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기자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37화)“어두운 시대 / 그가 지은 노래들은 / 국가(國歌)였지”
70년대 사람들 ④민중문화의 선구자들
2016-10-17 06:00:00 2016-10-17 06:00:00
‘포크 록의 대부’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어느 하나에 머물지 않는 음유시인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국내외로부터 찬반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문학의 영역이 침범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이미 자신의 저서(Dylan's Visions of Sin, 2003/2004)에서 밥 딜런을 시인으로 분석하고 예이츠, 하디, 키츠, 테니슨 같은 시인들과 비교해 논한 크리스토퍼 릭스(Christopher Ricks) 같은 평론가 겸 시 전공 학자도 있다. 밥 딜런은 1970년대 한국 포크음악의 발전에 영감을 주었고 이는 독재시절 청년들의 저항문화로 연결되지만, 이 청년들은 또한 한국적인 민중문화를 꽃피우기도 했다.
 
‘아침이슬’에 머물지 않는 김민기(1951~ )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으나 김민기는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음악의 길을 걷는다. 1970년 그가 작곡·작사한 ‘아침이슬’은 동시대 젊은이였던 양희은에 의해 처음 불리고 이듬해인 1971년 <김민기 1집>에 실리지만, 1975년에 결국 금지곡이 되고 만다.
 
60년대 청년문화 그리고 통기타
< … >
양희은
 
그의 당당한 목소리 이전
몇십년의 청승인 이난영 황금심 이미자가 아니었다
김추자가 나왔다
 
그런 노래 저쪽
70년대 <아침이슬>이 새로 들려왔다
응혈의 음색
투원반의 음향
슬픔도 슬픔이 아닌 의지
 
부대(部隊) 같은 공화국 나뭇가지들에게 바람이 걸려 울었다
(‘양희은’, 14권)
 
김민기는 1971년 김지하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 함께 많은 작업을 하게 된다. 당시 김지하는 1970년 <사상계>에 자신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싣고 그것이 다시 신민당 기관지인 <민주전선>에 재수록 되는데, 그 내용이 문제가 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오적 필화 사건’).을사오적’에 빗대어 제목을 가져온 <오적>은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의 오적이 저지르는 부정부패를 생생한 표현과 해학으로 풍자·비판한 이야기 시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민주전선>은 압수되고 <사상계>는 1970년 9월 27일 폐간된다.
 
김민기는 김지하 등과 함께 폰트라(PONTRA: Poem ON TRAsh, 쓰레기 위의 시)라는 모임에 참가해 한국문화의 방향에 대해 논하기도 하고, 신정동의 야학과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에 참여해 노동자들과 연극을 만들기도 하였다. 한편, 1973년 김지하가 희곡을 쓴 연극 <금관의 예수>의 전국 순회공연에도 참여하게 되는데, 여기에 나오는 김민기 작곡의 노래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첫 번째 공연지인 원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어둠의 시대를 살던 70년대 대학가의 재주 많고 뜻있는 젊은이들은 민중과 민족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한국의 전통문화에 눈을 돌리게 되는데, 즉 판소리, 탈춤, 마당극 같은 연희 형식을 활용하게 된 것이다.
 
70년대 대학 마당에는
그동안 전혀 보이지 않던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녀석들
껑충껑충 나타났으니
< … >
 
그 사람들이 바로
탈이었다
탈이었다
계몽기 지식 따위 싹 작파해버리고
탈춤이었다
껑충 맺고 풀기
꺼껑충 탈춤이었다
(‘탈’, 15권)
 
그리하여 마침내 1974년 4월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이후 마당극 운동의 시발점이 된, 저 유명한 소리굿 '아구'를 공연하게 된다. 판소리와 전통연희 형식을 사용한 이 공연은 이종구의 작곡발표회 2부에서 진행되었는데, 대일 굴욕외교 이후의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기생관광을 소재로 하여 풍자·비판한 것이다. 김민기, 이종구, 김지하의 공동창작으로, 남사당 덧뵈기 중 먹중마당의 기본 골격을 빌려와 만들었고 이애주, 채희완, 임진택, 김석만이 출연했다.
 
김민기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에도 밖의 집회 현장에서는 그가 만든 노래들이 불렸고, 군대 안의 그는 중앙정보부 요원으로부터 노래를 만들라는 강요를 받는다. 이 때 그가 만든 노래가 다음의 것이라 하니, 바깥의 노래를 상쇄시킬만한 노래를 기대했을 중정(혹은 정권)의 분노가 카투사(KATUSA)였던 김민기를 영창에 보내고 다시 최전방으로 보냈다는 사실이 별로 놀랍지는 않다. “분홍빛 새털구름 하하 고운데 / 학교 나간 울 오빠 송아지 타고 저기 오네 / 읍내 나가신 아빠는 왜 안 오실까? / 엄마는 문만 빼꼼 열고 밥 지을라 내다보실라”(‘식구생각’, 1975년 작).
 
< … >
 
어두운 시대
그가 지은 노래들은
국가(國歌)였지
독재의 나날
대학생에게도
제적생에게도
 
정작 그는 미행당하며
어디 가서 흉년의 농사도 지었지
 
그러나 그의 노래는 한 시대의 광장과 골목에서 풍년으로 퍼져나갔지
(‘김민기’, 14권)
 
1977년 제대 이후 이 천재적인 예술가는 부평의 봉제공장 노동자로부터 시작해, 건설현장 인부, 탄광 광부, 농사꾼 등 다양한 삶을 살았다. 동료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만들어 불러준 노래가 '상록수'이고, 1978년엔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만들었다. 그해에 고향인 전북 익산으로 내려간 김민기는 1979년 10·26 후 전북 김제에서 소작 농사를 짓게 된다.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을 제작·발매하고 1991년에는 극단 학전을 세운다. 독일 원작을 그가 한국의 뮤지컬로 완전히 바꾸어 낸 <지하철 1호선>은 1994년부터 2008년까지 총 4천회의 공연과 71만명의 관람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제 그가 수년째 청소년극, 아동극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소년의 열정으로 이 땅의 미래를 가꾸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의 노래 제목처럼 “‘꽃 피우는 아이’라고 감히 별명을 붙여준다면 결례일까.
 
연희마당의 광대 임진택(1950~ )
70년대 마당극운동을 논할 때 소리꾼 임진택을 빼놓을 수 없다.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이나 일찌감치 전공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광대’로 불리기를 원하는 그는 현대의 창작판소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임진택과 함께 마당극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채희완은 1970년 서울대에 탈춤반을 만들고 타 대학들에도 탈춤반이 조직될 수 있도록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술 한말 마시고 흙벽에 기대어 있다가도 / 새벽이면 머리 한번 흔들고 일어나 / 벗어 둔 탈 하나하나 챙“기고 ”탈꾼 하나하나 챙겨 / 꾸짖는“ 이 춤꾼에 대해 고은 시인은 ”70년대 후반 이 땅의 젊은이라면 / 그들의 굿판 뒤에는 / 으레 채희완의 장군잠자리 머리 같은 눈망울 / 껌벅 준엄했다“고 묘사하고 있다(‘채희완’, 13권).
 
1974년, 지명 수배된 선배를 숨겼다는 이유로 긴급조치 4호 이른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임진택은―아직 판소리를 배우기도 전이었으나―김지하 시인의 담시 <비어(蜚語> 중 한 편인 <소리내력>을 작창한다. 이후 1974년 12월 31일 긴급조치 해제와 구속자 석방을 위한 항의 및 기금마련을 위한 행사가 열린 명동성당에서 창작판소리로 정식 공연을 해 주목을 받게 된다. 이보다 앞선 1973년에는 원주에서 가톨릭문화운동을 하던 김지하가 농촌계몽용으로 <진오귀굿>의 대본을 쓰고 임진택이 연출, 채희완이 안무를 맡아 야외에서 공연하였다.
 
임진택은 김지하의 <오적>을 판소리로 부르고 싶어 명창 정권진의 제자가 되는데, 정권진의 아버지 정응민은 조선시대 판소리 명창인 정재근의 조카이고 정재근은 서편제 판소리 시조로 알려진 박유전의 제자이다. 정권진은 강산 박유전으로부터 계승된 보성 지방의 소리인 '강산제(江山制)'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임진택이 판소리를 배운 목적은 <오적> 때문이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오적>의 작창은 1994이 되어서야 실현된다. 대신, 그보다 앞선 1985년, 임진택은 창작판소리 <똥바다>와 자신이 마당극 전문극단으로 창립한 연희광대패의 창립공연 <밥>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반도의 거기에
지평선이 하나 있다
전북 김제 들녘
 
그 들녘의 새벽 같은 신명으로 태어나
 
쥘부채 탁 펼쳐
조선 숙종조 판소리 이래
얼쑤
한바탕 똥물 토하듯
묵은 피 토하듯
 
아니다 바람 일듯
바람에 실버들 흔들리듯
 
그 걸쭉한 것
그 구슬픈 것
그 다급한 우박 퍼붓는 것
그 가녀린 것
< … >
그 소리의 입과
그 소리 듣는 귀가 하나가 되어
 
한바탕 둥글게 모여 앉아
그 가운데 서 있는
임진택
떠꺼머리 임진택
 
그대의 <오적>이 내달리니
감옥의 김지하가
문을 열고 나온다
이 아니 소문난 잔치 아니던고
(‘임진택’, 13권)
 
70년대에 일어나 80년대에 꽃을 피운 탈춤·마당극 문화가 사회·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사그라지고, 이 대학 저 대학의 탈춤반이 최소 인원 부족으로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런 녹록치 않은 여건 속에서도 <오월광주>, <백범 김구>, <남한산성> 등 꾸준히 창작판소리를 만들어가는 대가의 모습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두 대학 탈춤반의 상황을 주목하게 된다. 한 학교는 수년 간 동아리의 문을 닫아야 했으나, 수업을 통해 탈춤에 매료되어 스스로 춤을 배운 한 재학생의 노력과 여러 해 동안 체육관에 모여 꾸준히 연습해 온 졸업생들이 힘을 합쳐 다시 동아리를 재건했다는 소식이다. 다른 학교의 탈춤반 역시 문을 닫게 되었는데, 졸업생들이 전통을 지키려고 정기적으로 스튜디오를 빌려 연습한다고 한다. 인상적인 것은 참가자들의 다수가 당시(80년대) 춤을 추고 싶어 왔으나 ‘운동권’을 병행할 수 없어 떠났던 성원들이라는 점이다. ‘문화’보다는 ‘운동’에 방점을 찍어야 했던 당시 ‘문화운동’의 한계, ‘순수’대 ‘참여’의 대립만 존재했던 한계, 정의를 위해 정치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형식은 죽고 내용만 강조되던 그래서 예술이 도구화되던 시절의 한계가 춤을 추고 싶어 온 이들을 죄책감으로 떠나가게 한 것은 아닐지.
 
20년전 6월항쟁의 중심에서 민중미술운동을 펼쳤던 최민화 화백의 '쏘지마라'. 사진/뉴시스
 
민중미술의 조용한 선구자 오윤(1946~1986) 
40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치던 해 오윤은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이 된 개인전 ‘칼노래-오윤 판화전’을 서울과 부산에서 열었다. 1965년 서울대 조소과에 입학한 오윤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비롯해 조선 민화, 무속화, 불화, 나아가 탈춤, 판소리, 풍물 등 전통문화의 양식에도 관심을 가졌다(마케팅-지옥도 1, 1980년 작을 보라). 그는 1969년 다른 작가들과 현실 비판에 입각한 ‘현실동인’전을 열려다가 실패하고 1979년 ‘현실과 발언’을 창립하게 된다. 한국 리얼리즘 미술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하는 오윤의 70년대 활동은 60년대 대학가의 문화운동을 80년대의 민중미술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면, 이념의 발현에 치우쳐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놓치곤 했던 그래서 종종 조악한 느낌을 주기도 했던 80년대 민중미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예술적 표현의 풍부함을 느끼게 된다.
 
내용으로 인해 형식을 간과하지 않았던 오윤. 그는 대중과의 소통을 중시해 고무판화와 목판화를 주로 제작하였다. 한국적인 정서와 힘의 표현을 놓치지 않고 민중의 고단한 현실을 그려내면서도 ‘민족·민중’의 개념으로만 가둬둘 수 없는 깊이를 가진 작가 오윤에 대해 <만인보>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한번 부릅떠보지 않은 눈
한번 소리치지 않은 입
한번 불끈 주먹 쥐어
날려보지 않은 손
 
하루 내내 말 한마디 없이 시들은 듯 살았다
그러나 그 매서운 눈에
드높은 하늘 따위 담지 않았다
 
가난한 아낙 가난한 사내 새겨
작은 흑백 판화로 찍어냈다 전율이었다
그러기 전에
그의 그림들에는
때로 신들린 무당이 어른거렸다
 
< … >
그로 하여금 한국 휴전선 이남에서는
70년대 후반 이래
저벅저벅
민중미술이라는 말이 걸어나왔다
 
이윽고 그 민중미술은 걸개가 되어
그 아래 싸우는 젊은이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오윤’, 11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