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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40화)“이를 부드득 갈 누구 하나 남겨두지 않았다”
조선인 대학살의 풍경, 간도와 관동
2016-11-07 06:00:00 2016-11-07 17:25:50
지난주 11월 2일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서울 광화문 광장에 박정희 동상 건립을 추진하겠다고 선포해 파문을 일으켰다. 현 시국도 시국이려니와, 독재정치로 인해 역사적 평가가 분분한 인물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옆에 놓으려는 발상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제 정신이냐’라는 반응을 보였고 서울시는 불허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지난 9월에는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장영실 동상 이전(2월 26일)과 박정희 동상 설치(3월 10일)로 인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제, 거꾸로 돌아가는 듯했던 한국사회의 시계를 바로 돌리려는 국민들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우상화’와 역사 속 ‘진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별로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 투입된 예산이 1873억 원이라고 한다. 이미 박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에 세워진 5미터 높이의 동상을 비롯해 청도, 포항 그리고 철원의 군탄공원('박정희 장군 전역공원')에도 동상이 만들어져 있는 상황인데 이에 더해지는 기념사업의 내용을 보면,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시절 하룻밤 묵어간 울릉도 군수 관사가 ‘1박 기념관’으로 탄생하느라 12억 원이 들었고, 그가 교사시절 살았던 문경의 하숙집을 기념해 사당과 기념관을 짓느라 17억 원이 소비되었다. 매년 하던 ‘탄신제’는 내년 100주년을 맞아 5억 원을 책정했다는 소식이다. 한편,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우정사업본부가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의 제작을 결정해 또 논란이 있었다. 현행 법령상 ‘정치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소재'에 대한 기념우표 발행을 금한다고 되어 있어 법규 위반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우상화‘ 작업 논란 속에 최근 다시 언급되어 비판을 산 것이 그의 광복군 참여 문제이다. 국방부 산하 국립서울현충원이 10월 24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37추기 추모식 행사를 알리는 보도자료에 '광복군 활동' 약력을 명시했다는 것인데, 그가 광복군에 들어간 시점은 만주군 중위로 있다가 해방을 맞이한 이후라는 것, 해방 후 한국광복군이 10만 군대 모집을 할 때였으니 독립운동과는 무관하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가끔 제기되던 ’비밀광복군‘ 운운의 진원은 1967년 박영만이 쓴 『광복군』이라는 책이라는데, 황군장교 출신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던 박정희는 왜곡된 내용에 오히려 화를 냈다고 한다. 그가 1939년 일제의 괴뢰국이던 만주국의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지원했다가 나이 초과로 떨어지자 천황과 일본에 죽음으로써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와 편지를 보내(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자) 결국 입학했다는 것,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편입해 졸업하고 1944년 4월부터 해방 때까지 관동군과 만주군에서 근무했다는 것 역시 알만한 국민들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역사를 기술하는 역사가의 주관이 은연중에 혹은 공공연하게 반영되지 않은 역사기록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할 때, 경험한 사실이나 입증되는 사실들에 대해 논할 수는 있지만 엄밀히 말해 ‘역사적’ 사실을 논하기는 어렵다. 하물며 ‘진실’ 앞에야 어찌 ‘역사적’을 붙일 수 있으랴. 역사 속의 ‘진실’을 아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2005년 12월 1일, 한국 근·현대사 속 국가폭력과 관련된 수많은 은폐된 진실들을 밝히고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족되었고 2010년 6월 30일까지 총 11,172건의 조사활동을 마친 후 보고서를 제출하고 12월 31일 해산되었다. 위원회가 행한 ‘진실규명’의 성과는 큰 것이었지만 물론 진실이 다 규명된 것은 아니다. 우리 국민은 사실과 진실을 얼마만큼 알 수 있을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야기한 작금의 혼란 속에서 이 질문을 던지며 ‘박정희 우상화’를 다시 생각한다. 그의 황군(皇軍)으로서의 친일행적과 해방 후 광복군으로의 변신에 대해서는 사실이 입증될 때까지 논란이 있어왔지만, 일제강점기 간도와 관동지방에서 벌어진 조선인 대학살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긴 세월 동안 진실규명을 위한 정부 차원에서의 노력은 없었다.
 
1920년 간도대학살 혹은 경신참변 
망명지 만주땅 황야에서도
조선사람 마을에는
학교가 세워졌다
자식 가르치는 것
조선사람의 삶이었다
토방집 짓고
밭옥수수
밭보리 심었다
 
통나무 우물 정자로 올린 뒤
지붕은 돌이끼로 따뜻하게 덮는다
 
밭보리보다 밭메밀 농사 잘되었다
미친년 널뛰듯
마구 뿌려도
모진 목숨이라 잘 자란다
 
< … >
 
학교에서
교가 부른다
신흥강습소 김창환 교관 구령소리
쩌렁쩌렁
앞산에 메아리쳤다
 
조선어
조선 역사
조선 지리
습자
작문
창가
산수 구구단을 배웠다
그런 마을 다 불질렀다
다 죽였다
다 뒤져갔다
이를 부드득 갈 누구 하나 남겨두지 않았다
(‘1920년 경신참변’, 17권)
 
제1차 훈춘사건
경신년 9월 12일
일본군은
만주 마적 두목 진동과 만순을 매수
훈춘 일본영사관 습격을 지령했다
진동은
중국인만 죽였다
 
실망한 일본군은
마적 장강호를 매수
10월 2일 습격을 지령했다
 
일본인 영사관 직원 죽였다
영사관 직원 가족을 죽였다
 
이것으로 조선독립군의 만행이라 퍼뜨렸다
 
그리하여 이를 진압해야 한다는 구실 내세워
중국에 통고
일본군 나남사단 아베부대가 들어가고
연해주 파견 일본군 들어왔다
10월 15일 용정 침략
국자가
두도구
< … >
 
10월 21일 훈춘 침략
대학살
여기도
학살
저기도
학살
 
그 시체더미 가운데 살아남은 현신만이
 
얼빠져
반벙어리 되고 말았다
말 몇마디 입을 들썩
개똥 먹었다 말똥 주워먹었다
 
홍범도 장수가 그 신만이를 받아들였다
받아들여
취사반에서 밥 실컷 먹게 했다
(‘북간도 한곳’, 20권)
 
일제는 1920년 5월 ‘중일합동수색대’를 편성하고 4개월에 걸쳐 독립군과 항일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는데, 한국의 독립운동에 우호적인 중국 관리들과 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인해 북간도에서는 그다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1920년 6월 6일과 7일 홍범도 장군이 이끈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은 정규군 대부대를 간도에 투입해 독립군을 초토화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일본군의 만주 출병을 정당화할 사건을 조작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는데 이것이 1920년 8월까지 완료한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이다. 그리하여 앞의 시에서와 같이 ‘훈춘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 두목 창장하오(長江好) 일당 400여 명은 10월 2일 훈춘을 공격해 중국인 70여 명, 조선인 7명, 일본인 수 명을 살해하고 영사관원들이 이미 탈출해 비어 있던 일본영사관에 불을 질렀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미리 대기 중이던 대규모의 병력을 즉시 간도에 투입해 만주를 침범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곳곳에서 벌어진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독립군에 의해 대패한 일본은 보복을 위해 독립군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을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1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학살당하고 2,500호의 민가와 30여 개의 학교가 불에 탔다고 하는데, 정확한 희생자의 수, 그 진실을 어찌 알 수 있으랴. 독립군과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탄압과 학살이 수개월간 지속되었으니 그보다 많은 수가 희생되었을 것이라는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1923년 관동(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923년 9월 1일
토오꾜오 요꼬하마 일대 대지진
칸또오대지진
 
< … >
 
하루아침에
시체더미의 거리였다 폐허였다
 
일본 정부 간 졸이며
지난날 쌀 폭동의 악몽을 떠올렸다
이 대지진으로
다시 폭동이 일어날 것 막으려고
일본 농민
일본 서민들 공포에 떨도록
조선인 학살을 감행했다
조선놈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조선놈들이 일본인 죽인다 일본집 불지른다
헛소문 내어
단검
죽창
일본도
망치
몽둥이로
닥치는 대로 조선인을 죽였다
찔러죽이고 때려죽이고
베어죽이고 쳐죽였다
그것으로 모자라
조선인 보호한다고
군대 병영으로 불러들여
8백여명을 대번에 쏴죽이는 집단학살도 마지않았다
 
바로 이때의 학살조직을
이끌었던 자가
조선인 박춘금
상애회(相愛會)를 만들어
조선인 공장노동자
막노동자를 착취하던 박춘금
그가
칸또오대지진 조선인 학살한 공로로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이 되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조선에서는
일본 지진 피해를 위로하여
쌀 2백만 가마니를 걷어 보냈다
걷어 보내고
긴긴 겨울 굶어
부황 났다
 
< … >
(‘박춘금’, 28권)
 
1923년 9월1일 일본 관동지역 지진이 일어난 후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풀고,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일본 자경단과 군경에 의해 6000여명의 한인이 영문도 모른 채 무참히 살해됐다. 사진/뉴시스
 
1923년 9월 1일 일본은 진도 7.9의 지진이 도쿄, 요꼬하마 등 관동지방에서 일어나 사망·실종자가 40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무리한 해외파병으로 인해 군량미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전국적으로 쌀 파동이 일어났던 일본은, 지진 후 자국민의 분노가 반정부 움직임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조선인 증오로 돌린다.
 
9월 1일 오후 일본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와 경찰 그리고 재향군인회·마을청년단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자경단이 광란의 조선인 살인극을 벌이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 학살당한 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1910~1918)으로 인해 토지를 잃고 식량수탈에 시달리다가 일본으로 막노동을 하러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재일조선인들은 닥치는 대로 죽임을 당했고 수용소에 끌려갔던 이들도 군인들이 자경단과 근처 주민들에게 넘겨주며 살해를 지시해 학살당했다. 일본 학계와 일본변호사연합회는 진상조사를 통해 1923년 조선인 학살이 일본 정부가 관여한 ‘국가범죄’이고 민족적 집단학살(ethnic genocide)임을 밝힌 반면, 한국 정부는 지난 93년 동안 일본 정부에 어떠한 요구도, 아무런 규명작업도 하지 않았다. 1923년 당시 상해독립신문 사장 김승학 선생이 동경에 잠입해 유학생들과 함께 11월 말까지 조사 작업을 한 후 희생자 수를 6661명이라고 밝혔고, 몇 년 전에는 한 연구자가 인용한 독일외무부 자료―1923년 당시 한 조선인 항일운동가가 독일외무부에 보낸 사료라 한다―를 통해 희생자가 2만여 명이 넘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관동대지진시 자행된 조선인 학살을 보여주는 일본 사회주의 계열에서 발행한 잡지 '씨뿌리기 잡기種蒔き雜記'제1책 1924년 1월호에 게재된 '학살된 한국인의 시체더미'다.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시에 나오는 박춘금(1891-1973)은 일본에 건너가 폭력적으로 조선인 사회를 장악하고 온갖 친일행위를 했던 인물이다. 그는 1923년 조선인 대학살 당시 상애회원 1000여 명을 이끌고 일본 당국의 수습작업에 적극적으로 공조한 덕분에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승승장구하게 된다. 상애회가 한 일이란 조선인 직업 소개, 각 사업장 조선인 노동자들의 관리, 조선인 노동자들의 조직이나 노조 파괴, 부녀자 인신매매 등 조직적 폭력행위였으며 1920년대 국내의 소작쟁의에도 폭력적으로 개입하였다. 온갖 폭력행위와 친일행적으로 일본 제국의회의 중의원까지 한 박춘금은 해방 이후에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와해로 인해 역사적 심판을 받지 않은 채 재일 한인사회의 유지로 살다가 죽은 후 고향 밀양에 돌아와 묻히니, 1992년 ‘일한문화협회’가 세운 그의 송덕비가 2002년 밀양지역 시민단체들에 의해 제거되고 이후 밀양 동부순환도로 공사로 인해 무덤이 이전된 것이 그나마 소소한 역사적 심판인 듯싶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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