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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과 남북경협)내외적 악조건 속에 추진된 남북경협
(8)분단리스크 축소와 정상회담 가교 역할 맡아
2018-09-08 12:48:17 2018-09-08 12:57:54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외국 신용평가사들이 지적하는 한국 신용 등급의 최대 불안요인은 분단리스크다. 기업이 실제 가치보다 낮게 평가되는 것 또한 분단 비용이다. 그런 점에서 소떼방북과 경협 추진이 주식시장에서 긍정적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1차 소떼방북 직후 동해안 잠수정 침몰 사건 발생으로 주가가 급락했지만 2차 소떼방북 직후에는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김정일의 만남이 성사됐다는 소식이 나오면서 주식이 급등세를 보였다. 1999년 6월15일 ‘서해교전’ 발발 시에도 전날보다 2.2% 하락했으나 이튿날 3.2% 상승하며 낙폭을 바로 만회했다.
 
이는 국제 사회가 금강산 관광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북한의 변화를 평가한 결과였다. 나아가서 외국 자본의 투자 유치를 촉진하여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 북한 또한 남북경협(경협)을 통해 국제적 이미지를 제고하고 국제 사회에 개방의 기대감을 심어줬다. 경협의 활성화가 한반도 평화의 기반을 조성하고 그것이 다시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선순환 관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2007년 7월 18일 오후 18일 오후 온정리 문화회관에서 열린 금강산관광 9돌 기념식에서 윤만준 현대아산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금강산 관광은 10주년을 맞은 이듬해 관광객 북한군의 고 박왕자씨 피습사건으로 중단됐다. 사진/뉴시스
 
한국 사회의 보수를 상징하는 재벌 총수가 연출한 소떼방북과 이를 계기로 시작된 경협은 적대적 반북론에만 의지하던 보수 세력에게 자신이 추구하고 지켜야 할 가치를 정립하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미국의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조차 반대하기 어려운 강한 명분과 의미로 각인되었다. 나아가서 분단을 고착시키기만 할 뿐인 수구적 비판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혀 맹목적 이념에 따라 거대한 실리를 부정했던 남북의 사회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1차 소떼방북 후 북한의 도발적 행동에 대해 한국 사회는 비난 여론으로 들끓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7월15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안보보방회의에서 “만약 햇볕론이 북한을 이롭게 한다면 북한지도층이 왜 북한 붕괴음모라고 비난하겠냐”고 지적했다. 정부 고위인사들도 “북한이 햇볕정책을 두려워한다”, “북한의 틈새를 파고들기 위한 전략”, “햇볕은 따뜻하게 감싸기도 하지만 음지 구석구석에 있는 약한 균들을 죽이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그러자 북한 ‘로동신문’은 햇볕정책이 “외세와 작당하여 북의 사상과 제도를 침식하고 나아가서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시민지 통치를 우리 공화국까지 연장하겠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반공화국, 반통일대결론”, “북남관계 개선과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가로막고 상대방을 해치기 위한 술수”리는 등의 비난 논평을 쏟아냈다.
 
금강산 관광은 이런 불협화음 속에서 어렵게 시작되었고 6·15 공동선언으로 남북 핫라인이 개설되기 전까지 남북의 가교 역할을 했다. ‘살얼음 위를 걷는’ 남북 관계가 자칫 악화로 치달을 위험을 막는 완충 역할을 했다. ‘서해교전’ 발발 시에도 통일부 장관 임동원은 현대를 통해 북한에 긴급 접촉을 제안했고, 북한 역시 현대를 통해 “금강산 관광 사업은 민족문제이므로 정상적으로 추진하자”는 답을 보냄으로써 금강산 관광선이 예정대로 출항되어 사태를 진정시켰다.
 
이후 김대중 정부는 경제 교류를 기반으로 한 남북 관계 개선에 속도를 냈다. 2000년 3월10일 ‘베를린 선언’은 남북 정부 간 대화 및 경협 확대 의사를 밝혀 정상회담과 남북경제공동체 수립 방안을 제시했다. 박지원과 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아태) 부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만나 정상회담 추진에 합의하는 자리에도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가교 역할을 했다. 물론 현대로서도 북한과 합의한 대규모 프로젝트 성사를 위해 조속한 남북정상회담 성사가 필요했다.
 
소떼방북은 이념적, 정치·경제적으로 북한 사회에도 개방의 영향력을 불어넣었다. 폐쇄된 사회에서도 지배층 내에 개방과 보수의 입장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아산은 일찍부터 개방 추진세력을 주목했다. 이미 첫 방북 직후에 “저와 협정을 체결한 북한 사람들은 (···) 합영법이라는 것을 ‘북한인민위원회’에서 통과시킨 사람들이다. 북한에도 (···)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상당이 많이 숨죽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개방에 적극적인 김용순 등과 접촉해 경협을 전개했고 그들 또한 아산의 방북을 매개로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김용순은 1차 소떼방북 당시 아산에게 김정일을 “다음 방북 때 만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개방을 추진하는 입장에서도 김정일이 아산을 직접 만나, 사업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군부 등 보수파의 견제를 완화시키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김용순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아태 라인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자료: 실리적 남북경협 - 아산의 탈이념적 구상과 실행,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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