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55화)‘군 의문사’로 떠난 아들들
“자살이 아니야”
입력 : 2017-02-27 06:00:00 수정 : 2017-02-28 09:06:34
모파상의 단편 <노끈>을 보면, 한 노인이 장터에서 노끈을 주웠다가 누군가가 잃어버린 지갑을 주운 것으로 오해받게 된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지갑을 주은 당사자도 나타나지만 마을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을 믿지 않자 결국 병이 나 세상을 떠나고 만다. 지난 토요일 제17차 촛불집회가 열린 광화문 광장에는 각계각층에 산적해 있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총집결했다. 그 중에는 수십 년이 지나도 규명되지 못한 의문사, 특히 ‘군 의문사’ 희생자 가족들의 통곡도 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오랜 세월동안 억울하게 가려져 가슴에 피멍이 든 진실이 있다.
 
허원근 일병의 1984년~2017년, 거리의 아버지
광화문 광장에 가면 그가 있다. 군대에서 22살의 아들을 잃어버렸던 44살 장년의 아버지 허영춘 씨는 77살의 노년이 되었으나, 아들의 사망 이후 33년째 계속되는 진실 규명 투쟁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타살되었다는 1심의 판결은 2심의 ‘자살’ 판결에 이어 다시 부정당하고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의 대표적 군 의문사 사건인 '허원근 일병 사건'에 대하여 대법원은 2015년 9월 10일 사인을 '알 수 없다'고 최종 판결했고, 2016년 12월 29일에는 아버지가 청구한 재심 신청을 기각했다.
 
진도에서 아버지를 도와 양식장을 짓고 농사일을 돕던 아들, 형편이 어려운 친구의 등록금을 아버지께 부탁하던 아들 허원근은 1983년 9월 입대해 첫 정기휴가를 하루 앞둔 1984년 4월 2일 강원도 화천군 육군 제7사단 3연대 1대대 3중대본부 내무반에서 50m 떨어진 폐유류고 뒤에서 양쪽 가슴과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2002년 9월과 2004년 6월 허원근 사건의 조사 결과 2차례 모두 ‘타살’임을 밝혔다.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허 일병은 4월 1일 밤부터 2일 새벽 2시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3중대장과 말다툼을 한 19초소 선임하사가 내무반에 있던 병사들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쏜 M16 소총에 오른쪽 가슴을 맞아 쓰러졌다. 3중대장은 대대 상황실에 ‘허원근이 자살했다’는 허위보고를 하고, 군은 내무반에 남아 있는 허 일병의 피를 닦기 위해 물청소를 한다. 허 일병의 시신은 폐유류고로 옮겨져 사건 발생으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오전 11시경 ‘누군가’에 의해 다시 M16 소총으로 허 일병의 왼쪽 가슴과 오른쪽 이마에 2발이 발사되었다.
 
군과 국방부는 사건이 발생했던 1984년과, 이후 1990년, 1995년에 계속 허원근 일병의 통한 어린 죽음―4월 2일 새벽 4시 아버지의 꿈에 나타나 ‘아버지’를 불렀을 정도로―을 ‘자살’이라 주장하였고, 2002년 8월 의문사위가 ‘타살’이라는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하자 이에 대항해 당시 육군중장이던 정수성을 단장으로 한 특별조사단(특조단)을 구성해 의문사위의 조사결과를 조작이라 비난하며 또다시 ‘자살’을 주장한다. 2004년 의문사위의 활동기한 연장을 중심으로 한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의해 2차례나 반려되었고 결국 16대 국회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되었는데, 당시 국회 법사위원장이 바로 김기춘이었다. 2004년 7월 의문사위 2기 조사관들을 협박하던 정수성이 2007년 6월 박근혜 전 한나라당대표 안보특보를 지내고, 이후 제18대ㆍ19대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한 사실이나, 유신헌법의 공헌자 김기춘이 박근혜 옆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한 사실은 참으로 일관성이 있어 보인다.
 
2016년 12월31일 광화문 촛불집회에 나선 희생자들의 부모. 허원근 일병 아버지 허영춘(오른쪽)씨.사진/작가 제공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의 실체
<만인보>가 다루는 역사시기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으로 일단락되지만, 고은 시인은 15권 뒤에 ‘별편’을 마련해 민주화운동 과정 중에 산화한 많은 젊은이들을 추모하고 있다. 그들 중 다음의 이름들도 발견된다. 최온순(동국대, 21세), 김두황(고려대, 23세), 정성희(연세대, 21세), 이윤성(성균관대, 21세), 한영현(한양대, 21세), 한희철(서울대, 23세). 이른바 ‘녹화사업’과 관련되어 1982~1983년 사이에 군대에서 의문사를 당한 꽃다운 젊은이들이다.
 
‘광주학살’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강제징집과 이른바 ‘녹화사업’이라는 범죄를 저지른다. 녹화사업은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이 강제로 징집된 학생운동 출신의 대학생들을 '특별정훈교육'에 의해 순화한다는 명목으로 보안사가 행한 불법행위이다. 녹화사업이라면 말 그대로 산에 나무를 심어 푸르게 해야 했건만, 이 녹화사업은 붉은 이념으로 물든 의식을 푸르게 한다는 뜻으로 지었다하니 저들의 ‘빨갱이ㆍ종북’ 히스테리의 전통은 예나 지금이나 역시 일관성 있다. 문제는 이 ‘사업’이 강제징집된 학생들에게 의식의 전환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도구’로 활용해 학생운동권의 동향을 파악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운동권의 인맥과 시위계획 등을 탐지ㆍ보고하는 밀정이 되라는 말인데, 같이 활동을 하던 친구들을 배신하라는 강요와 협박이 아직 20대 초반의 순수한 청년들에게 얼마나 도덕적인 상처를 주었겠는가. 의문사위의 조사에 의하면,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녹화사업의 대상이 된 사람은 447명이다. 강제연행ㆍ강제징집ㆍ프락치 활동 강요ㆍ구타ㆍ고문 그리고 끝내는 ‘의문사’를 당한 젊은이들 한 명 한 명을 추모하기 위해, 길지만 <만인보>에 실린 이 6인에 대한 시들을 모두 옮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동국대 사범대 3년
1983년 3월 시위예비음모로
다섯 명의 학우와 함께
연행된 뒤
강제징집되었다는 것 말고는
그리하여 그해 8월 어느 날 죽었다는 것 말고는
그리고 네 이름이 최온순이라는 것 말고는
 
부대장은 자살이라 통보했다
네 부모가 항의하자
타살이라 통보했다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군대마저 감옥으로 쓰는 자들에 의해
등 뒤에 총알 서너 개 박혀
시체로 돌아온 네 주검에 대해
우리는 바보처럼
아무것도 알 수 없다
< … >
(‘최온순’, 별편)
 
늘 껄껄 웃던 사람
안암동 학도답게
거칠거칠 소탈한 사람
그 사람이 강제징집 백일 만에
머리 없는 참혹한 시체로 왔다
자살이라고?
여자친구의 변심으로
자살이라고?
천만에 그의 여자친구 변심한 적 없었다
 
나쁜 군대는 죽여버리는 것과
거짓말하는 것과
아가리에 몽땅 착복하는 것이 하나
그놈들이 쳐들어와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되고
사령관 대신 회장이 된다
 
고려대 학생 김두황
그대 머리 없어
살아서 와도
그대 술 퍼마실 입도 없구나
원수 앞에 부릅뜰 눈도 없구나
< … >
(‘김두황’, 별편)
 
갓 입학한 연세대 1학년 정성희
그해 초겨울
백양로 시위중 연행
그길로 강제징집되었다
집에 알리지도 못한 채
휴전선 철책 보초 몇개월
한 장의 글발도 없이
1982년 여름 자살이라 했다
자살 아니야
 
한 장의 글발도 없이
목 아래
전신은 비닐로 포장되었다
자살 아니야
 
< … >
휴전선의 밤 M16 네 발을 쏘아 자살이라 했다
자살 아니야
(‘정성희’, 별편)
 
고등학교 다닐 때는
스스로 웅변이 모자라다고
서울역 광장의 사람들 속에 서서
여러분!
하고 웅변연습을 하던 소년
그가 대학에 들어와
인문과학연구회 회장이 되었다
1982년 초겨울 학생의 날 가투 연행
신체검사도 없이
바로 강제징집
3대독자
그러나 군바리 짬밥깨나 잘 먹고 지내는데
제대 날짜 다가오는데
자살이 웬말
 
이처럼 하나씩 없애면
학생의 싸움 끝장나나?
< … >
(‘이윤성’, 별편)
 
< … >
대학 장학생으로
야학 선생으로 자랑스러운 학생이다가
그만 늑막염 병중인데
강제징집
입대해서도
보안대에 끌려가 똥물 토해냈다
그런 뒤 부대로 돌아와
벙커에서 총 쏘아 자살
자살이라고?
< … >
 
강제징집 그것은 80년대의 죽음
그것은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밝혀야 하는 죽음
개가 짖는 한
물총새가 나는 한
(‘한영현’, 별편)
 
이렇게 죽다니
서울대 공대 4학년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뛰노는 젊은이
이렇게 죽다니
하잘것없는 일로
제대 앞두고
제대하여
신학교 들어가
사제가 되겠노라던 난만한 젊은이
어이없는 일로
수사관의 닦달받고 나와
눈보라 날리는 새벽
세 발의 총 쏘아 죽다니
 
후방에서 젊은이들 마구잡이로 잡혀가거니와
죽어가거니와
새벽 초소에서
아무도 모르게 어둠속 철조망 아래 죽어가다니
 
< … >
(‘한희철’, 별편)
 
진실을 향한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의 고난은 계속된다
한 해에도 수백 명씩 죽어나가는 군대에 권력자들은 자기 아들을 보내지 않는다. 스물을 갓 넘은 수많은 젊음들이 군에서 죽어갔으나 그들의 대부분은 평범한 농부와 어부와 노동자와 소시민의 아들들이다. 어쩌면 그래서 1998년 2월 24일 판문점에서 의문사를 당한 육사 출신의 김훈 중위와 역시 육사 출신의 예비역 육군중장인 그의 아버지 김척 씨의 투쟁이 약 600여 건에 이르는 군 의문사 사건들 중 상대적으로 더 많이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로 많은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저는 군대에 아들을 보낸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며 눈물과 절규의 시간을 살아왔다.
 
광화문 천막촌은 길에서의 생활에 익숙한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에게 낯설지 않다. 그는 1988년 10월~1989년 2월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서울 기독교회관에서 스티로폼 한 장으로 겨울을 보냈고, 1998~1999년 1년 넘게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여의도 천막농성을 계속 했다. ‘국졸’인 아버지가 법의학 서적을 읽기 위해 인터넷과 영어를 배웠다. 또한 앞서 언급된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을 위해 2004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겨울을 보냈던 허영춘 아버님. 2007년 검시관법과 공소시효배제특례법 제정을 위해 국회 앞에서 매일 아침 7시 1인 시위를 하느라 새벽길을 나서던 아버지. 암 투병까지 하고 오늘 또다시 광화문에서 팻말을 든 그의 소망대로 검시제도가 개혁되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다시 구성될 그 날을 간절히 염원한다.
 
2017년 2월25일 광화문 촛불집회. 사진은 허원근 일병. 사진/작가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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