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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 세상읽기)23.5도와 조류독감
2016-12-26 06:00:00 2017-01-08 11:46:51
23.5도. 행복과 불행이 모두 여기에서 시작했다. 지구는 일 년에 한 번 태양 주변을 공전한다. 태양에서 1억5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져서 큰 타원을 그리면서 도는 동안에도 지구는 쉬지 않고 팽이처럼 빙빙 돈다. 그런데 꼿꼿한 자세로 태양과 마주보며 도는 게 아니라 23.5도 기울어진 채로 돈다. 지구 자전축이 태양 공전궤도면과 23.5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자전축이 태양 쪽으로 기울어지면 북반구에 햇빛이 많이 비치는데 이때 우리나라는 여름이다. 반대로 자전축이 태양 반대쪽으로 기울어지면 햇빛은 남반구에 더 많이 비쳐 우리나라는 겨울이다. 자전축이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더운 곳은 항상 덥고 추운 곳은 항상 추울 것이다. 생명들은 장소에 맞추어서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살면 된다.
 
그런데 자전축이 기울어져 있다. 그것도 하필 23.5도. 그래서 중위도 지방에 있는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제법 뚜렷하다. 그러다보니 계절에 따라 이런저런 생명들이 찾아온다. 100년 전만 해도 호랑이, 반달가슴곰, 여우가 한반도를 넘나들었다. 여름에 백령도에서 볼 수 있는 점박이물범은 겨울에는 중국 보하이 랴오둥 만의 유빙 위에서 새끼를 낳아 기르던 친구들이다. 물론 동물들이 한반도를 찾아오는 이유는 우리를 보려는 게 아니라 먹이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계절에 맞춰서 우리나라를 찾는 동물의 대부분은 새다.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조류는 대략 1만 종. 이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종을 포함해서 600종 이상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텃새는 70여 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철새다. 철새에는 여름 철새와 겨울 철새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나라를 거쳐 가는 나그네새와 길을 잃고 찾아온 새도 있다. 개체 수가 가장 많은 것은 겨울 철새다. 주로 중국 북부와 시베리아에서 찾아온다.
 
겨울 철새는 동요에도 등장할 만큼 우리가 반기던 친구들이다. 그런데 조류독감(AI)이 돌기 시작하면서 분위가 바뀌고 있다. 철새에게 먹이를 주거나 철새 도래지를 보호하자고 말하기도 부담스러울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AI가 2003년부터 불과 몇 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발생하고 있다. 조류독감은 겨울 철새가 우리나라에 있을 때만 발생한다. 덕분에 겨울 철새들이 AI의 근원지로 의심받고 있다.
 
올해 AI는 그 어느 해보다 빠른 속도로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 불과 34일 사이에 2천만 마리를 살처분했다. 일상적으로 남한에서 키우는 가금류가 1억 5천만 마리인 것을 감안하면 벌써 13퍼센트가 넘은 것이다. AI에 걸린 닭이나 오리가 발견되면 반경 3킬로미터 안에서 키우는 메추리, 닭, 오리는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서 파묻어야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죽여야 할지 모른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AI의 책임을 철새에게 지우려고 한다. 철새가 AI를 옮긴다는 전문가의 주장을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철새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겨울에 한반도로 철새가 단 한 마리도 오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나라에 AI 창궐하지 않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철새들이 AI를 옮긴다면 가금류뿐만 아니라 야생 철새들도 AI에 감염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수만, 수십만 마리의 다양한 종류의 철새들이 엉켜 사는 갯벌에서 AI에 감염되어 죽은 철새 시체는 얼마나 될까? 철새들 가운데는 당연히 한반도에서 생을 마감하는 개체들이 많다. 연구에 따르면 10~20퍼센트에 이른다. 그런데 AI가 창궐할 때도 이 가운데 AI에 감염되어 죽는 비율은 0.001퍼센트도 안 된다. 철새들은 AI에 걸린다고 해서 다 죽는 게 아니다. 사람이 독감에 걸렸다고 해서 다 죽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AI에 감염된 개체의 상태가 중요하다. AI는 건강하지 못한 환경에 살고 있는 개체에게만 치명적이다.
 
거의 해마다 겪는 AI 사태의 책임을 겨울 철새에게만 미룬다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해결책밖에 없다. 겨울 철새들이 먹잇감을 얻을 수 있는 갯벌을 모두 없애든지 23.5도 기울어져 있는 지구 자전축을 똑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면 철새 타령은 그만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 생산 효율을 높이기 위해 다양성을 포기하고 표준화된 닭과 오리를 좁은 공간에서 빽빽하게 키우는 공장식 축산 구조를 바꿔야 한다. 우리는 잡아먹어도 미안할 판에 먹지도 않고 파묻는 닭과 오리에 대해 일말의 미안한 감정을 가져야 한다.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 23.5도가 바뀌지 않는 한 철새는 내년에도 온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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