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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 세상읽기)연쇄 집단 기억 오류
2017-05-12 08:00:00 2017-05-12 08:00:00
 1901년 12월4일 수요일 저녁 7시 45분. 베를린 대학교의 범죄학 연구소에서 총성이 울렸다. 사건은 질의응답 시간에 일어났다. 한 청중이 교수가 강연한 범죄 이론에 대한 기독교 도덕철학적 관점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질문을 이해 못한 교수가 난처해 하고 있을 때 다른 청중이 짜증을 내면서 소리쳤다. “그 따위 관점 따위는 없어!” 질문자와 끼어 든 사람 사이에 시비가 일었고 시비는 주먹다짐으로 발전하였으며 급기야 총알이 발사되었다.
 
현장에 있던 청중 가운데 열다섯 명의 법학도들은 현장에 대한 진술을 요구받았다. 세 명은 당일 저녁과 다음날 낮에, 아홉 명은 일주일 후에, 그리고 세 명은 다섯 주가 지난 다음에 말이나 글로 진술했다. 그들은 열다섯 단계에 걸쳐 진술을 해야 했는데 각각의 상황을 정확히 진술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오류의 비율은 27~80퍼센트에 이르렀다.
 
시비가 붙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를 정확히 기억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중들은 없던 대화를 만들어내고, 심지어 시비에 참여하지 않은 엉뚱한 사람을 시비의 장면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한 자리에서 싸웠지만, 그들이 강의실 안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였다는 진술도 나왔다.
 
이 사건은 실제 총격 사건이 아니다. IQ검사를 생각해 낸 심리학자인 빌리암 슈테른이 고안한 실험이었다. 슈테른은 ‘사람들이 얼마나 정확히 기억하는가?’ 하는 문제에 천착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목격담이 법정 진술에서 얼마나 유효한가를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0년대 초의 심리학계에서는 피실험자들이 실험인지 모르고 참여하는 ‘놀람 실험’이 유행이었다. 학생에게 마스크를 쓰고 강의실에 20분 동안 앉아 있게 하고서는 며칠 후에 학생들에게 아홉 개의 마스크를 제시하고 이 가운에 자신이 썼던 마스크를 고르게 했다. 제대로 찾은 사람은 스무 명 중 단 네 명에 불과했다. 강의실 총격 실험이나 마스크 실험은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믿을 게 못되는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지난 5월4일과 5일에는 제19대 대통령선거 사전투표가 진행되어 유권자의 26.06퍼센트인 1107만 2310명이 참여하는 새로운 역사를 기록했다. 그런데 사전투표 첫날인 4일 오후부터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내가 받은 투표용지에는 여백이 없었다.”, “여백이 없는 투표용지에 기표한 것은 무효표다.”라는 글이 도배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선관위를 신뢰하지 않고 지난 제18대 대선 때 개표과정에서 당선자가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선관위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목격담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선관위를 신뢰하지 못해도 그렇지, 아니 그 사람들이 유권자 얼굴만 보고서 누구를 찍을지 어떻게 알고 잘못된 투표용지를 배부하겠는가?”라는 합리적인 반박도 소용이 없었다. “설사 여백이 없는 투표용지가 나오더라도 무효표가 아니다.”라는 선관위의 발표는 음모론에 묻혀 잘 전파되지 않았다.
 
더민주당 선대위에서도 다음 날 모두 조사할 테니 안심하고 사전투표에 임해달라고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문은 점점 더 커졌다. 평소에 헛소리를 하지 않는 아주 상식적인 사람들도 같은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나와 가까운 어떤 심리학 박사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음모론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라며 역정을 내기도 했다.
 
급기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5일 허위사실을 유표함으로써 선거법을 위반 했다며 12명을 대검찰청에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둘째 날인 5일에는 여백이 없는 투표용지를 받았다는 증언이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렇다면 4일의 그 많은 목격담은 무엇이었을까?
 
진실은 5월9일 밤에 개표장에서 드러났다. 여백이 없는 투표용지는 전국에서 단 한 장도 나오지 않았다. 모든 투표용지에는 후보자 사이에 0.5cm의 여백이 있었다.
 
사람은 결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꼼꼼하고 현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다. 이미 100년 전에 실험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이거나 평소에 신뢰하던 사람의 증언이 있으면 기억의 오류는 증폭되어 전파된다. 연쇄 집단 기억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 약학 칼럼니스트 정재훈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항상 세 가지를 의심해야 한다. 자신의 눈, 자신의 기억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이 바로 그것이다.” 내 기억은 다른 사람의 말에 의해 왜곡된다. 신뢰할 만한 사람의 말일수록 더 의심해야 한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의심하자.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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