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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68화)이름 없는 병사를 위하여
“귀신들이 / 가득한 방이었다”
2017-06-05 08:00:00 2017-06-05 08:00:00
사드(THAAD) 발사대 4기 추가반입 보고누락에 관한 보도를 계기로 군내 파벌 조직 둘이 다시 국민에게 주목받았다. 1976~1992년 사이에 존재했다가 해체된 후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부활했다는 군부 내 최대 사조직 ‘알자회’(육사 34기~43기)가 그 하나이고, 독일 육군사관학교 연수·유학생 출신들로 구성된 김관진(육사 28기) 전 국가안보실장의 친위그룹 ‘독사파’(獨士派)가 다른 하나이다. 군내 파벌 세력들이 군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고질적인 방산비리로―“방산비리는 생계형 비리”라고 발언한 국방부장관과 함께―나라를 좀먹는 동안, 열악한 환경 속에서 나라를 지켜온 이들은 이름 없는 사병들이었다.
  
현충일을 생각한다
흔히 ‘동작동 국립묘지’로 불리던 국립서울현충원의 시초는 19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서울 장충사에 국군 전사자·순직자들이 처음 안치되기 시작하다가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작동에 국군묘지가 조성되었다. 이 국군묘지는 1965년 대통령령에 따라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는데, 1955년 개장한 서울현충원의 묘역이 베트남전을 거치며 포화상태에 이르자 국립대전현충원이 1979년에 착공, 1985년에 개장되었다. 그런데 서울현충원만을 기준으로 했을 때, 유골이나 시신이 없어 위패봉안관에 위패만 안치된 수가 10만4000여 위, 유골이나 시신은 있으나 이름을 모르는 무명용사 납골당이 7000여 위, 묘비명과 함께 묘역에 안장된 이들이 5만4000여 위라 한다. 대전현충원을 감안한다면 이 숫자들은 훨씬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순국선열과 전몰장병들을 기리는 현충일이 6월6일로 제정되어 처음 추도식을 가진 것은 1956년이다. 현충일을 6월6일로 정한 이유는 대체로, 6·25전쟁이 6월에 일어났다는 점 외에 24절기 중 하나인 '망종(芒種)'과 관련된 역사에서 찾아지고 있다. 4월5일을 전후한 청명과 그 다음날인 한식은 손이 없는 날이라 조상의 묘소를 찾아 각각 사초(莎草)와 성묘를 하고, 6월 초인 망종에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망종은 ‘벼, 보리 같은 까끄라기 곡식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라는 뜻으로, 태양 황경(黃經)이 75도에 달하는 6월 5, 6, 7일 중 하나에 해당하는데 이때는 보리를 베고 모내기를 해야 하는 시기이다. 조상들은 이때 보리 수확을 감사하고 모내기를 한 벼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사>의 현종 5년(1014) 6월6일자 기록을 보면, 왕이 6월 경신(庚申) 교서(敎書)를 내려 “방수군(防戍軍) 중에 길에서 죽은 자는 관청에서 시신을 거두는 도구를 제공하고, 해골을 상자에 담아 역마(驛馬)에 실어 집에 빨리 보내도록 하라. 돌아다니는 행상(行商)으로 죽어 성명과 본관(本貫)을 알 수 없는 자는 소재지의 관사(官司)에 그를 위해 임시로 장사 지내고 늙고 젊은 정도의 용모 특징을 기록하여 실수가 없게 하며, 이를 영원히 법식으로 삼으라.” 했다고 전하고 있다(고려사 권4 세가(世家)4 현종 5년). 한데 이 6월6일은 음력이고 양력으로는 1014년 7월5일이라 차이가 좀 있다. 그러나 현종 1년인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전쟁을 겪은 후 왕이 교서를 내려 국경을 지키다가 죽은 군사들을 추모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1956년 첫 현충일을 기념한 6월6일은 그해의 망종이었다.
 
지난해 현충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은 추모객들이 참배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치유되지 않은 상흔
국가보훈처의 통계에 의하면, 2017년 4월말 기준으로 제적(국적상실)을 제외한 참전유공자 등록 현황은 6·25 참전 12만3992명, 월남 참전 20만3367명, 6·25 및 월남 참전 2652명으로 총 33만11명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훨씬 많았던 전쟁으로, 노근리를 비롯한 미군의 민간인 학살, 보도연맹 같은 정부의 자국민 학살이 후방에서 자행되었다. 학살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겪은 고통, 한이야 이루 말할 수 없거니와, 스스로 채 의식하기도 전에 혹은 알아도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어린아이들까지 포함된 민간인들을 사살하며 명령을 이행한 이들 중에는, 학살의 가해자이자 이 전쟁범죄의 또 다른 피해자로서 평생 벗어나지 못할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온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사실 전선에서 교전 중에 벌어진 살상의 기억도 고통스러운 상흔으로 남기는 매한가지이리라.
 
끄으
술냄새
배고픈 사람에게
그 냄새는 더 진하다
 
목 자른 군화
헌 군복 야전재킷에 상이기장 한줄 달았다
 
세상은 상이군인이 지배한다
나라 위해
몸바친 용사
그들은 강요밖에 기술이 없다
구걸도 강제
엉터리 물건
비싸게 파는 것도 강제
 
군밤장수 군밤 한봉지 거저 들었다
 
오른손 갈고리
갈고리만 쳐들면 되었다 기술이 없다
 
하루에도 스무 번쯤 내뱉는 소리
씨팔!
 
어쩌다 나타나는 헌병대 앞에서
얌전하면 된다
경찰은 저쪽에서 모른 척한다
< … >
 
세상은 상이군인이 지배한다
군홧발로 짖는 개 차버린다
빈 깡통 차버린다
지나가는 하이힐 여자
야 이년아
한코 안 줄 테면
네년 핸드백에 들어 있는 것
내놔
하지만
오산 숯고개
상이군인 신영도는
바깥세상에 나오는 일 없었다
 
밤이면
그가 죽인 놈들
인민군
중공군
그놈들 낯짝이 자꾸 떠오르는 병에 걸렸다
대낮에도
문 처닫고 누워 있다
귀신들이
가득한 방이었다
(‘오산 상이군인 신영도’, 17권)
 
전쟁이 가져 온 폐허는 국토나 사회기반시설 같은 물리적 공간에만이 아니라 전쟁을 겪은 인간의 내면에 몰아쳐왔다. 전쟁으로 인한 온갖 외상과 내상, 또한 정신적 외상에 고통받아야했던 수많은 상이군인들은 국가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1961년에 설치된 군사원호청은 이듬해에 원호처로 승격됐으며 1984년에는 국가보훈처로 개칭되었는데, ‘원호(援護)’라는 용어에서 보이듯이 이는 물질적 원조 차원에만 머물렀고 그나마 뚜렷한 외상과 연금수급권이 있는 소수의 상이군인에게만 국한되었다. 상이군인들의 몸과 마음, 정신에 각인된 상흔들은 그들이 헌신했던 국가로부터 아무런 치유도 받지 못했다. 명예와 자부심은커녕 앞의 시에 묘사된 상황이 그들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50년이 되어서야 전사자 유해 발굴이 시작될 정도로 국가는 무심했고 국군포로의 송환에도 정부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1951년 ‘군인사망급여금규정’에 따라 일등중사(하사) 이하의 사병 전사자의 유족에게 지급된 사망급여금은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인 12만원이었다고 하니, 국가에 희생한 생명 값이 쌀 한가마니였던 셈이다. 한국정부는 2006년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이르러서야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게 된다.
 
지난 2월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2차 유해발굴에 앞서 발굴현장 알리는 표지석 간판을 세워둔 모습. 사진/뉴시스
 
필부의 아들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전쟁터로 내몰려 구슬픈 군가를 부르며 떠났던 소년·청년들은―그런 역사적 순간 항상 그랬듯이―필부필부(匹夫匹婦)의 아들들이었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이 슬프디슬픈 군가를 부르며
논산훈련소로 간 상구
 
1953년 철의 삼각지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상구 동생 상복이
벌써 자라나
< … > 술집에 가
젓가락 치며
형의 군가를 불렀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상복이’, 19권)
 
힘없고 ‘빽’ 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제주도훈련소도 모른” 채 “논산훈련소도 모른” 채 “어느날 거리에서 / 낌새도 모르고 군인이 되고 말았다”. 이를테면 “전남 곡성 국도”에 “군용트럭이” 서 “헌병 하사관 둘이 / 검문검색”을 해 “냇물고기들 / 한 삼태기 잡”듯 “지나가던 젊은것들”을 잡아들이는 것이다. 이들은 “실려가 / < … > / 목에 군번 걸고 / 33식 총 분해만 익”혀 “M1 분해는 / 전선에서 무턱대고 쏘아대며 / 차차 익숙해졌다 // 낙동강전투 / 왜관전투 / 그 포화 속 / 총탄 속 강기슭 / 모두 다 / 풀썩풀썩 고꾸라지는 총알받이로 / 죽어간 전우 가운데 // 용한 놈 남병환 일병은” “죽은 전우의 탄창 벗겨내어 / 그 총탄 정신없이 쏘아대며” 살아남아 “전투 뒤 / 시찰 나온 부대장을 쏴죽이고 싶었다”(‘남일병’, 19권).
 
“부대장의 하얀 얼굴”은 남일병에게 어제 “담배 한 개비 나눠 피운” 죽은 전우들의 시커먼 얼굴들을 상기시켜 급기야 그 하얀 얼굴을 “피죽사발로 만들고 싶”게 만든다(앞의 시). 이런 부대장 같은 인물을 현 시기로 바꾸어 찾아본다면 대부분 병역을 면제받는 고위공무원의 아들쯤 되지 않을까? 그런 인물이 또 하나 여기에 있다.
 
육군본부에 누구 있다 빽이 있다
빽 있으면
후방 배치로 살고
요직 근무로 으스대고
빽 없으면
일선 배치로 죽어간다
 
중공군 모안영은
모택동의 큰아들인데
미군 전투기 공습으로 죽었고
국군 김춘길 소위는
국방부차관 조카이므로
육군본부 인사처장이 외삼촌이므로
후방 근무로 단골 술집 깊숙한 방 술이나 마셨다
 
육군본부에 누구 있다
잠시 눈가림 아웅
일선 연대에 잠시 배치
햇빛 한줄기 받지 않은
고운 얼굴
햇병아리 소위였다
 
김춘길 소위
시건방을 떨어댔다
면도하고 검은 안경 쓰고
연대본부 막사 밖에 나타나
바람과 구름에 대고 시건방을 떨어댔다
 
건봉산 향로봉 884고지
공방전 치열
며칠을 굶다시피 싸우는데
김소위는 시건방떨다가
서울로 가버렸다
 
< … >
 
촌놈들 빽 없는 놈들
돈 없는 놈들 개털들
그것들만 전선에서 피죽이 되어갔다
비 퍼붓는 밤
판초 쓰고 보초 섰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적 척후병 단검에 박혀 죽어갔다
 
그 무렵
서울의 김소위는 명동에서 미스 리 미스 조 양쪽에 끼고 있었다
(‘김춘길 소위’, 19권)
 
마오쩌둥은 이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을 위해 자신의 장남인 마오안잉(毛岸英, 1922~1950)을 타국의 전쟁터로 보냈다. 중국인민지원군에 가장 먼저 등록했던 마오안잉은 직접 전선에서 싸우기를 원했고 그의 아버지도 그것을 사령관에게 요청했으나, 지원군 총사령관인 펑더화이(彭德懷)는 그를 자신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배속시켰다. 그러나 주석의 아들인 이 젊은이는 참전 한 달 만인 11월25일 미군 전투기의 폭격에 의해 28세의 나이로 전사하고 만다. 장남을 잃은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으로 아들을 북한에 두기로 결정, 그의 유해는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묘에 묻혔다.
 
한편,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 장성의 아들들은 총 142명으로, 그 중 35명이 전사했다. 제임스 밴 플리트(J. A. Van Fleet) 장군의 아들로,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평양 상공에서 실종된 지미 밴 플리트 2세 중위도 그들 중 한 명이다. 1952년 4월4일 새벽 야간임무수행을 떠나 돌아오지 않은 아들의 아버지는 부활절을 기해 한국전에서 실종된 모든 부모들에게 위로전문을 보냈다고 한다. 국적과 이념, 지위 고하를 떠나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이야 다를 바 있으랴.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이 가슴 아픈 날이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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