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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태의 경제편편)‘신의 채찍’ 이 뜬다
2018-10-10 06:00:00 2018-10-10 09:26:21
행동주의 펀드로 알려진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최근 현대자동차그룹을 향해 지배구조 개편을  다시 압박했다. 주주가치 제고와 구조 개선을 위해 일부 핵심 계열사를 합병하라고 촉구했다는 내용이다. 보도에 따르면 엘리엇은 지난달 14일 현대차그룹에 편지를 보내 현대모비스의 애프터서비스(AS) 부문을 현대자동차와 합병하고, 현대모비스의 모듈과 핵심 부품사업을 물류업체 현대글로비스와 합치는 방안을 제시했다.  
 
구체적인 사업 개편 방안까지 내놓으며 이래라저래라 하는 엘리엇의 행위에는 오만함이 묻어난다. 그래서인지 엘리엇의 요구에 같은 미국계 펀드인 블랙록이 반대의사를 표시했다고 한다. 현대차그룹도 거절했다. 엘리엇은 지난 5월 현대차그룹이 내놓은 지배구조 개편안을 무산시키면서 힘을 과시한 바 있다.  
 
삼성도 공격을 받았다.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논란에서도 앞장서서 반대했다. 엘리엇은 당시 삼성의 합병계획이 안고 있는 허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며 맹공격했다. 비록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성사됐지만, 그 결과 주지하다시피 많은 희생자를 냈다. 또 엘리엇은 ISD 소송을 제기하는 등 최근까지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엘리엇의 행동은 좋게 말하면 과감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경계를 해야 한다 생각하면서도 미워할 수는 없었다. 삼성의 합병안이 워낙 무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한화증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증권사와 기관투자가들이 침묵하거나 삼성을 편들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엘리엇은 이런 침묵의 카르텔을 뚫고 합병안의 허점을 파고들면서 반대 여론을 이끌었다. ‘신의 채찍’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국내 투자자와 전문가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아울러 왜 국내에는 그런 ‘용기 있는’ 펀드가 없을까 하는 의문을 자아내게 했다. 
 
국내에도 이와 비슷한 사모펀드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엘리엇처럼 움직이는 곳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 열쇠는 바로 규제에 있다. 국내에는 사모펀드 제도가 2004년 도입됐지만, 지금까지 규제 때문에 힘을 쓰기 어려웠다. 기업 경영에 ‘참여'하려면 대상 기업의 의결권 지분을 10% 이상 보유해야 한다는 이른바 ’10%룰‘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모펀드가 대기업을 상대로 지배구조 개선이나 기업가치 향상을 위한 경영 감시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다. 기업이 아무리 상식에 벗어난 결정을 하고 기업가치에 해로운 짓을 해도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이런 과도한 규제는 아마도 국내 재벌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해 주기 위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재벌의 경영권은 순환출자나 계열금융사 의결권 등 여러 형태로 보호돼 있다. 거기에 더해 ‘신의 채찍’ 역할을 할 사모펀드의 손발까지 묶어놨다. 그러니 엘리엇 같은 행동주의 펀드가 등장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사모펀드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반면 외국계 펀드는 이런 규제가 없었다. 따라서 적은 지분만 가지고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닐 수 있었다. 엘리엇이 삼성과 현대차그룹을 향해 공격적인 행보를 보일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런 역차별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정부가 사모펀드에 대한 규제를 없앤다는 소식이다. 금융위원회가 지난달 27일 발표한 제도 개선안의 골자는 사모펀드가 적은 지분으로도 경영에 적극 참여할 수 있게 규제를 풀겠다는 것이다. '한국판 엘리엇'을 키우겠다는 정책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국내에서도 행동주의 펀드가 활성화될 것으로 하이투자증권은 내다봤다. 국내 사모펀드도 ‘신의 채찍’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전망이다. 
 
사실 사모펀드는 경영 감시만 하는 게 아니다. 시중 부동자금을 산업자금으로 흐르게 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때로는 외국자본에 넘어간 국내기업을 되찾아오는 주체가 될 수도 있다.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은 사모펀드 활성화를 통해 부동산에 몰려 있는 부동자금을 자본시장이나 기업금융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사모펀드는 우주의 행성이나 소행성과 유사하다. 행성과 소행성은 우주에 떠도는 먼지와 가스를 끌어당겨 질서를 형성했다. 마찬가지로 사모펀드도 우주의 먼지와 가스처럼 떠도는 부동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시중자금의 흐름을 유익한 방향으로 돌려놓으며 건전한 기업 지배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    
 
사모펀드는 규제를 받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순자산은 2015년 말 200조원에서 지난달 323조원으로 급증했다. 이제 규제도 풀린다고 하니 ‘신의 채찍’ 역할을 제대로 해주기를 기대해 본다.
 
차기태 언론인(folium@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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