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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과 남북경협)색깔론·취약한 정부 리더십에 겉도는 경협
(6)경협 추진 최적 시점 상실···대북창구 김우중으로 바꾸기도
2018-08-25 06:00:00 2018-08-25 06:00:00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그러나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방북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색깔론을 동원한 정치 논리가 ‘전향적’ 대북정책과 ‘자주외교시대’를 향한 북방정책의 발목을 잡고 남북경협(경협)의 거대한 실리를 가로막았다. 2월8일 노재봉 정치특보는 청와대 수석회의에서 아산의 방북이 “적성국가와의 외교 과정에서 불법성을 노출했다”고 포문을 열었다. 남북고위급 첫 예비회담이 열리는 날 고춧가루를 뿌린 셈이었다.
 
야당인 민주당까지 가세했다. 2월9일 김재광 국회부의장이 5공 비리 용의자인 아산이 “치외법권 대북접촉을 했다”면서 “나라꼴이 뭐냐”고 비난했다. 11일에는 아산과 북한이 합의한 내용을 두고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면서 공산권에 대한 문호 개방은 “자유민주주의체제 신봉자들의 가슴을 분노케 한다”는 질의서를 국무총리에게 보냈다.
 
노태우 대통령이 시민들과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최재영 사진사가 촬영했다. 노 대통령은 남북경협(경협)과 북방정책 추진 의지를 나타냈으나 여야를 망라한 수구적 반북론에 휘둘리면서 리더십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사진/뉴시스
 
실리를 통해 한반도의 냉전을 넘어서자는 경협을 부정하고 시대적 변화를 거스르는 수구적 움직임을 접하면서 아산은 조심스럽게 대응했다. 먼저 김일성에게 “해롭게는 안할 것”이라는 노태우 대통령의 뜻을 전해 다행이라면서 자신의 방북이 대통령의 뜻임을 과시했다. 투자 안전을 위한 국제적 컨소시엄 사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원산조선소, 철도차량공장건설, 시베리아 공동 개발 등에 대해서는 북측과 합의한 것이 아니라 검토 의견을 교환했을 뿐이라고 한 발 물러섰다. 북한의 금강산개발계획이 “엉성했다”면서 동업자로서 피해야 하는 표현까지 썼다. 시베리아의 소금산과 코크스를 개발하여 중국에 수출하자는 북한 제안에 대해서는 자신과 소련상공회의소가 합의 당사자여서 검토하겠다는 답을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4월로 계획된 재방북을 낙관하면서 북한과 합의한 내용에 정부가 “변화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자유기업론 입장을 강하게 표명했다.
 
그러나 역사적 전환기에 남북경협-북방정책에 대한 노태우 정부의 철학과 추진력은 취약했다. 정치, 군사 분야를 제외한 분야에서 다각적 교류를 내세우던 정부가 먼저 정경분리 원칙을 부정했다. 경협과 북방정책 자체를 사실상 부정하는 정치논리였다. 강영훈 총리는 시베리아개발 남북 공동 진출은 체제가 다른 국가 간의 합작 투자이고, 원산 조선수리소나 철도차량공장 합작 추진은 안보문제가 있어 부정적이라고 말했다. 남북대화와 경협에 적극적 의지를 보이는 등 1989년 전반기까지 계속된 대외 관계에 대한 북한의 자신감이 베를린장벽 붕괴(1989년 11월)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세스크 총살(1989년 12월) 등 동유럽 변화의 태풍 속에 움츠려든 것도 큰 장애로 작용했다. 결국 첫 방북으로 어렵게 합의했던 경협은 1989년에 아무런 진척도 보지 못했다.
 
1990년 들어 상황은 다소 호전되었다. 노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1990년 1월10일)에서 북한에 관광자원 공동 개발을 제의했다. 2차 방북이 막혔던 아산은 이에 북한이 호응하면 4, 5월 경 방북하여 1년 전 합의사항에 대한 후속 조치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2월에도 북한과 합의한 5개 사업은 “양국 정부가 승인”하여 “효력을 발생”한 사업임을 상기시켰다. 정부도 현대의 2차 방북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1990년 9월부터 연말까지 3차에 걸쳐 남북고위급회담이 진행되었고 1991년에도 남북고위급회담(4차: 1991년 10월22~25일, 5차: 1991년 12월10~13일)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수구적 반북론에 휘둘리면서 남북 관계를 풀어가는 리더십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쉽게 성과를 낼 수 있고 남북 관계 개선의 기반도 다질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었다. 결국 북한에 적극 제안했던 경협을 국내 정치의 틀 안에 종속시켰다. 급기야 아산은 1990년 11월 관훈 토론회에서 “미래를 맡길 정치 지도자가 없다”면서 정치권에 ‘강타’를 던졌다. 1991년 들어 9월까지 강연과 방송 출연 횟수가 30여 차례나 되었고 그의 정치 참여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 사이에 정부는 경협 창구를 대우그룹의 김우중으로 바꿨다.
(김우중은 김달현 정무원부총리 초청(1991년 12월25일)으로 1992년 1월15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후 기업인 중 최초로 방북했다. 베이징-단둥-신의주를 거쳐 기차로 평양에 갔다. 그는 “정무원 차원의 정부 초청”으로 방북한 자신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청으로 “개인 자격”으로 방북한 아산과 다르고 북한은 자본회임기간이 긴 중공업 분야나 대규모 합작사업보다 당장의 생필품난을 해소하고 수출을 통해 단기간에 외화획득에 기여할 수 있는 경공업 분야 전문가로서 자신을 초청했다고 설명했다. 김우중의 대북사업은 아산의 남북경협-북방경제권 연동 구상과 차이가 컸다. 노태우 정권 말기 대우의 경협 독점은 ‘6공비리’의 하나로 지목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아산은 소련이 해체되는 1991년 초에 “큰일은 다 때가 와야 하는 법”이라면서 “통독이 되고” “차우세스크가 참형을 당하는” 지금은 북한이 “집안 단속을 하는” 시점이어서 “금강산개발 등을 논의할 때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금강산개발이 1992년에는 “착수 가능”하고 “성공적인” 북방정책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좋아지면 “한반도에서의 전쟁위험성도 사라져” 북한도 금강산개발과 시베리아개발 등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1980년대 후반 한국 경제는 지가상승, 고금리, 금융비용 증가, 사회간접자본 투자 부진, 물류비 급증 등 고질적 문제에 봉착했다. 그러나 남북 관계를 변화시키는 리더십이 약했던 냉전적 국가권력은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무능” 했다. 노태우 정부 들어 박철언이 관장했던 대북정책은 1990년 이후 김종휘 외교안보수석과 서동권 안기부장 등이 주도하면서 남북대화와 북방정책의 내실도 말기로 가면서 축소되었다. 게다가 1992년부터 북핵문제가 국제 사회의 중요 이슈로 부상하면서 남북 관계도 경색 국면에 들어갔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정주영 후보가 대중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을 최재영 사진사가 촬영했다. 그는 “‘경제대국’과 ‘통일한국’을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대선에 출마했다. 사진/뉴시스
 
어렵게 북한과 합의한 경협 추진이 완전히 가로 막히자 아산은 1992년 “‘경제대국’과 ‘통일한국’을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대선에 출마했다. 아산은 지금까지 통일정책과 남북교류는 정부의 “정략적” 차원에서 추진되었지만, 통일정책의 중점은 민간경제 교류를 통한 “한민족 경제생활권 확보”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선 후보로서 그의 대북정책 공약은 ‘연방제’나 ‘국가연합’과 같은 통일방안의 추상적 미래상보다 실행 가능한 실리적 남북 관계 접근 방식을 집약한 것이었다. 통일은 현실에서 국민들이 구체적으로 접해야 하고, 흡수통일 추진은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 전제 위에 남한 경제력 건설 → 북한 호용 → 경제적 단일시장권 형성 → 경제공동체 이룩 → 정치통일의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최우선 과제는 “경제적 단일시장권”, 즉 “한민족경제생활권”의 형성이었다. 남북경협-북방경제권을 연동한 경제공동체 통일론을 철저하게 윈-윈(남한의 자본과 기술+북한의 노동력)하는 실리적 거래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북한과 대화를 추진한다면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사회주의의 좋은 점은 수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했다.
 
김영삼 정부는 노태우 정부의 통일방안을 계승하여 3단계(남북연합 → 남북연방 → 남북통일 단계) 통일 과정을 제시하고 남북정상회담 개최까지 합의했다 그러나 통일국가는 자유민주주의국가여야 한다는 흡수통일론으로 귀결된 대북정책은 결국 김일성 사망 후 ‘북한 붕괴에 대한 희망’에 가려 남북대화를 사실상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 사이 ‘무너져야 할’ 북한은 핵개발 이슈로 세계가 주목하는 ‘문제국가’로 부상했다. 김영삼 정권은 남북대화와 교류가 다른 때보다 오히려 절실했던 이 시기를 흘려보냈다. ‘공백의 5년’만 남겼을 뿐 일관성 없는 대북정책은 결국 한반도 문제해결 과정에서 한국의 주도권까지 약화시켰다. 주관적 명분에 치우친 대북정책이 명분도 실리도 잃는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먹고 있는 모습을 최재영 사진사가 촬영했다. 김 대통령은 노태우 정부의 통일방안을 계승해 남북정상회담 개최까지 합의했으나 통일국가는 자유민주주의국가여야 한다는 흡수통일론을 고수해 남북대화를 사실상 포기했다. 사진/뉴시스
 
1989년 아산의 첫 방북에서 합의된 경협이 바로 착수되었다면 이후 남북 관계나 국제 환경을 주체적으로 돌파하는 한국의 능력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반복된 산 경험이 해결 능력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에 대한 금융 통제 등 김영삼 정부의 정치 보복을 불러 온 아산의 대선 출마도 어쩌면 없었을지 모르겠다.
(자료: 실리적 남북경협 - 아산의 탈이념적 구상과 실행,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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