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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구는 '최순실'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고 기록될 것이다"
(르포)박 대통령 정치적 고향 대구·경북 민심탐방
최순실 쇼크에 피눈물…그래도 지지철회 않는 10%도 "멘붕"
"외롭다고 혹 할게 따로 있지, 나라가 망할라고 하는 거데이"
대통령·집권당 제 손으로 만들었다는 자기 결정·정치적 입장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현실에 대한 충격·허탈
2016-11-04 08:00:00 2017-03-20 18:15:41
[뉴스토마토 최병호기자] 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바닥을 모를 정도로 떨어졌다. 10월25일 한국리서치가 조사한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24.0%였지만 불과 일주일 뒤 리얼미터 조사 결과는 10.9%로 절반 넘게 줄었다. 10.9%는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낮은 수치다. 더 큰 충격은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콘크리트' 지지기반인 대구·경북마저 등을 돌렸다는 점이다. 10월31일 디오피니언 조사에서는 박 대통령에 대한 TK의 지지율이 8.8%에 그쳤다. 절대적인 지지층이 이탈한 원인은 무엇일까. 취재팀은 지난 2일부터 이틀간 대구 민심을 살폈다.(편집자)
 
주인이 자꾸만 채널을 돌렸다. 어떤 뉴스도 5분을 넘겨 보지 않았다. 하지만 TV에 시선을 둔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거 참, 하나만 봅시다'라거나 '정신 사납게 그만 좀 돌려'라고 흉이 나올 법했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밥그릇을 비우고 계산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TV는 그렇게 하염없이 화면이 바뀌었다. 소주를 들이붓고 붉게 달아오른 남자는 욕지거리를 했다. '등신 같은 X', '천치 팔푼이'라는 말이 쏟아졌다. 조그만 국밥집 네댓개 테이블에서는 화제가 딱 한사람에 대한 얘기로 모였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다.
 
잠깐 정신을 차리면 이 풍경은 적어도 '이곳'에서는 희한하다. 감히 누가 '박근혜' 이름 석 자에 '등신'이라는 표현을 붙일 것인가.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새누리당의 빨간색 플래카드가 온 시내에 나부끼던 동네다. 지방선거든 총선이든 새누리당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던 곳이다. 국회의원 시절 박 대통령의 지역구였던 달성군은 '대구의 뿌리'를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대구는 '최순실'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고 기록될 것이다.
 
동대구역에서 '최순실 게이트' 뉴스를 시청하는 시민들. 사진/뉴스토마토

"보수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새누리당처럼 보일까 봐 빨간색 옷도 안 입어" 
 
2일 서울에서 출발해 대구에 도착한 뒤 첫 목적지는 달성군으로 정했다. 달성군은 박근혜 대통령이 1998년부터 내리 4선을 지낸, 박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다.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에서 달성군까지 가는 길은 멀다. 택시를 타도 30분이 넘게 걸렸다. 평소라면 그 시간에 인터뷰 한편은 족히 나왔겠지만 이번에는 '박근혜' 이름을 꺼내는 게 여간 망설여지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낮아졌어도 대구는 대구일 텐데. 택시기사 조○○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미국에는 휘발유가 ℓ당 700원이라면서요. 한국은 기름값 때문에 장거리 모셔도 안 남아요. 달성까지 뭔 일이에요?"
 
기어코 박근혜 이야기로 화제가 붙자 조씨는 한숨부터 뱉었다. "아이고 최순실이 좋게 보는 사람 누가 있어요. 박근혜한테는 실망이 크죠. 남들은 '대구가 박근혜 지지세력이다' 하고 있는데, 그거는 옛날 이야기고. 이제 대구가 대구가 아니에요. 어디서 쪽팔려서 대구 사람이라고 말도 못해요. 특히 나이든 사람들이 실망 많이 했어요. 대구는 박근혜한테 뒤통수 맞은 거지 새누리당 찍다가 망한다, 망한다 했는데 진짜 이래 됐어요."
 
조씨는 수시로 '화딱지 난다'는 말을 썼다. "내 만해도요, 보수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이래 생각했는데 박근혜 하는 거 보니까네 말문이 막힙니다. 이게 최순실이는 아무것도 아닌 평민이잖아요. 비리는 사람이 욕심이 많으면 대통령도 모르게 할 수도 있지. 근데 급이 다르다 아닌교. 솔직한 말로 쌩무당인데, 나라가 무슨 구석기 시대도 아니고…."
 
박근혜와 최순실에 대한 이야기를 안 물어봤으면 어쨌을까 싶을 만큼 그는 내내 흥분했다. 달성군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만난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택배일을 하는 그는 작업할 때 일부러 유니폼도 안 입는다고 했다. 빨간색 작업복이 새누리당 유니폼처럼 보이기 때문이란다. "지금 대구에는 산업이 없어요. 대기업은 다 서울에 있고 대구 사람들은 돈만 전국 1등으로 쓰지 벌어오는 건 전국 꼴찌거든요. 지금 달성에 공단이 있기는 한데 대구 성서공단은 거의 죽었고 달성도 얼마 안 남았어요. 사실 새누리당 뽑은 게 뭐겠어요. 에이 박근혜는 별 뭣도 아니에요. 북한에 쎄게 나가나는 거, 대구 잘 살게 해달라는 건데. 지금 새누리당이 대구에서 한 게 없어요. 박근혜 둘러싸고 자기들끼리 싸움만 해댔지. 이번도 봐요. 최순실이 다 드러났는데 아직도 박근혜 감싸고 있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어르신들의 실망이 크다던 택시기사 조씨의 말처럼 줄곧 박정희-박근혜 모녀를 지지했을 어르신들의 분노는 더 노골적이다. 달성공원 벤치에 앉아 소일거리를 하던 할아버지들은 최순실 게이트 이야기가 나오자 느릿하던 말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세상천지에 남창(男娼)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도록 하는 게 뭔 대통령이냐", "대통령이 하도 외로우니까 마음이 혹 한 거지라고 할라케도 입 딱 닫아 잠그고 나라의 근본을 흔든 꼴에 화가 나는기라", "외롭다고 혹 할게 따로 있지, 나라가 망할라고 하는 거데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대구 민심 이탈은 박 대통령의 무능과 실정 그 자체보다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충격의 여파로 보였다. 민심의 비난이 박 대통령보다 최순실 게이트와 엮여 더 증폭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집권 여당으로써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는 새누리당에 대한 분노까지 치밀었다. '새누리당만 찍는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지만 돌아온 것은 '국정농단' 밖에 없다는 사실, 박근혜 대통령과 집권 여당을 제 손으로 만들었다는 자기 결정과 정치적 입장이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충격과 허탈은 생각보다 커 보였다.
 
대구 시내 어디에서든 '최순실 게이트'가 화제에 올랐다. 사진/뉴스토마토
 
"무당한테 나라 맡긴 게 죄냐? 북한한테 나라 맡긴 게 죄냐"
 
유시민 전 장관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절대적 지지층을 두고 '나라를 팔아먹어도 지지할~" 이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박 대통령에 대한 '대구·경북의 지지율 8.8%'를 이에 빗대면 최순실 게이트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을 지지할 사람들이 8.8%나 된다는 말일테다. 취재팀이 대구에서 만난 대다수는 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접은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더 완강하게 박 대통령을 추종하는 소수도 분명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라는 자부심 때문일까. 박 대통령의 옛 지역구인 달성군에서는 여전히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최순실 게이트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을 지지했다. 8.8%의 흥미로운 점은 최순실로 인한 충격과 허탈을 극복하기 위해 박 대통령의 행적을 정당화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달성군을 한 바퀴를 돌기 위해 택시를 타 만난 김□□씨는 최순실 게이트를 일컫어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으로 촉발된 문재인 이슈를 덮기 위한 좌파 언론의 공작'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 양반, 최순실이가 잘했다는 게 아니에요. 친하다고 나라를 맡긴 거 잘못한 거 맞어요. 근데 무당한테 한거하고 지금 노무현이하고 문재인이가 북한한테 물어보고 한거하고 뭐가 더 문제냐구요. 문재인이는 반역질입니다. 이거 JTBC하고 언론이 문재인 덮을라고 박근혜 죽이는 겁니다. 조중동도 다 없애야 돼요."
 
8.8%의 또다른 흥미로운 점은 이른바 '신 보수'라 불릴 젊은층의 반응이다. 어르신들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실망으로 분노하는 것과 달리 20~30대 젊은층은 오히려 박 대통령을 옹호하는 역설적인 현상이다. 경북대 인근 칠성시장 포장마차에서 만난 일행들은 "지금 종편이고 뭐고 그동안 보수라고 했던 놈들이 간첩이야, 대통령 저리 되니까 내년에는 야당이 유리할 거라고 보고 줄 타는기제", "대통령이 사이비를 믿든 개인 사생활이지 그게 뭐 대단한 사건이라고 언론에서 따라다니고 말이야", "명색이 국정농단이라고 할라면 박근혜 대통령이 한 걸 다 까봐야지, 북한에 그렇게 당당하게 하고 개성공단 그거 김대중이하고 노무현이가 돈 갖다드리고 이명박도 손 못 댄걸 박근혜가 한 거잖아, 그런 거 왜 안 보냐는 거지. 이런 것도 최순실이가 시킨거라고 할라냐"라고 주장했다.
 
대구 최대 재래시장인 서문시장. 사진/뉴스토마토

"대안 없는 하야·탄핵은 안 돼…새누리당 기대 안 해"
 
서울로 돌아오는 KTX를 타려고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길에서 다시 민심의 잣대인 택시기사를 만났다. 택시를 모는 정○○씨 역시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했다. 그러나 하야나 탄핵에는 주저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잘 못했죠. 근데 또 생각하면 반역했거나 나라를 망하게 한 게 아니잖아요. 하야나 탄핵하고 나면 어떻게 되죠. 또 혼란만 오는 거에요. 여당이나 야당이나 싸움만 할 테고. 그럼 또 국민만 죽어나는 거죠. 새누리당이요? 걔들이 민심을 살폈으면 이렇게 대통령을 보좌했겠어요. 기대 안 하죠. 똑같은 놈들인기라요."
 
정씨는 라디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택시를 타고 가는 20분 남짓 동안 아마 이 시간대 송출되는 모든 라디오 채널은 다 들었으리라. 하도 정신이 사나웠던 걸까. 어제 저녁을 먹으며 봤던 풍경과 묘하게 겹쳐졌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이야기를 종일 쏟아내는 언론을 보며,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이 사람들은 아마 자기 마음을 대변해줄 그 무엇인가를 찾고 싶었던 것일 테다. 하지만 지금 충격과 허탈, 분노, 무안, 민망 그리고 음모론과 정당화에 이르기까지 대구 민심은 그 누구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있었다. 민심은 단순한 '지지 철회', '계속 지지'라고 양분할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어서다. 다만 요약할 수 있다면, 대구는 지금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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