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6화)근대화를 향한 욕망의 한 풍경, 백화점
“이 백화점에는 / 당신들이 살 것이 없다고”
입력 : 2018-04-23 08:45:53 수정 : 2018-04-23 08:45:53
전자상거래의 시대를 살면서 수많은 온라인 쇼핑몰과 나아가 해외직구 사이트라는 폭넓은 선택지를 가진 현대의 소비자들에게 백화점은 다분히 ‘고전적’인 형식일 수 있다. 세계 최초의 백화점 ‘봉 마르셰(Bon Marche)’가 파리에 문을 연 것이 1852년이니, 백화점도 나이를 꽤 먹은 셈이다. 그러나 소비문화와 욕망의 결정체로 상징되는 백화점은 노회해가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꾸준히 자신을 변신, 발전시켜 왔다. 21세기 백화점은 인터넷 쇼핑족이 매장에서 실물을 확인하고 정작 물건은 온라인에서 사는, 이른바 ‘쇼루밍(showrooming)’ 현상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프랑스 파리의 백화점 ‘봉 마르셰(Bon Marche)’ 내부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경성 시대 백화점, 북촌 대 남촌
한강을 중심으로 갈라진 서울의 ‘강북’과 ‘강남’이 대한민국의 이질화된 두 사회적 공간을 의미한다면, 청계천을 기준으로 구분된 경성의 북촌과 남촌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역과 조선인 지역의 두 이질적 공간을 의미했다. 강북·강남, 북촌·남촌이라는 지리적 구분은 이원화된 사회적 공간의 이질성뿐만 아니라 정치적 태도와 경제적 수준의 격차를 함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경성의 북촌·남촌 구분에는 민족거주지를 사회·경제적으로 차별화하려는 일제의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이와 달리, 조선시대의 북촌·남촌은 붕당들의 거주지를 구분하는데 쓰인 것으로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전해진다). 조선왕조시대의 도읍인 한성부를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그 흔적을 지우는 방향으로 진행된 일제의 식민지 도시화 정책에 따라, 성벽은 허물어지고 경성부로 개칭된 한성부는 경기도에 편입되어 그 행정구역이 계속 개편되어 가던 시절이었다.
 
일본인 거류지인 남촌의 본정(本町 혼마치, 현 충무로)에는 일본식 백화점의 전신인 오복점(吳服店, 포목·잡화점)들이 있었는데, 이 일본인 자본의 오복점들 중 네 곳이 각각 미쓰코시(三越), 조지야(丁子屋), 미나카이(三中井), 히라타(平田)의 4대 백화점으로 성장한다. 그중에서도 대표격인 미쓰이(三井)재벌의 미쓰코시오복점은 1906년 일본 본점의 경성 출장원 대기소로 처음 설치된 후 1916년 3층 건물을 낙성하면서 출장소로 이름이 바뀌었고 1929년에 정식 지점이 된다. 1926년 경성부 청사가 현재의 서울 시청(현 서울도서관) 자리로 옮기자, 이듬해부터 공사를 시작해 그 공터에 지상 4층 지하 1층의 건물을 1930년에 완공하게 되는데, 이것이 미쓰코시백화점 경성지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이다. 미나카이 백화점은 부산·대구·대전·목포·군산·광주 등 조선에만 12개의 지점을 둘 정도로 규모가 컸다.
 
군산 3층 미쯔이백화점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무서웠다
처음 보는 찬란한 물건들이 무서웠다
일본사람 조선사람이 무서웠다
기어이
아버지와 나는
백화점 여자에게 쫓겨났다
이 백화점에는
당신들이 살 것이 없다고
묵은 장에 가라고
새 장터에 가라고
아버지는 쫓겨나와 웃었다
백화점 돌아다보고
야 오라고 해도 안 가겠다
나를 보고
저기 가 국밥 사먹자
도회지는 무서웠다
2층 창으로 일본아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얼굴이 하얀 아이
좋은 옷 입은 아이
나는 그애가 무서웠다
뚜우 하고
항구의 기적소리가 났다 무서웠다
< … >
(‘미쯔이 백화점’, 3권)
 
위의 시에서는 ‘미쯔이백화점’이라는 이름이 언급되지만, 이는 아마도 미쓰코시(三越)백화점을 설립한 미쓰이(미쯔이, 三井)재벌과 혼동되었거나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과 혼동된 것으로 보인다. 군산에 진출해 있던 백화점은 미나카이, 조지야(구 미도파백화점의 전신, 현 롯데 영플라자), 그리고 조선인 자본의 동아백화점이었기 때문이다. 동아백화점(전 동아부인상회)은 당시 화신백화점(전 화신상회)과 더불어 경성의 북촌인 종로에 위치한 양대 조선백화점의 하나였지만, 조선인 고객 유치를 위한 과도한 출혈경쟁 끝에 1932년 7월 박흥식의 화신백화점에 인수·합병되고 만다. 당시 경쟁의 치열함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는데, 동아백화점의 ‘승강긔’(엘리베이터)를 보러 사람들이 몰려들자, 화신백화점은 ‘문화주택’ 한 채를 경품으로 거는 행사를 벌인 것이다. 물론 이는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든 화제가 되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 하나는, 백화점의 약진 밑에 중소상인들의 몰락이 뒤따랐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상 거쳐 갈 수밖에 없는 흐름이겠으나,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정상적으로 밟지 못한 식민지의 근대화와 도시화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편, 당시 계층별로 주로 찾는 백화점이 나누어졌는데, 미쓰코시는 일본인·조선인 상류층, 미나카이는 일본인 중류층, 조지야는 조선인 중류층, 히라타와 화신, 동아는 중류층 이하가 주로 이용했다고 한다(최병택, 예지숙 지음, <경성리포트: 식민지 일상에서 오늘의 우리를 보다>, 시공사 2009, 91쪽). 사실, 오늘이라고 다르겠는가. 명품관 백화점부터 상대적 저가품 백화점까지 ‘계층화’된 고객들이 서로 다른 백화점을 찾는 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서울 토박이'들의 기억과 경험을 이야기로 풀어낸 자료집 '서울 토박이의 사대문 안 기억'에 수록된 1958년 화신백화점. 사진/뉴시스
 
욕망의 집결지, 백화점의 천태만상
어린아이를 업은 아낙, 두루마기를 입은 촌로, 더벅머리 사내애들이 땀냄새를 풍기며 승강기를 구경하러 동아백화점에 갈 적에, ‘모던껄’(modern girl)·‘모던뽀이’(modern boy)들은 미쓰코시백화점의 옥상정원에서 분냄새를 풍기며 자유연애를 즐기고 예술을 논한다. 1930년대 경성의 백화점 곳곳에는 각양각색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상(1910~1937)의 소설 <날개>(1936)의 주인공인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가 “금붕어를 들여다보고”,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우적거”리는 “오탁의 거리”를 내려다보는 곳도 미쓰코시의 옥상정원이다. 옥상에서 그가 바라본 경성의 “오탁의 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하는 곳이지만, 주인공이 “피로와 공복 때문에 무너져 들어가는 몸뚱이를 끌고” 다시 그 속으로 “섞여 가지 않는 수도 없다 생각하”는 곳이다.
 
돈 많은 집 출신으로 근대식 교육을 받고 서양식 의복을 입으며 ‘근대적’ 사고를 하는 모던걸은 고급백화점의 소비자였지만, 학력과 미모를 갖춘―역시 모던걸에 속하는―여성이 사회진출을 해 돈을 벌고자 할 때 백화점의 ‘쇼프껄’(shopgirl, 상품판매원)은 도전이 쏟아지는 인기직종이었다. 다음의 일화는 당시 조선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해 직업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준다. 1933년 조지야백화점이 결원된 쇼프껄 몇 명을 구하는 광고를 내자 600명 이상의 지원자가 몰렸고 그중에는 전문학교 졸업자와 외국 유학생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미쓰코시백화점의 경우, 조선인 쇼프껄도 이삼십 명 있었는데 이 백화점의 쇼프껄 선발기준 1순위는 ‘미모’여서 물건을 사러온 남성들과 결혼해 몇 달 후 일을 그만두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백화점이 미모의 신붓감을 구하는 일종의 ‘선’시장, 결혼상품시장이 된 셈이다. 반면, 조선여성 70명가량이 근무하다가 1937년 확장공사 이후 200명의 쇼프껄이 일했다는 화신백화점의 경우, 그 선발기준이 미모에 있지 않고 미인도 많지 않아 결혼으로 인해 그만두는 경우가 적다고 당시의 잡지 <삼천리>(6권 5호, 1934년 5월)가 보도하고 있다(최병택, 예지숙 지음, <경성리포트>, 109~113쪽).
 
일제시대 판매되던 화장품이 신세계 백화점의 '추억의 상품전'에 전시된 모습. 사진/뉴시스
 
욕망의 실현부터 다목적공간까지
식민지 조선은 공업생산력의 발전이나 자체적인 부르주아지 계급의 형성 없이 일본의 대자본들과 조선의 친일매판자본들에 의해 파행적인 자본주의 경로를 걸어왔기 때문에, 경성에만 5개의 대형백화점들이 들어선 것은 수급불균형 등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소비욕구를 부추기는 백화점들의 휘황찬란한 공간은 서구화를 곧 근대화로 인식하고 동경하던 식자층과 상류층에게는 소비문화와 오락 그리고 연애·사교의 공간이었겠으나, 식량난에 시달리던 다수의 조선민중에게는 어쩌다 한번 구경 가는 곳, 자신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진열대 유리창으로부터 상대적 박탈감을 확인받는 곳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선인 자본의 유일한 백화점으로 살아남았으나 친일매판의 성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화신백화점은 1935년 화재를 겪고도 1937년 지하 1층, 지상 6층의 신관을 완공해 승승장구했다. 화신은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영업을 지속했으나 1978년 도심재개발 사업지역으로 지정되고 건물주도 바뀌어 결국 1987년 백화점이 폐업되고 건물은 철거되었다. 남촌의 일본 상권에 대응해 조선의 자본으로 북촌 종로에 세워졌고 우리나라 첫 근대건축가 박길룡에 의해 신관이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나 보존할 가치가 컸던 건축물이 최종건물주(삼성)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건물(종로타워)로 탈바꿈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1937년에 개점된 화신백화점 신관에는 전시관·영화관·식당·미용실(이발실)·사진실 등의 편의시설이 마련되었고, 옥상에는 대형전광판이 설치되어 뉴스를 내보냈으며, 건물 안에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갖춰졌다. 앞서 언급했듯이, 고객 유치를 위한 다양한 경품 행사 등 이벤트도 존재했고 각종 문화강연과 전시회도 열렸다. 즉, 쇼핑뿐 아니라 오락·문화 향수 등 다목적기능을 가진 공간으로 백화점을 활용하는 것이 이미 예전에 시작된 것이다. 서울에 다녀오면 ‘화신에 가 보았느냐’는 질문부터 받았다하니, 당시 이 백화점이 단순한 랜드마크 이상의, 훨씬 복합적인 상징성을 띠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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