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기자
(아산과 남북경협)이념과 실리 모두 추구한 유일한 기업가
(11-끝)‘남북-동북아 경제공동체’ 구상 영원히 기억돼야
2018-09-23 06:00:00 2018-09-23 14:28:58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80년대 초부터 북한을 포함한 공산권과의 경협을 통해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구상을 시도했다. 이 구상은 1989년 첫 방북을 거쳐 20년 가까이 축적된 가운데 1998년 세기적 이벤트, 소떼방북을 통해 비로소 실현되었다.
 
1970년대말 1980년대 전반기는 한국 경제가 새로운 성장 전략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중화학공업화 정책이 위기 징후를 보였고 1980년대 전반에는 마이너스 성장까지 보인 상황에서 아산은 저임의존 성장전략을 지양하고 현대그룹 주력 업종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공산권과의 실리적 경협을 주목했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아산은 1988년 11월과 12월 일본과 미국의 건설회사들과 컨소시엄 또는 시베리아 공동 진출안을 협의했다. 1989~1990년간에 여섯 차례나 소련을 방문한 그는 투자위험 분산을 위해 100만 달러 규모 이하의 석탄, 목재 산업 분야에서 미국 등과의 합작 투자가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아산은 소련과 중국에서 자원 조달, 생산기지 이전과 현지 노동력 사용, 가스관이나 송유관으로 연결된 남-북을 축으로 한 북방경제권, 동북아경제공동체 건설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남북경협이 필수적이었다. 자본의 생산력 저하라는 위기 앞에서 냉전해체의 시대적 변화를 유리하게 활용하고자 한 실리주의자 아산에게 남북경협-북방경제권의 연동은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지렛대였다.
 
1980년대 후반 한국 경제는 지가상승, 고금리, 사회간접자본 투자 부진, 물류비 급증 등으로 새로운 전기의 마련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현대 역시 자동차·전자·석유화학 부문 등을 주력 업종으로 선정하고, 이전까지의 주력 업종인 건설·중공업 부문에 대해서는 구조조정을, 저임금·노동집약산업인 고선박 해체, 컨테이너 생산, 목재 등은 퇴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조응하여 새로운 투자전략 대상으로 북한을 주목한 아산은 1987년경부터 대북접촉을 시도했다. 1989년 1월23일, 전 국민의 가슴을 설레게 한 10일간의 첫 방북은 자유기업론자로서 적극적으로 ‘북한 열기’를 시도한 것이었다. 이때 금강산 공동개발, 원산철도차량공작소와 원산조선소 합작 투자 및 생산과 시베리아 석탄 및 암염의 공동개발 등 5개 사업에 대한 의정서를 체결했다. 특히 군사분계선을 통과해야 “합일로 나아가는 출발의 상징”인 금강산 관광의 의미가 산다는 아산의 정치적 감각은 경제적 타산 못지않았고 결국 관철되었다.
 
그러나 아산이 방북에서 돌아오자마자 색깔론이 부상하여 경협의 거대한 실리를 가로막았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경협-북방정책에 대한 철학과 추진력이 취약했고 스스로 정경분리 원칙도 부정했다. 북한이 동구변화의 태풍 속에 움츠러든 것도 큰 장애였다. 1992년부터 북핵문제가 국제적 핫이슈가 되면서 남북관계도 경색되었다. 1992년 대선에 출마한 아산의 대북정책 공약은 남한 경제력 건설 → 북한 포용 → 경제적 단일시장권 형성(경제공동체) → 정치통일로 다가가는 과정을 정리했다. 실리적 윈-윈 거래에 근거한 민간경제 교류를 통한 남북경협-북방경제권을 연동한 ‘한민족경제생활권’ 확보에서 출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 시기의 흡수통일 대북정책은 남북관계에서 ‘공백의 5년’을 초래했다.
 
1998년 6월 23일,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8일간의 소떼 방북 기간을 마치고 귀국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권 교체가 결정된 1998년 2월 아산은 다시 북한과 접촉하면서 경협 논의를 재개했다. 그리고 6월, ‘세기의 목동’은 대북 리스크를 깨는 상징적 이벤트로 소떼 500마리를 몰고 분단의 상징 판문점을 넘었다. 북한과 금강산 관광 사업, 승용차 및 화물자동차 조립 공장 건설·수출, 자동차 라디오 20만대 조립, 고선박 해체 설비 및 압연강재 생산공장 건설, 제3국 건설현장 공동 진출, 공업단지 조성, 통신사업 등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다.
 
그러나 9년 전의 악몽이 되풀이되었다. 아산이 방북에서 돌아오기 전날 북한 잠수정이 예인되고 7월에는 무장간첩 시체 1구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북한이 8월에 ‘광명성 1호’를 발사했다. 아산은 10월, 소 501마리와 현대가 생산한 승용차 20대를 몰고 다시 판문점을 넘었다. 결국 김정일로부터 금강산 일대 8개 지구의 독점개발권 및 사업권을 보장받았다. 1998년 11월18일 마침내 금강산 관광선의 첫 출항이 이뤄졌다.
 
아산의 북방경제권 구상이 시베리아 목재 등 자원개발에서 시작되었다면, 남북경협은 관광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경협을 통해 수익을 얻으려면 남북 관계가 안정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평화산업인 관광 사업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소떼방북과 금강산 관광은 주식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고 국가 신용 등급의 최대 불안 요소인 안보리스크 축소에 크게 기여했다. 경협 활성화로 한반도에 평화의 기반이 조성되고 그것이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선순환 관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또 소떼방북은 개방에 적극적인 북한 인사들이 영향력을 키우는 조건을 만들어줬다.
 
1989년 아산의 첫 방북 때, 김일성 생존 시에 경협이 시작되었다면 이후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10년 가까이 늦게 경협이 추진될 무렵 한국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하에 놓였다. 당시 재계는 대북투자에 필요한 법적 제도의 미비를 떠나 고금리, 자금난, 상호 빚보증 해소, 부채 비율 축소, 외채 상환 등 급한 불부터 꺼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경협 추진의 ‘가장 큰 걸림돌’인 미국의 대북경제제재가 있었다.
 
현대그룹도 구조조정과 빅딜을 피할 수는 없어 그 과정에서 살아나지 못한 계열사가 맡기로 한 경협은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특히 그룹의 모기업이자 경협의 주축이었던 현대건설의 위기가 심했다. 현대건설은 결국 아산 사후 2001년 5월, 채권단 출자전환으로 그룹에서 분리되었고 현대자동차는 수익성이 없다면서 경협 계획에 포함되어 있던 자동차조립공장 건성 참여도 거부했다.
 
초기의 경협은 당장 수익을 내기 어렵고 당국이 풀어야 할 안보리스크를 기업이 안는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공공사업’ 성격을 띤다. 따라서 정부의 보호장치 제공은 필수적이다. 정부는 현대에 경협을 독려하고 언제나 현장에서 개입했으면서도 자금난에 봉착했을 때는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여기에 보수 세력은 현대그룹 위기가 “무모한 대북투자”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현대그룹이 IMF 사태 이후 8개 부실기업 인수 과정에서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되었지만, 현대건설 부채 금액 중 금강산 관광 투자액은 1.6%에 불과했다. 경협이 위기를 불러왔다고 하기는 어렵다. 부도의 결정적 원인은 그룹의 금융거래를 끊다시피 한 김영삼 정부의 정치보복과 이라크 미수금 때문이었다.
 
아산이 소떼방북 시 합의한 사업 중 실현된 것은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이었다. 개성공단은 아산이 20여 년간 구상했던 실리적 공산권 경협론의 중요한 성과였다. 우여곡절 속에서 2004년 12월15일 개성공단의 공장이 가동되어 제품 생산이 시작되었다. 분단국가 56년 만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북한으로서는 개방하기 어려운 최전방 개성 지역을 특구로 설정한 것은 북한도 개성공단이 큰 실리를 안겨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임금과 지대의 상승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한계기업들이 늘어나 중국과 동남아 등으로 진출했고 그 결과 국내 고용사정 악화 → 내수시장 축소 → 생산 저하 → 실업증가의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이나 동남아 진출도 어려워졌고 진출했던 기업들마저 철수하는 상황이 되었다. 개성공단은 이러한 중소기업들에게 활로를 열어줬다. 개성공단은 단순교역이나 위탁가공의 초보적 수준을 넘어 직접투자를 통해 실리적 이해관계를 아우르면서 대규모 인적·물적 왕래를 수반했다. 개성공단은 경협 → 평화 → 실리, 즉 평화와 경제의 선순환 관계를 상징한다.
 
“근본적으로 이성적 실리적” 사업가인 아산이 추구한 ‘꿈’은 어느 일방이 흔들 수 없는 실리적 이해관계가 두텁게 얽히는 남북-동북아 경제공동체였다. 평화와 통일은 당사자들이 실질적 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접점이 넓을 때 굳어질 수 있다. 소떼방북과 경협은 이 가능성을 연 것이다. 현대그룹 전 계열사가 대북사업계획서를 짤 정도로 현대의 업종 특성을 반영한 기업의 실리와 민족사적 명분을 조화시킨 아산의 남북경협-북방경제권 연동 구상은 이념적 ‘명분’에 지배된 남북 관계를 과감하게 벗어난 큰 ‘실리’ 셈법의 산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산은 결코 진보적일 수 없는 재벌이었지만 이념에 갇혀 실리를 부정하는 ‘무지한’ 극우파와 구별된다. 아산이 첫 방북을 할 무렵 중국 시장으로 대거 진출한 대만기업의 경우를 보면, 그의 기획은 기업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기업인이 혼자였다는 점이다.
(자료: 실리적 남북경협 - 아산의 탈이념적 구상과 실행,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