒤섞이는 누대 지나
나 하나인 것을
어찌
단군할아버지 한핏줄이겠는가
 
< … >
(‘단군’, 7권)
 
보성군에 의해 나철 대종사의 벌교 생가가 복원되었고 현재 기념관도 건립 중이라 한다. 또한 ‘홍암 나철 선생 선양회’가 매년 중국 화룡시 청호촌에 있는 대종교 3종사(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 백포 서일) 묘역을 찾아 벌초와 참배를 해 왔다고 한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보성군이 3종사 묘역이 있는 화룡시와의 교류를 위해 자매결연을 앞두고 있었으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 때문에 자매결연을 취소한다는 통보가 7월에 왔다는 전언이다. 사드의 영향력이 골고루 미치는 듯하여 씁쓸하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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