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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80화)생과 사를 잇는 곡소리
“과연 곡성 하나 잘 뽑아내어 / 이 세상 한차례 살 만하다”
2017-09-11 08:00:00 2017-09-11 08:00:00
‘월성원전 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가 천막농성을 시작한 것이 2014년 8월25일이니, 이 지난한 투쟁은 벌써 만 3년을 지나고 있다. 몸에서 삼중수소(인공 방사성 원소)가 나오고 여러 암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 속에서 경주 월성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은 지난 시간 내내 생존을 위한 이주 대책을 요구해왔다. 주민들의 생명이 걸린 상황의 절박함은 상여를 뒤따르는 할머니들의 곡(哭)소리, 자신의 관을 끌고 가는 사람들의 행렬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이는 우리의 장례문화가 반영된 매우 독특하고 한국적인 시위방식이었다.
 
경주 한농연 소속의 농민 1000여명이 월성원전 모형 상여를 앞세워 경주 시청문을 밀고 들어가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대곡(代哭) 문화
아마도 시골은 다르겠으나, 도시의 경우 대부분 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이 이루어지는 요즘 장례과정에서 호곡(號哭)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장의사(葬儀社)’와는 규모가 다른 장례 대행 서비스업체로서 ‘상조회사’가 우리 사회에 출현한지도 제법 오래되었고 ‘장례지도사’라는 용어도 이제 낯설지 않아졌다. 시대와 환경이 변해―아마도 시골의 상갓집이 아니라면―장례과정에서 곡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게 되었으나, ‘곡소리가 난다’, ‘곡소리가 들린다’라는 식의 표현은 일상 속에서도 종종 사용되어 어떤 어려움에 처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묘사하곤 한다.
 
성리학적 질서와 유교문화에 지배받던 조선이 중시한 상례(喪禮)의 규정에 따라 호곡풍습이 현대에도 이어지고 아직은 자주 볼 수 있었던 30년 전, 부모상을 당한 젊은 상주들은 곡소리를 내는 게 어색해 난감해하거나 친척어른들의 재촉에 모기만한 소리로 ‘아이고 아이고’를 반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고인의 자녀인 상주들은 ‘아이고 아이고’라고 곡을 하지만, 그 밖의 친척관계에서는 ‘어이 어이’라고 곡을 해 서로 구분했다.
 
조선시대에 양반의 장례 때 대신 곡을 하던 여종을 곡비(哭婢)라고 했는데, 세종실록을 보면 곡비에 관련된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다. 세종 1년(1419년)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조(前朝)의 국장(國葬) 및 우리 태조의 장례에 저자 안의 잡색 여자들을 불러다 울며 따라가게 하고, 이를 통곡비(痛哭婢)라 하는 것이 진실로 좋지 못한 일입니다. 삼가 <두씨통전(杜氏通典)>·<당원릉장의(唐元陵葬儀)>를 상고하여 보면, 공주와 내관 등이 둘러싸고 모두 울고 발을 구르고 하며 따라간다 하였습니다. 이제 태행 상왕(太行上王)의 장례에는 공주는 궁인으로 대신하고, 유고(有故)하면 관비(官婢)로 울며 따라가게 하소서"라고 하여 이를 따랐다고 되어 있다(<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2월21일 신묘).
 
또한, 이것의 연장선상으로 세종 3년(1421년) 예조에서 아뢰기를, "국장이나 대신의 예장(禮葬) 때에, 곡비를 전에는 시전(市廛)의 계집으로 시켰는데, 공정 대왕과 원경 왕후 국장 때에는 옛 제도에 의하여 궁인으로 하여금 곡하며 따르게 하였으니, 지금 이후로는 대신의 예장에 곡비는 본가의 계집종을 쓰게 하소서"라고 하여 이를 따른 것으로 되어 있다(<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2월12일 을사).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조선 후기 서민들이 초상 때 이 예장의 상례를 본떠 장례행렬의 앞에 곡비를 배치시키자 나라에서 이를 사치스럽다는 이유로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지배세력으로서는 내심 서민들이 자신들처럼 곡비를 고용하는 것이 자존심 상했을지도 모르겠다.
 
<만인보>에도 초상집에 가 대신 울어주는 아낙네가 나오는데, 고은 시인이 소년시절 고향마을에서 본 이 대곡하는 여인도 이러한 ‘곡비’의 전통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양반 초상집 곡성 인심이나 좋아야지
한데 그런 집 며느리라는 게
어찌 음색에는 물싼 것들이어서
시아버지 눈감았는데도
애고애고 곡성 하나 쓸 만한 게 없다
그런 집에서는 으레 바우배기로 사람 보낸다
바우배기 옥정골댁 판구 어머니가 불려간다
열무김치 심심찮게 뽑아다 다듬고 있다가
고리짝 열고
농약냄새 나는 광목옷 한 벌 꺼내 입고
< … >
고래실 논길 나락 자란 길 건너
초상집 함석대문 들어서자마자
아이고 아이고대고 아이고 하고
춘향전 십장가 뺨치고 볼기 치게 곡성을 뽑아내니
눈물 한 방울도 없이 뽑아내다가
눈물도 흘러내리며 뽑아내니
그때에야 초상집 큰 차일 벌렁 바람 타며
그 아래 문상객들 술상과 국수상 제법 흥겨워지누나
어느 때는 미제로 관여산으로
하루 두 군데 불려가니
과연 곡성 하나 잘 뽑아내어
이 세상 한차례 살 만하다
옥정골댁 부뚜막 대물림 초항아리도 없는데
그 곡성 잘 나오는 목소리
여느 때는 눈에 귀에 띄지도 않는데
(‘옥정골댁’, 4권)
 
자연의 이치대로 맞이하는 삶과 죽음
그런데 대곡을 시키면서까지 곡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려 한 이유는 부모상을 당한 자식이 불효를 뉘우치는 뜻이기도 했고, 긴 장례 절차 내내 상주가 쉬지 않고 울기도 어렵거니와―그러다가 탈진해 쓰러질 수도 있고 또 상주는 중간 중간 다른 일들도 해야 하므로―슬픔으로 초췌해진 상주가 몸을 상해 상례를 잘 치러내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번갈아가며 곡을 해 곡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조선이 중시했던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장례의 전 절차에 거쳐 대곡을 하는 시기까지 정해놓았다.
 
망자를 그리워하고 그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울음을 쏟아냄으로써 산 자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정화되기도 하지만, 흔히들 얘기하듯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지라 남은 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살아가게 된다. 물론 망자와의 관계의 친밀도에 따라 마음의 복귀 속도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망자를 ‘자신의’ 의식 속에 가두어 ‘자신의’ 슬픔과 후회를 연장하기보다 망자의 혼백이 가능한 빨리 이승을 훨훨 털고 떠날 수 있게 기원하는 것이 아마도 현명한 태도가 아닐는지. 그러한 삶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는 친근한 인물이 여기에 있다.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시이자 좋아하는 등장인물인 <대기 왕고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들길로 시오릿길 대기마을에서
왕고모 올 때는 길 가득합니다
그 왕고모가 할머니 죽은 날
오자마자 큰 몸뚱이 들썩이며 울부짖었습니다
땅도 치고 허벅 치고 울부짖더니
성님 이게 웬일이여
나하고 회현장에서 만나
국수가 오래 불어터져서 우동 된 놈 사 먹고
또 언젠가는 막걸리 한 사발에
국 뜨거운 국말이밥도 사먹던 일 엊그제 같은데
하마 5년 6년 씀뻑 지나갔구려
작년 가을 왔을 때
성님 하는 말이 몇달만 있으면
이놈의 병 썩 물러가서
내 사대삭신 훨훨 날아다닐 것이라고 하더니
어디로 날아가셨소그려 아이고 성님 아이고 성님
인제 가면 언제 오려오
개똥밭 쇠똥밭 살아도 이 세상이 좋다는데
< … >
그 큰 저승 가서
어느 회상에 찡겨 사시려오
아이고대고 아이고아이고
이렇게 사설깨나 늘어놓으며 애통해하다가
콧물 한번 훑어내고 문득 뒤돌아다보더니
거기에 송말에서 시집온 재종동생의 댁 보고는
이제까지의 청승 다 어디 갔나 싶게
아이고 송말사람
자네 얼굴 한번 환하네그려
애들 잘 크지
논 한 배미 또 사들였다며
그 우물 새로 앉히고 자네집 운이 돌아왔네그려
슬픔이란 것이 하나도 슬픈 것이 아니라
다음 고개 넘어가면
안 보이는 골짜기 개울 아닌가 한판 판소리 아닌가
참 초상집 이런 아낙 들어서야 그나마
술맛 있고 사잣밥 밥맛 있지
안 그런가
(‘대기 왕고모’, 1권)
 
어린 시절 이해가 안 되던 장례식장의 모습이 나이 들면서 조금씩 납득이 가게 되었다면 이는 낯설었던 문화에 대한 이해가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삶을 살며 동시에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인 나의 시간이 점점 흘러갈수록 생사에 대한 나의 이해가 깊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인생의 초반부에 서 있는 소년·소녀 혹은 청년의 눈에는 대기 왕고모의 행동이 의아하고 뭔가 진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반면, 인생의 중반부를 넘어 후반부로 가거나 후반부에 있는 이들, 내 삶의 봄·여름을 보내고 가을·겨울을 맞이하는 이들은 “슬픔이란 것이 하나도 슬픈 것이 아니라 / 다음 고개 넘어가면 / 안 보이는 골짜기 개울”이고 “한판 판소리”인 것을 깨달으며 대기 왕고모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상주가 소리 내어 곡을 하고 심지어 다른 이들이 번갈아 대곡을 하는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낯설고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다양한 장례문화의 일부이고 나름의 이유 속에 탄생한 것이며 세계의 여러 나라들에서 보이는 문화인 것이다. 예를 들어 남(南)이디오피아 사람들도 곡을 하는데, 그들은 울부짖으며 망자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의 이마와 가슴을 친다. 여성친척들은 강력한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할퀴고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몸을 땅바닥으로 던지고 실신하기도 한다. 상례에 따라 어떤 나라 사람들은 망자를 울면서 보내고 어떤 나라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보낸다. 누군가는 곡을 하며 장례를 치르고 누군가는 축제처럼 장례를 치른다. 장례문화의 다양성이다.
 
우리도 곡만 했던 것이 아니다. 고구려 상례의 경우 곡도 하지만 장사를 지낼 때는 풍악을 울리고 춤추고 노래하며 망자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영향으로 고구려도 3년상이 있었지만 방식은 달랐고, 불교의 영향이 컸던 남북국시대의 신라나 고려 때는 1년상을 지내고 화장을 했다. 이후, 유교의 영향으로 조선 때는 매장문화로 회귀했다가 근래 들어 현실적인 이유로 다시 화장이 많아지고 있다. 100년 후, 1000년 후 우리의 장례문화는 또 어떻게 변화하고 무엇이 지속될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일원에서 제44회 단종문화제가 열린 가운데 조선시대 국장 발인행렬을 재현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어떤 효, 어떤 현실
부친상을 당해 ‘효’를 실행하려는 두 상주의 모습을 <만인보>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이 처한 상황의 차이는 매우 상이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산토끼몰이 잘하던 남수영감 죽은 이튿날
시집간 딸 옥순이가
마을 밖 오릿길에 접어들면서
머리 풀고 세상 떠나가게 곡성 내니
눈물이 앞을 가려
앞 못 볼 지경으로 곡성을 내니
마을에 들어서자
이집 저집 아낙네들 다 나와
쯔쯔쯔 혀 차다가
그네들까지 함께 곡성을 내어주니
온 마을에 슬픔 한번 커다랗다
< … >
그렇지
슬픔이라도 풍년 들어야지“(‘딸’, 1권).
 
옥순의 곡성을 마을 아낙들이 함께 해 슬픔의 풍년을 공유하는 모습은 공동체의 정감을 자아낸다. 반면, 대한제국의 항일의병연합부대인 13도 창의군의 총대장이었던 이인영(1868~1909)의 곡성은 그가 개인의 효를 행하느라 공동체의 운명에 큰 피해를 끼친 경우였다. “1907년 13도창의대장 이인영 어르신은 / 위풍당당하셨도다 / 그의 휘하 선발대는 /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나아갔도다 / 그런데 이때 하필이면 / 어르신 부친상 소식이 득달같이 달려왔도다 // 어르신께서 다 떠넘기시고 / 그날로 새재 넘어 / 문경 장지로 내려가 / 아이고 / 아이고 / < … > / 베옷 입고 곡을 하셨도다 // 정녕 / 눈앞의 효도만 있었도다 / 뒷날에도 회고하기를 / 충을 버리고 효를 택한 나 자신의 일을 / 후회하지 않는다 하셨도다 / 망한 나라에서 / 오로지 남아 있는 효뿐이라면 충이란 무엇이뇨“(‘이인영’, 10권). 당시 의병연합 조직에서 배제되었던, 양반이 아닌 평민 출신의 의병대장 홍범도(1868~1943) 장군(함경도)이나 신돌석(1878~1908) 장군(경상도)이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과연 어떻게 대처했을까?
 
대곡문화가 여전히 존재하는 중국이나 대만에는 곡상인(哭喪人)이 직업으로 있다. 대개 여자들이 맡는 이 곡상인은 감정 소모뿐만 아니라 눈과 목청에 무리가 가고 끊임없이 재를 마시게 되는 고된 직업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중국의 장례식 현장에서 보이는 하나의 현실이라면, 힌두교 성지인 네팔의 파슈파티나트 사원 주변의 화장터로 이용되는 카트만두의 바그마티 강에는 슬픔에 젖은 유가족들이 화장을 끝내고 돌아간 후 자석을 이용해 강물에서 동전을 건져내는 아이들이 있다.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현실인 셈이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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