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역대 왕조나 정권을 보면 누군가의 ‘꼭두각시’ 역할을 한 권력자가 드물지 않았으나, 우리에게 익숙한 ‘외세의 조종’과는 차원이 다른 조종으로 인해 온 나라가 들끓고 있다. 민속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또는 ‘박첨지놀음’)은 주인공 박첨지가 전국을 유람하며 만나는 사람들과 겪게 되는 일들을 통해 승려의 타락, 축첩제도 같은 사회문제들과 지배계층의 횡포를 풍자하고 있다. ‘꼭두각시’는 본래 채록본(採錄本)에 따라 박첨지 또는 표생원의 본처인 등장인물의 이름이었으나 요즘은 그 뜻이 달리 이해되듯이, 백성이 즐기던 이 풍자극과는 대조적인 신(新)인형극이 백성도 모르게 한반도에서 연희되어 온 셈이다.
신정(神政)아닌 신정의 역사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신정(神政)’을 “신의 대변자인 사제가 지배권을 가지고 종교적 원리에 의하여 통치하는 정치 형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고유한 의미에서의 신정 정치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던 동·서양의 고대 국가들에서 찾아질 터인데, 예를 들어 중국 은나라(상나라)의 황제는 황제이자 동시에 제사장으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갑골로 점을 쳐 ‘신의 뜻’을 물었다고 하는데, 언제 누가 무슨 내용으로 점을 치고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를 새겨 넣은 글이 바로 갑골문(甲骨文)이다. 은나라 왕/제사장이 비·바람과 같은 기상, 자연 재해, 농사의 풍흉, 제사, 전쟁, 수렵, 질병 등의 문제를 가지고 점을 쳤다면, 한국의 현 대통령은 국정의 갖가지 사안들에 대한 결정을 사이비 종교 교주(최태민)의 계승자(최순실)에 의지해 실행한 듯한 물증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독도 문제나 위안부 문제(대일 외교), 개성공단 폐쇄(대북 관계) 같은 사안들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올해 초인 1월 29일, 국회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새누리당 종교위원회의 협조 하에 한국역술인협회가 주최한 ‘재수굿’이 이른바 ‘2016 병신년(丙申年) 합동 국운 발표회'의 식전 행사로 열려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총선과 남북관계에 대한 조언을 ’공수‘ 즉 신 내림을 받은 무속인의 전언인 ’신의 소리'에서 찾았던 정부인지라 작금의 사태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다.
대원군
이 풍운의 시절
풍운의 정객이여
운으로나
꾀로나
지나친 정객이여
권세 한 손아귀 틀어쥐고
제일 먼저 생각한 일이
외척 발호 막으려면
며느리 잘 골라야겠다
손수 골라야겠다고
고르고 고른 끝
한미한 남한강가
민씨네 촌처녀 데려왔는데
이 중전한테
어찌 그리 농락당하고 말게 되었는가
< … >
중전이 얼마나 독살스러웠는지
얼마나 시샘 솟고
얼마나 호사 탐하였는지
얼마나 척지어 원수한테 살벌하였는지
무당에 푹 빠진 그 중전
조선왕조 안방이야
외유내불로
겉으로야 주자학이건만
대비마마
중전마마 거의가 부처를 섬겼는데
그 끄트머리
민중전은 아예
무당에 심사를 의뢰한바
정동 오르막 앵무라는 무당한테
시아버지 대원군
제발 뒈지도록 저주 기도를 시키고
신당의 벽에
시아버지 화상 붙여
거기에 좌시 화살 밤마다 쏘아대면
그런 날 밤에는
대원위대감 꿈자리깨나 사납고
급환으로 진땀깨나 흘리고 하였나니
그러다가 운현궁 밀정한테
앵무의 저주 적발되어
당장 잡혀가니
그 눈빛 퍼런 앵무
밤새도록 신을 청해도
목쉬어본 적 없는 앵무
키 작으나
생글생글 웃으면
대장부 간담 녹는 앵무
그 앵무 멍석에 말려
멍석말이로 맞아죽고
죽은 뒤에도
작신작신 밟혀서
몇번 죽었다
그 앵무의 한마디면
나라일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뀌었는데
청나라 비단 걸치고
민중전 머리 위에 앉아 있던
그 앵무
무덤도 없는 앵무
(‘앵무’, 8권)
당시 이 ‘굿 소동’―“상에 올릴 음식이 반입되지 않아 굿 자체를 취소했다”는 주최측의 입장도 보도되었으나―으로 인해 새누리당의 주요 지지기반인 개신교 보수교단들이 강하게 반발했었는데, 한국교회언론회가 발표했던 성명서를 보면 그 역시 불합리한 내용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 이 단체는 앞의 시에 나타난 명성황후의 예를 들어 굿을 비판하는데 그 도가 지나쳐 “국모가 굿판에 빠지니 < … > 서민들도 굿에 미쳐, 온통 나라가 굿판이 되어 몰락한 것 아닌가?”라는 과장된 해석을 가하고, 무속신앙의 “몽매(蒙昧)”함과 기독교의 “고등”성을 대조해 전자를 비하한다. 이 성명서의 불합리성은 그들이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로 시작됐다”고 강조하며 이를 당연시했다는 데 있다. 그들의 말대로, “1948년 5월 31일 오후2시 제헌국회 제1차 회의 개회사에서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감사기도로 국회를 시작했는데, 사실 국회는 개신교의 조찬기도회도 무속의 굿도 불교의 법회도 열릴 곳이 아니다. 우리가 구분해야 할 사항은 ‘굿’이 우리의 전통문화로서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이며(국내외의 많은 연구들을 보라), 무속도 오랜 역사를 가진 종교와 문화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교가 되었건―사이비 신흥종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국정을 이끄는 자를 좌지우지 한다면 백성이 들고 일어날 일이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사거리 일대에서 최순실 씨의 국정개입과 관련, 박근혜 대통령을 규탄하고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집회하는 가운데 집회 장소에 최순실 씨와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하는 그림이 걸려 있다. 사진/뉴시스
박정희 정부의 ‘코리아 게이트’와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게이트’
박정희 정부의 중앙정보부가 로비스트 박동선에게 자금을 제공해 미국의 정치인들을 매수하고 의회에 영향을 미치려 했던 사건인 코리아게이트(Koreagate)가 1976년에 터지자, 미 의회는 1977년 2월 3일 도널드 프레이저(Donald M. Fraser) 하원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일명 ’프레이저 위원회‘)로 하여금 진상 조사를 지시한다. 한미관계의 여러 측면들에 대한 상세하고 긴 조사 끝에 1978년 10월 31일 일명 프레이저 보고서로 불리는 결과보고서인 ’한국-미국 관계 조사(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가 발간된다.
이 조사 과정에서 1977년 6월 22일 프레이저 청문회가 열리는데, 청문회에는 박정희에게 버림받고 미국으로 망명해 박정희 정권의 각종 비리를 폭로하던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나서서 증언을 하였고 2년 뒤 파리에서 실종·살해되었다. 이후 프레이저 청문회에 등장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당시 미국에서 큰 세(勢)를 모으고 있던 통일교의 제2인자 박보희이다. 1965년에 미국으로 진출한 통일교는 1976년 9월 18일 워싱턴 D. C.의 모뉴먼트 광장에서 열린 종교집회에 30만 명의 청중이 모일 정도로 세력이 확장되어 미국 기득권 세력의 반감을 샀는데, 통일교와 중앙정보부 사이의 관계가 조사되면서 박보희가 1978년 3월 청문회에 증인으로 소환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질문에 유창한 영어로 역공을 가해 청문회의 스타가 된다.
박보희 전 세계일보 회장(85).육사 생도 2기이자 통일교의 옛 실력자. 사진/뉴시스
누가 뭐라 하든 불거진 대장부
누가 뭐라 하든
호랑이 얼굴로 보무당당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이었다가
교주 문선명과 만난 이래
통일교 제2인자로
70년대 북미대륙을 누볐다
맨해튼의 까마득한 고층건물도 사들였다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도리어 융단폭격으로 역공함으로써
프레이저가 탄식하기를
“오늘은 일생일대의 수모를 받았노라”
70년대 중반
한국 정부와 통일교가
미국 조야를 매수한 혐의의 코리아게이트
박보희가 탄식하기를
“미국은 한국이라는 고유명사를
더러움이라는 보통명사로 만들었다”
한국의 배짱으로
그는 벌떡 일어섰다
< … >
(‘박보희’, 12권)
권력의 숨은(혹은 암묵적으로 공공연한) 실세로서 나라의 국정을 농단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이 30일 돌연 귀국했다. 최순실 일행이 독일 등지에서 은신·도피하던 당시 통일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교단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인맥 차원에서의 지원이라고는 했으나 새삼 통일교를 다시 주목하게 되고 그간 이리저리 얽혀 온 여러 종교들과 정치 간의 관계들을 씁쓸히 돌아보게 된다.
종교연구가가 살해되는 사회
최태민(1912~1994)이 1970년대 초 불교·기독교·천도교를 혼합해 이른바 영세교 내지 영생교를 만들었다가 곧 간판을 내리고 1975년 4월 대한구국선교단을 설립해(이는 박정희의 지시였다는 증언이 최태민에게 목사 안수를 해 준 전기영 목사로부터 나와 얼마 전에 보도되었다), 이후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박근혜 대통령을 매개로 착복을 했다는 사실은 이제 전 국민이 알게 되었다. 그의 딸이 대를 이어 대통령의 조종자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그로 인해 나라가 오늘의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도 온 국민이 경악 속에 알게 되었다. 최태민의 영생교 덕분에 조희성의 영생교―1981년에 만들어져 납치·폭행·감금·살인·사기 등 갖가지 범죄로 유명한―까지 다시 거론된다. 이런 사이비종교와 신흥종교들을 연구하던 탁명환(1937-1994)은 개신교 교파들이 이단으로 규정한 한 교회의 광신도에 의해 살해되었다.
세상이 어지럽고 두려우면
여기저기 신이 나타난다
그래서
사이비종교
유사종교
신흥종교
이런 종교행위 속으로 사람들 모여들어
손뼉치고
외치고
집안 다 거덜난다
이런 종교놀이판
외로운 비판을 굽히지 않는 사람
탁명환
듬직한 것이 때로는 불안
당당한 것이 때로는 위기
때로는 협박
때로는 피해
때로는 납치까지 당하면서
그는 종교라는 이름의 수작
끝까지 밝혀내며 아슬아슬 살아왔다
< … >
어느 골목 하나 마음놓고 걸어갈 수 없어도
그의 의지는 차츰 거세어져
숨차
(‘탁명환’, 15권)
1973년 5월 <대전일보>에 최태민이 게재한 '집회광고'가 실렸는데 한 언론이 다시 보도한 그 내용을 보자면, "영세계 주인이신 조물주께서 보내신 칙사님“인 최태민이 “불교에서의 깨침과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시킨다 하오니 모두 참석하시와 칙사님의 조화를 직접 보시라”, “현대의학으로 해결치 못하여 고통을 당하고 계시는 난치병자와 모든 재난에서 고민하시는 분은 즉시 오시어 상의하시라”고 되어 있다. “칙사님의 임시 숙소”인 ”대전시 대사동 케이블카 200m 지점 감나무집“에 사이비종교 연구가 고 탁명환 선생이 연구를 위해 찾아갔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처럼 실체를 밝히기 위한 연구라면 모르되, 위정자들이 허수아비로 꼭두각시로 무대뒤 조종자의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