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51화)‘쑥대머리’ 민중과 함께 한 소리꾼 임방울
“이내 가삼 사무치는 신명 / 어이할 길 없으매”
입력 : 2017-01-22 14:06:01 수정 : 2017-01-22 14:47:27
연일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중간지시자인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체부장관이 구속되었고 이제 상급지시자로 확실시되는 박근혜 대통령직무정지자에 대한 탄핵심판청구 인용만이 남았다.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와 ‘세월호 시국선언’, 문재인ㆍ박원순 후보 지지선언에 관련된 문화예술인들을 다 포함시키다보니 블랙리스트 명단에 있는 9,473명 중 적지 않은 수가 2~3개 조항에 중복되어 있다. 서명만 하면 너무나 쉽게 블랙리스트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21세기의 대한민국, 그 국민들은 요즘 들어 종종 일제강점기를 떠올리게 된다.
 
국창 임방울(1904/1905~1961)을 기억하다
1993년에 개봉된 영화 <서편제>는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켜 무관심의 대상이던 판소리가―비록 항시적으로 지속되지는 못했으나―한동안 다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영화를 계기로 어린이들이나 젊은이들이 판소리를 배우고 국악에 관심을 가지는 게 유행이 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강산이 한번 훌쩍 바뀌고도 남을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른 뒤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울광장 노제에 모인 수십만의 인파는 안숙선 명창의 추모창 <추억>을 들었다. 이 노래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 ‘국창’,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바꾸자면 ‘국민소리꾼’이라 불릴 임방울 명창이다. 광주를 방문하는 이는 송정역에서 ‘국창 임방울 선생 전시관’을 만날 수 있고, 길을 달리다가 ‘임방울대로’에 들어설 수도 있다.
 
열네살의 임방울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곳
춘향가의 박재현 (박재실의 오기)
거기서
춘향가 홍보가를 익힌 뒤
거기 떠
유성준 찾아가
수궁가 적벽가를 익혔다
 
목구멍 찢어지는 갈성(渴聲)을 크게 터득
 
송만갑의 추천으로
그의 서편제 무대가 베풀어졌다
노래야 서편제이지 서편제이구말구
 
그 시절 일제시절
쑥대머리 유성기판 1백만장 썰물로 팔려나갔다
그러나 그를 가르친 스승들
제자 임방울의 이름이 하도나 커버려
어디서 사는지 죽었는지 모르게 묻혀버려
 
스승이란 석가나 공자가 아닐 것
스승이란 제자의 뒤에서 봄눈처럼 녹아 사라지는 것
< … >
(‘스승들’, 14권)
 
국창 임방울 선생은 현재 광주광역시가 된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 도산리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으나 그 출생연도부터 1904년과 1905년으로 의견이 갈라져 불분명한 것처럼, 그를 둘러싼 여러 일화들도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어 ‘믿거나 말거나’ 식의 설화들로 회자되기도 한다. 그의 본명은 임승근으로, 예명인 ‘임방울’의 기원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를테면, 어릴 때 울지 않고 방울방울 잘 놀아서 방울이라거나, 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크라고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거나, 임방울의 판소리를 들은 당대의 명창이 은방울 같다고 탄복해 그리 불린다거나 등등이다. 그에 대해 쓴 연구자들이나 문인들의 기록들 역시 여기저기 상이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 정보가 정확하지 않다.
 
임방울이 <조선일보> 1956년 5월 28일자의 <생활백상>이라는 란에 “나와 창극”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 역시 약간의 오류가 지적되지만―을 토대로, 이런저런 증언과 논리적 정합에 맞추어 합의에 이른 정보는 다음과 같다. 임방울은 국창으로 불리던 서편제의 김창환 명창이 외숙이라 그의 영향을 받았고, 앞의 시에 언급되듯이 박재실(고은 시인은 박재현으로 잘못 기록된 자료들을 참조한 듯하다) 명창 문하에서 춘향가와 흥보가를 배우고 동편제의 유성준 명창으로부터 적벽가와 수궁가를 사사했다. 여러 스승들로부터 사사했으나 임방울은 다른 한편 치열한 독공을 통해 천구성(타고난 좋은 소리, 상대적으로 맑음)과 수리성(목이 쉰 듯한 탁한 소리, 절차탁마로 얻음)의 적절한 조화, 고음과 저음을 자유롭게 오가는 자신만의 소리를 완성해 판소리계의 독보적인 존재가 된다.
 
1929년 9월 12일부터 개최된 ‘조선박람회’를 위해 응원대의 일원으로 송정리에서 상경한 임방울은,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조선명창연주회'에 25세의 나이로(한국 나이인지, 만 나이인지는 확실치 않다) 당대의 쟁쟁한 명창들―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등―과 함께 공연을 하는데, 바로 이때 부른 <쑥대머리>로 인해 소리꾼 인생의 개화기를 맞게 된다. 그는 ‘조선명창연주회’ 당시 경성방송국에도 출연하였고, 11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콜럼비아(Columbia) 레코드사에서 녹음을 해 이듬해 1월, 3월, 7월에 음반들이 발매된다. 일약 스타가 된 임방울의 대중적 인기는 대단한 것이어서 그의 노래는 조선 땅 뿐만 아니라 일본, 만주에까지 퍼져나갔고 유성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대에 엄청난 음반판매량을 기록하였다. 그의 노래, 특히 <쑥대머리>가 경이로운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임방울 명창의 소리가 가진 매력 덕분으로, 그만이 갖는 특유의 애잔한 떨림과 곰삭은 소리에 깃든 슬픔, 즉 절절한 ‘애원성(哀怨聲)’으로 나라를 잃은 조선 민족의 정서를 대변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광주시립국극단의 국창 임방울 선생 서거 50주년을 추모공연. 창작창극 '임방울의 쑥대머리'. 사진/뉴시스
 
설화의 탄생
<쑥대머리>는 옥에 갇힌 춘향이가 목에 칼을 쓰고 머리칼은 마구 헝클어진 채 귀신같은 모습으로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탄식하는 노래이다. 그리하여 그 시작이 “쑥대머리 구신형용 적막옥방으(의) 찬 자리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이다.
 
춘향가 옥중가의 한 대목인즉
쑥대머리 귀신 형용 찬방 옥방의 찬 자리에……
 
여기 임방울 으뜸의 더늠 있으매
그가 크게 떨치며 쏟아져 나오는 육자배기는
또한 그가 쓰러지기까지 따라붙어 쏟아져 나오는 소릿속이매
좋구나
 
어린 시절
하늘의 뜬구름 부럽기만 하고
이내 가삼 사무치는 신명
어이할 길 없으매
 
감발하고 팔도강산 떠돌았다
 
그의 천구성의 상성 하성 울리려고
그의 수리성 곰삭는 소리 울리려고
어둔 까대기 소리공부로
팔도강산 떠도는 소리로
가는 데마다 홀린 고무신짝 널리고 미친 방석 날았다
 
마지막 무대 김제땅에서
이 소리 건너뛰어
저 소리 건너뛰더니
눈빛 풀어져 쓰러진 뒤
 
명창 있거든 반드시 귀명창 있나니
 
오늘이라고 어찌 임방울이 죽고 없다 하겠는가
< … >
(‘임방울’, 6권)
 
일제강점기 이후 판소리에서 계면조(슬픈 가락)가 우세해진 것도 옥에 갇힌 춘향이 심정을 공감하는, ‘쑥대머리’가 된 가슴을 부여잡고 살아야 했던 식민지 민중의 현실 때문이리라. 그러한 민중의 마음을 보듬어준 또 하나의 노래가 임방울 명창의 ‘추억’인데, 설화처럼 전해오는 그 배경 이야기는 이러하다. 서울에서 명성을 얻은 임방울이 광주로 금의환향하자 광주의 기관장들과 유지들이 일류 요리점인 송학원에서 그를 위한 환영파티를 열었는데, 거기에서 요리점 주인인 김산호주(예명)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그 여인은 임방울이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해 광주의 부잣집에서 고용살이를 할 때 그 집의 딸이었다고도 한다. 둘이 서로 좋아했으나 소녀 부모의 반대로 헤어지고 소녀는 시집을 갔는데, 결혼생활에 실패한 후 요릿집을 차렸다가 임방울과 재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임방울의 집안이 가난해 그가 어린 시절 탈곡기 돌리는 사람 밑에서 일을 했다는 얘기도 있고 보면 아주 없을 법한 줄거리는 아니나, 그렇다고 사실이라 입증할 근거도 없다 보니, 워낙 인기 있던 당대의 대스타에게 대중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 윤색한 러브스토리를 만들어 낸 것 같기도 하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상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임방울은 김산호주와 사랑에 빠져 송학원 내실에서 2년을 보내다가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고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산호주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지리산으로 떠난 그는 토굴에 숨어 살며 소리공부에만 매진한다.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 산호주가 시름시름 앓다가 간신히 임방울의 행방을 알아내 지리산 토굴로 찾아가지만 그는 만나주지 않는다. 좌절한 산호주는 임방울을 그리워하며 병이 깊어져 임종을 앞두게 되고, 주위 사람들이 이를 딱하게 여겨 임방울에게 그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니, 한걸음에 달려온 그가 죽어가는 산호주를 안고 슬퍼하며 지어 부른 노래가 <추억>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과장된 설화라 할지라도 대중들은 그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명창에게 아름다운 ‘전설’을 부여하고 그의 애절한 소리를 통해 비장미를 함께 나누며 곤곤한 현실을 이겨냈으니 참으로 큰 삶의 힘이 아니겠는가.
 
<추억>은 1932년 10월 콜럼비아에서 첫 음반이 발매되었는데, 한 연구자에 의하면, 1934년 1월 시에론(Chieron)에서 나온 <사망처(思亡妻)>도 <추억>의 다른 이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최동현, “임방울의 생애 연구”, <한국언어문학> 제49집, 14쪽. 그는 <사망친난 단가>라는 노래의 가사가 <추억>의 가사와 부분적으로 유사함도 지적하고 있다). 1934년 2월에는 오케(Okeh)에서 <추억>으로 음반이 발매되었고, 1940년 9월에 다시 나온 오케의 <추억>에는 ‘망처를 생각함’이라는 부제가 괄호 안에 넣어졌다. 어쨌든 여러 음반회사에서 여러 번에 걸쳐 나올 만큼 인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 혼(魂)은 어디로 행(向)하신가 /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럇던가”로 시작되는 이 노래에 마음을 실어 보내야 했던 일제강점기의 민중들. 문화계 블랙리스트나 역사적으로 계승된 위정자ㆍ권력자 집단을 보건대,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정치현실이 그 당시로부터 그다지 발전한 것 같지는 않다.
 
장터의 소리꾼과 오늘 광장의 가수들
임방울 명창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창’, 나라가 인정해 주었기에 국창이 된 게 아니라 진정한 ‘국민소리꾼’으로서의 국창이 된 것은, 그가 극장 안의 관객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의 서민들 즉 민중과 함께 호흡한 소리꾼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시골 장터나 강변 모래사장에서도 공연을 했고, 폐쇄된 녹음실에서 녹음을 하는 것보다 대중과 직접 소통하며 소리하기를 즐겼다. 그와 함께 공연했던 예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가설극장이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는 거지들도 많았다고 한다. 임방울 선생은 거지의 옷이 더러우면 옷을 사서 입히고 밥을 먹이고 여비를 주어 보냈기에 돈을 못 벌었던 그러나 마음이 따뜻했던 사람이라는 후배 명창의 증언은 그의 장례식에서 여실히 입증되었다.
 
1959년 말이나 1960년 초 겨울로 추정되는 일본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임방울은 일본 공연 시 조총련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는데 이틀 후 석방되었을 때 몸 상태가 몹시 안 좋아 고문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었다. 1960년 가을, 쇠약한 몸으로 늘 그렇듯 흰 두루마기를 입고 김제에서 공연을 하던 그는 수궁가를 부르다가 갑자기 다른 판소리 대목으로 넘어가더니 결국 무대에서 쓰러지고 만다. 1961년 3월 12일 그의 5일장이 치러진다. 국립국악원은 임방울의 장례식장 사용을 거절했지만, 그의 장례는 최초의 국악예술인장으로 치러졌다. 상여행렬에는 김소희, 박귀희 같은 200여 명의 여류 명창들이 소복을 입고 상여소리를 하였고 행렬 끝에는 100여 명의 걸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따랐는데, 임방울은 공연 때마다 거지들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장례행렬이 공동묘지에 도착할 때까지 전철도 운행을 중단했다고 하니 그 추모의 물결을 짐작할 만하다.
 
집안이 가난하여 글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임방울은 대가들의 옛 소리제를 제대로 습득하지 않고 자신에 맞게 바꾸거나 때로는 엉성하게 넘어가는 대목이 있어 비판을 받기도 했다지만, 그의 위대성은 그가 피나는 독공으로, 스승을 따라하는 소리가 아닌 자신만의 독창적인 소리세계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항상 거리에서, 장터에서, 가장 평범한 이들 그러나 역사의 주인인 이들과 함께 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종종, 조선 말기 벼슬을 받을 수 있었던 선배 명창들과 무형문화재로 국가의 지원을 받는 후배 명창들의 사이에 낀, 불운한 시대의 ‘진정한 광대’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 땅의 마지막 판소리 중흥을 이끌었던 인물로 칭송받는다. 그런데 그가 진정한 광대, 진정한 예술가로 역사에 남은 것은 ‘쑥대머리’ 같이 헝클어지고 지친 민중들의 가슴과 함께 울었고 그들의 상처를 소리로 마음으로 안았기 때문이다.
 
서울 태평로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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