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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8화)그립지 않은 추억, DDT
“한국은 또 다시 DDT의 땅이었습니다”
2018-06-04 08:00:00 2018-06-04 08:00:00
최근 언론보도를 통해 유명 침대에서 1급 발암물질인 라돈이 대량 검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침대를 사용해 온 소비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사용하지 않은 국민들도 불안에 떨게 되는 이유는, 가습기살균제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책임한 기업들에 의해 우리의 건강이 저당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영유아가 대부분인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사망자 수는 2017년 말 기준으로 신고 된 수만 1292명이었다(2018년 1월15일 환경보건시민센터 발표). 2018년의 우리는 무색·무미·무취라는 라돈을 경계하지만, 한때는 무색·무미 그리고 거의 무취인 살충제 DDT에 몸을 내맡겨야 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관계자들이 라돈 침대 관련 3차 기자회견을 열고 중국산 게르마늄 라텍스 침대의 라돈 검출 결과를 공개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DDT의 귀환
‘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에탄’이라는 긴 이름의 유기염소계 살충제, 일명 DDT가 수십 년 간 잊혔다가 우리 앞에 재등장한 것은 2017년 8월 달걀을 통해서였다. 맹독성 발암물질인 이 화학합성물이 친환경 농장의 토양과 닭, 달걀에서 검출되자 사람들은 모두 당황했다. DDT의 시판이 금지된 것이 1979년인데 38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DDT의 반감기(半減期)는 토양에서 2~15년으로 추정되지만 DDT의 분해된 생성물들로 인해 그 지속성이 훨씬 길다고 하니, 오래 전에 뿌려진 것이 토양 속에 잔류해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일부 전문가들의 추측처럼 2010년까지 사용된 중국산 살충제 디코폴(Dicofol)의 제조과정에서 불순물 형태로 남아 있던 DDT가 위력을 발휘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DDT의 귀환은 반갑지 않고 나아가 그다지 그립지 않은 DDT의 한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50~60대라면 어린 시절 동네 곳곳에 하얀 연기를 뿌리고 지나가던 소독차의 기억이 있을 것이고, 60~70대 이상이라면 거기에 덧붙여 한국전쟁 전후 혹은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 DDT를 직접 몸과 머리에 맞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영화나 사진 속의 신기한 광경으로 떠오를 이런 장면들이 시작된 것은 1945년 DDT가 미군과 함께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살충제 성분인 디클로로디페닐트라클로로에탄(DDT)가 검출된 지난해 8월 경북 영천시 도동의 한 산란계 방사농장에 있는 닭들의 모습. 사진/뉴시스
 
DDT의 한반도 진출
8·15 해방 이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은 대량의 DDT를 들여와 한국인들을 ‘소독’했다. 미군이 한국인들에게 DDT를 무차별적으로 살포한 이유는 한국인들로부터 주한미군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인을 ‘고양이 같은 민족’이라고 말한 하지의 인식에서 드러나듯이, 미군에게 한국은 야만국이고 한국인은 전염병을 옮기는 멸시의 대상이었다. 1946년에는 미군정청 위생국이 DDT를 자체 생산하게 되고 한국인을 향한 DDT 세례는 수시로 이루어졌다. 벅찬 감격으로 해방된 조국의 땅을 밟은 독립투사와 그 가족들도 어김없이 미군들에 의해 DDT 세례를 받았고 곧 난민수용소로 옮겨졌다.
 
해방 직후
서울에는
3백70여개 정당 사회단체가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자고 나면
간판 몇개가 내걸렸습니다
간판 없는 다섯명 당원의 정당도 생겨났습니다
 
점령군 하지 사령관
이런 조선사람들을 고양이라고 뭐라고 혐오했습니다
하지 사령관의 군정청에서는
거기 드나드는 조선사람에게도
군정청 밖
거리의 조선사람에게도
DDT를 마구 뿌려댔습니다
그 독한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조선사람은 얼빠져 히죽이죽 웃어댔습니다
아니 끓어오르는 수치로 치 떨리기도 했습니다
 
1950년 전쟁터에 온 미군으로 하여금
한국은 또다시 DDT의 땅이었습니다
벼룩 빈대 그리고 몸속의 수두룩한 이와 서캐
보이지 않는 세균조차도
다 조선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군은 조선사람을
DDT로 마구 뒤덮어버렸습니다
 
모든 고아원들 역시
할렐루야 세례와 DDT 세례를 함께 받았습니다
과연 애비 에미 없는 자식 DDT의 자식들이었습니다
 
< … >
(‘DDT’, 20권)
 
당시 미국에서는 DDT가 살충제로 일반에 시판되고 있었으니 미군정 당국자들은 살충제라는 것을 알면서 그것을 피점령국 국민, 즉 한국인의 몸에 살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살충제가 얼마나 위해한 것인지를 알 수 없었던 한국인들은 이와 벼룩, 모기를 잡아주고 질병을 막아주는 ‘기적의 약’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물론 DDT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말라리아, 장티푸스, 발진티푸스로부터 수많은 병사들과 민간인들의 생명을 구한 것도 사실이다.
 
DDT의 명암은 다음 두 인물의 상이한 업적에서도 드러난다. DDT의 살충효능을 밝힌 스위스 화학자 뮐러(P. H. Müller)는 해충박멸로 인한 식량증산, 말라리아 퇴치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1948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았고, 미국의 해양·생물학자인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은 1962년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라는 책에서 DDT를 비롯한 살충제·제초제의 유독성을 고발하고 생태계 파괴를 경고해 1972년 미국에서, 그리고 이를 전후해 다른 나라들에서도 DDT 사용을 금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196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카슨이 암 투병 중에도 살충제 제조회사들에 대항해 싸우는 과정은 힘든 여정이었다. 살충제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기업들이―무기상들이 그러하듯―쉽게 포기할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슨의 <침묵의 봄>은 결국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가게 된다.
 
6·25전쟁 당시 서울에서 피난 온 학생들을 위한 피난민촌 임시 초등학교에서 DDT를 아이들에게 살포하고 있는 모습. 지난 2015년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사진이다. 사진/뉴시스
 
원조와 DDT의 상징성
한국전쟁 시기와 전쟁 이후 아이들의 머리에도 어른들의 몸에도, 길에서도 학교에서도, DDT는 끊임없이 뿌려졌다. 항공기에서 대량 살포되는 DDT가 뿌옇게 뭉게뭉게 나오는 모습도 주기적으로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미군정 시절 그리고 1950~70년대, 방역과 위생의 기치 아래 이 땅에서 한 시절을 풍미했던 DDT, 한국인에 대한 미군의 경멸과 차별을 상징적으로 반영했던 DDT는 발암물질이라는 사실이 70년대에 전파되면서 한반도에서 퇴출당했다.
 
그런데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 대한 유엔(UN)의 원조나, 2차 세계대전 직후 파괴가 심했던 유럽지역에 대한 유엔의 원조활동에서 DDT가 갖는 의미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한의 원조사업은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ited Nations Civil Assistance Command in Korea, UNCACK)’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이 조직은 실상 미8군 산하에 본부와 전국 각 지역 팀들을 둔 사령부였다. 1950년 10월 미8군의 ‘유엔보건복지파견대(United Nations Public Health and Welfare Detachment)’로 시작해 그해 12월 미8군 내 주요사령부로 승격되면서 ‘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로 이름이 바뀌었고, 1951년 1월에는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로 된다.
 
미8군 사령부 UNCACK은 원조물자의 배분뿐만 아니라 군정, 민간인과 피난민에 대한 통제업무도 수행했다. 한편 유럽의 경우, ‘국제연합원조부흥처(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 UNRRA)’가 원조와 재건활동을 맡았는데, 한 연구서는 이러한 활동에서 DDT가 어떤 상징성을 띠고 있었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1951년 2월16일 미군들이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어린이들에게 DDT 살충제를 살포하는 모습.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담은 사진 250여 점을 엮은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 3'(눈빛출판사)에 실린 사진. 사진/뉴시스
 
원조는 유엔의 역량을 시험하는 중요 사업으로 여겨졌고, 미국이 주도하는 냉전 헤게모니하에서 이 사업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자유세계’의 상징적 사업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결국 일부 원조 프로그램은 자유시장 자본주의 경제를 전 유럽에서 복원시키고 미국에 우호적이며 보수적인 정부를 유지시키는 미국의 냉전적 세계전략의 일환이자 1950년대 내내 추진된 ‘근대화 이론’의 초석이었고, < … >. 이런 점에서 원조 자체의 성공적인 수행보다는 원조에 대한 성공적인 선전과 PR이 중요시 되었다. 특히 기자, 사진사, 작가, 영화제작자들이 전 세계로 확산시킨 DDT를 뿌리는 광경은 엄청난 프로파간다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선포였고, 의료와 질병에 대한 ‘자유세계’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상징이었으며, 이로써 DDT를 살포당하는 피난민들의 신체는 냉전의 전선이 되었다. (김학재, “한국전쟁과 ‘인도주의적 구원’의 신화”, 서중석, 김학재 외 4인 공저, <전장과 사람들: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일상>, 선인 2010, 31~32쪽)
 
원조는 단순히 원조가 아니고 DDT는 단순히 방역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한때 우리는 “냉전의 전선”이 되어 몸을 내어 준 채 “DDT를 살포당하”고 온몸으로 “자유세계”의 우월성을 내보이는데 일조했지만, 이제는 그 시절을 뼈아픈 심정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근래 몇 년 사이, 한동안 금지됐던 DDT가 아프리카의 말라리아 퇴치 문제와 관련해 다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 역시 단순히, 모기장을 보급할 것인가 DDT를 쓸 것인가, 라거나 아프리카에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것은 그곳이 가난하고 환경이 비위생적이라 그렇다, 라고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아프리카에 진출한 ‘깨끗한’ 선진국의 대기업들이 어떻게 아프리카의 농업구조를 바꾸고 모기와 말라리아가 다시 활개를 치는 자연환경으로 변화시켰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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