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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임금 기아차 패소 '일파만파'…논란의 재확산 막아야
정기상여금 제외한 묵시적 합의는 인정…관건은 '경영상 위기'
2017-08-31 17:24:23 2017-08-31 17:54:49
[뉴스토마토 구태우 기자] 기아차 노조가 통상임금 소송 1심에서 일부 승소했지만, 쟁점이었던 신의성실의 원칙을 둘러싼 논란은 가라앉기 힘들 전망이다. 법원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기로 노사간 묵시적 합의가 있었다는 기아차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경영상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주장은 일축했다. 기아차가 패소하면서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경영계는 당혹감을 보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는 31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노조가 신의칙을 위반했다는 기아차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1심 판결이 확정될 경우 기아차는 4223억원(원금 3126억원·지연이자 1097억원)을 지급해야 한다. 재판부는 노조가 청구한 체불임금의 38.6%가량을 체불임금으로 인정했다. 야간 근무수당, 휴일 근로수당, 연장·휴일근로 중복할증은 기아차 주장에 따라 공제됐다.
 
이번 소송 결과를 좌우한 건 기아차의 경영 상황이었다. 재판부는 기아차가 체불임금을 지급해도 경영상 위기가 오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기아차가 노조에 지급해야 할 체불임금 원금(3126억원)이 기아차의 한 해 경영성과급(지난해 5609억원)보다 낮은 점을 근거로 들었다. 재판부는 노사가 합의해 체불임금을 분할 상환하는 방식으로 기아차가 재정적 부담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완성차업계가 패소시 인건비 부담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일축했다. 재판부는 "노조가 마땅히 받아야 할 임금을 두고 경제에 위협이 된다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앞서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 따르면,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기로 한 묵시적 합의가 있을 경우 신의칙 위반에 해당된다. 이 경우 법원은 체불임금 지급으로 인한 경영상 위기가 오는지 함께 판단한다. 재판부는 노사간 통상임금에 대한 묵시적 합의는 인정했지만 경영상 위기는 인정하지 않았다.
 
경영계와 노동계는 이날 법원 판결과 관련해 상반된 논평을 내놨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대기업 노동자에게 신의칙을 엄격하게 적용한 법원 태도는 노동시장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라며 "신의칙에 대한 합리적 판단기준을 신속히 제시해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노총은 "통상임금의 법리를 바로 세운 판결"이라며 "이번 판결이 잘못된 통상임금 기준으로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하는 구조를 바꾸는 데 일조하길 바란다"고 환영했다.
 
경제계는 이번 1심 선고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도입된 신의칙 요건을 가늠할 바로미터로 꼽혔기 때문이다. 노동계와 경영계 모두 패소시 미칠 후유증 등 한국 경제에 미칠 파장도 대단했다.
 
노동계는 지난해 2조4614원의 영업이익을 낸 기아차의 경영상 위기가 인정될 경우, 기아차보다 열악한 기업은 승소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압박했다. 경영계 또한 법원이 신의칙 위반 요건을 엄격하게 판단할 경우 통상임금 소송에서 승소하기 어려울 것으로 일견 예상했다. 전원합의체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한 상황에서 다툼의 여지는 신의칙 밖에 없었다.
 
이번 선고로 향후 노동계와 경영계의 셈법은 더욱 복잡해지게 됐다. 재판부는 기아차 노사의 임금협상을 기준으로 묵시적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이번 판결로 유사 소송에서 신의칙 위반 요건인 묵시적 합의가 폭넓게 인정될 수 있다는 게 법조계의 예상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전 노조는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지 않고 임금협상을 진행했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 이후 통상임금의 범위가 확장됐고, 노조가 이를 재산정하면서 소송이 잇달았다. 기아차 노조 역시 당초 휴가비·유류비 등 5개 항목이 통상임금에 해당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소송 내용을 정기상여금으로 변경했다.
 
이날 법원 판결에도 신의칙을 둘러싼 논란은 오히려 가중되고 있다. 노동계와 경영계는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통상임금의 범위를 법률에 명시해 분쟁을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노총은 "이번 판결로 노동의 대가로 지급되는 일체의 급여는 통상임금에 포함시키는 법제도 개선 투쟁에 앞장설 것"이라고 밝혔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기업 경영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통상임금 정의 규정을 입법화하고, 신의칙 세부지침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상임금을 둘러싼 노사 분쟁을 줄이기 위해 노사정 대타협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2015년 9월15일 노사정은 대타협을 맺었다. "통상임금을 둘러싼 소모적 갈등을 방지, 임금구성을 단순화하고 지급요건을 명확히 하도록 상호 협력한다"는 내용의 문구가 합의문에 담겼다. 하지만 박근혜정부가 이른바 노동개혁을 일방적으로 추진, 한국노총이 합의를 파기하면서 노사정 대타협은 무산됐다.
 
각 사업장에서는 임금체계 개편 논의가 이어질 전망이다. 통상임금의 범위가 확대돼 노사 양측은 임금체계 개편의 필요성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됐다. 노조는 노사 합의를 통해 각종 수당을 기본급에 산입, 고정급을 높이는 게 관건이다. 고정급의 비중이 높아질 경우, 노동자의 소득이 늘고 연장 및 휴일 근무를 줄일 수 있다. 다만, 사업주가 수당의 성격을 복리후생 형태로 바꿔 통상임금에서 제외할 경우 노사갈등은 커질 수 있다.
 
기아차 노조는 재판부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한 만큼 임금체계 개편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인다는 방침이다. 노조는 "통상임금 범위 확대는 안정된 임금체계로 노동시간을 단축,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취지"라며 "경영계는 법원 판결로 장시간 근로를 유발하는 경영 방침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태우 기자 goodtw@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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