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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17화)야학 120년의 세월
“헌책 몇십권 가지런히 꽂혀 있는 / 야학의 방”
2018-12-17 08:00:00 2018-12-17 08:00:00
중학교 국어교과서에서 만날 수 있는 심훈(1901~1936)의 <상록수>는 학교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러시아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이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이다. 야학활동을 하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죽게 되는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은 최용신(1909~1935)으로 알려져 있다. 협성여자신학교 학생이던 그녀는 1929년부터 YWCA의 농촌계몽사업에 참여했고, 1931년 농촌마을인 샘골(현 안산시 상록구 사동)로 파견되어 아이들에게 한글·산술·재봉·성경 등을 가르치다가 과로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상록수'에 나오던 야학 활동은 120년의 세월을 건너 현재까지 그 뿌리가 이어지고 있다. 충북 단양군의 단양야학에서 주경야독 해온 늦깍이 학생 7명. 이들은 야학으로 꿈에 그리던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다. 사진/뉴시스
 
야학의 태동
야학(夜學)은 단순히 문자 그대로 낮에 학교에 가 공부하지 못하는 이들이 ‘밤에 공부’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초등교육을 했던 야학이 주간에 실시되었고 문해(文解)교육도 주간·야간에 상관없이 이루어졌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야학은 낮·밤의 문제가 아니라 정규교과과정을 이수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제공된 배움의 기회였고 또 다른 교육이었다. 
 
한국 야학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정리한 <한국야학운동사: 자유를 향한 여정 110년>(학이시습, 2009년)의 저자 천성호는 그 자신이 구로공단 봉제공장의 ‘시다’(보조원)로 출발해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가고 야학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자신의 경험과 오랫동안의 연구를 통해 야학운동사를 집대성한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의 야학이 한 세기 이상에 걸쳐 어떻게 교육·사회·문화운동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야학’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98~1899년 신문들을 통해서인데 주의할 점은, 홍화학교(<황성신문> 1898년 10월 25일)처럼, 야학이라는 명칭 속에 차후 학부의 인가를 받아 정규학교가 될 사립학교들도 혼재되어 있어 이들을 본래 의미의 야학과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권 교육에 속하지 않는 비정규학교로서의 야학들도 이때 형성되어 제도권 교육이 충분치 못한 상황에서 근대교육에 일조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야학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해나가는데, 여기에 인상적인 장면 두 가지가 눈에 띤다. 그 첫째는, 당시 일본어를 가르치거나 계몽운동의 성격을 띤 야학이 성행하는 가운데, 1907년 마산에 최초의 노동야학이 세워졌다는 점이다. 마산의 두 유지가 자금을 대고 청년 지식인들이 교사가 되어 노동자, 농민의 자녀들에게 조선어·일어·산술·한문 등을 무료로 가르치는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성격의 야학이 생긴 것이다. 마산노동야학은 1907년 ‘보통야학과’로 시작해 1910년 ‘노동야학’이 되었고 후에 ‘마산중앙야학교’로 개칭되었다. 두 번째 흥미로운 장면은 자강·계몽운동에 앞장서던 서북학회에 1908년 함경도 출신의 물장수들이 야학을 세워달라고 요청한 사실이다. 1908년 3월 ‘협성수상야학(協成水商夜學)이 세워져 협성학교 교사들이 국문·한문·산술·지리·역사·법률·위생법을 가르쳤다고 한다(천성호, 앞의 책, 77~81쪽).
 
'한국야학운동사: 자유를 향한 여정 110년'. 사진/학이시습·교보문고
일제강점기의 야학
일제강점기의 야학은 성인과 학교에 가지 못하는 무산 아동을 위한 문해교육, 초등과정의 교육을 주로 제공했다. 1910년대의 야학은 실력양성을 중시하는 자강운동, 애국계몽운동의 민족주의적 성격이 두드러진 반면,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야학을 통한 농민계몽운동과 소수지만 노동자·농민의 의식화를 위한 민중야학도 등장했다. 최초의 노동야학이 이름은 노동야학이어도 실질적으로는 농민들이 그 대상이었던 반면, 20년대 중후반부터는 노동자·농민의 정치의식화 교육이 강화된 야학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야학, 개량적인 문화운동의 성격을 띤 야학이 공존했고 이런 야학들은 이후 친일적인 관제야학으로 변질되기도 했다(앞의 책, 110~113쪽). 반면, 노동자·농민의 야학은 사회주의운동, 민족해방운동으로 연결되는 진보적 야학운동이라 할 수 있었다. 노동야학이 발전하면서 야학연합회와 야학연맹들도 조직되었다.
 
일제 식민지시대
무궁화나 심고
무궁화 노래나 지어 부르게 하다

조선 마지막 어중간한 문신이라
통역도 하고 원도 살다
국장도 하고
사절 노릇도 하다

소위 전환 국면이라
독립협회도 들어가고
황성신문도 펴내다
야학 교원도 하고
교장 노릇도 하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총 들고 나선 적 없다
그 이래 이 땅은 총 들어도 역적이고
총 안 들어도 역적이다
어허 무궁화 화단으로는
무궁화 화단으로는
그 무엇이랴

< … >
(‘남궁억’, 7권)
 
관료이자 교육운동가인 남궁억(1863~1939)은 시에서 묘사하듯이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특히 교육과 관련해서는 양양군수 시절이던 1907년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1910년부터 배화학당 교사를 시작해 1912년 상동청년학원 원장을 겸하면서 교과서와 역사책을 펴내는 등, 계몽·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상동청년학원은 상동교회의 청년회가 1904년에 만든 학교로, 상동청년회는 1906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해산되었지만 상동학원은 전문적인 교육을 제공했고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부설 야학도 설립해 운영했다. 
 
야학이 사회운동으로 발전해가자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 1929년 사립학교규칙 등을 이용해 야학을 탄압했는데, 노동야학뿐만 아니라 무산아동이나 부녀자들을 위한 야학까지도 탄압했다. 1928년 이후 관에 인가가 없다는 이유로 야학들에 폐쇄 명령을 내리기 시작한 일제는 1930년대에 야학에 대한 전면적인 폐쇄조치를 단행한다. 예를 들어, 1931년 함경남도 2700개의 야학이 대부분 폐쇄되고 1935년 3월 369개만이 인가를 얻어 남아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동안 폐쇄된 야학이나 운영자가 피검된 야학은 총 3000여 개 이상으로 대부분 1928~1934년에 집중적으로 이뤄진 일임을 학술연구들이 밝히고 있다(앞의 책, 129~133쪽).
 
1970~1980년대의 야학 그리고 현재
한국전쟁 이후 국가가 주도하는 한글강습소와 공민학교, 민간에서 설립한 야학이 꾸준히 문해교육과 초등교육 내용을 위주로 천막에서 진행되었다. 1960년대에는 1964년에 발족한 재건국민운동중앙회를 중심으로 재건학교들이 만들어져 야학의 역할을 수행했다. 국가 주도의 재건야학은 1970년대에 들어서 새마을학교, 고등공민학교, 야간학교, 직업소년학교, 산업체 부설학교와 산업체 특별학급 등으로 변형되었고 국가 주도라 해도 실제로는 거의 민간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에 비해 민간이 주도하고 민간이 운영한 야학으로는 검정고시야학과 생활야학, 빈민야학, 노동야학을 들 수 있다. 
 
저 70년대 10년 동안 광주의 순정이 시작되었다
헌책 몇십권 가지런히 꽂혀 있는
야학의 방
거기 들불야학
공순이 공돌이의 방
학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의 방
형광등 불빛 이따금 꺼졌다가 껌벅거렸다 다시 켜졌다

열다섯 혹은 옹기종기 서른한 명
밤마다
그들을 가르치던 사람

< … >
('윤상원', 27권) 
 
광주의 ‘들불야학’은 1978년 설립되어 1981년 문을 닫은 노동야학으로, 야학의 구성원들은 광주민중항쟁의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지하유인물과 <투사회보>를 발행하면서 항쟁의 중심에 있었다. 들불야학 1기 강학이었던 윤상원은 시민군 항쟁지도부인 ‘민주투쟁위원회’의 대변인이자 〈투사회보〉의 발행인이었고, 그가 5월27일 전남도청 본관 2층 민원실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할 때 그의 옆을 지켰던―이후 체포되어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다가 세상을 떠난―시민군 기획실장 김영철도 들불야학 강학이었다. <투사회보>를 필경했던 그리고 5월27일 새벽 최후까지 싸우다가 YWCA에서 사망한 박용준도 들불야학의 특별강학이었고,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50일간 옥중단식 뒤 사망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도 들불야학 강학이었다.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관에서 들불야학 교장 출신으로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기획실장을 맡았던 고(故) 김영철씨의 부인 김순자 여사가 고인의 유품과 5·18 당시 사건 기록, 편지, 사진 등을 기증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백양로 연세대 문학동아리였다가
이윽고 ‘70년대’ 동인
임정남과
아내 강은교
언제나 쌍둥이처럼 나와 있었다
그러다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시절
그 체포 미행 도청의 시절
일의 전반부는 그를 따를 자 없다가
일의 후반부는 다른 사람이었다

크리스찬아카데미 월간 <대화> 창간 이래
그 편집실
정치에 대해서
노동에 대해서
긴급조치 9호 시대의 문학에 대해서
그는 언제나 도망칠 각오로 일하고 일 저질렀다

어떤 일에도 그가 뒤에 있었다
심지어 한때의 연세동산 백낙준 옹 뒤에도
달동네 노동운동 야학의 뒤에도

빤히 뜬 두 눈은 뒷골목 어린이들의 눈이었다
곱슬머리
어디에도 남루가 없다
호주머니 속 단돈 5백원이
5만원이었다

< … >
(‘임정남’, 13권)
 
시인이지만 시를 쓰는 시간보다 민중운동가로서의 활동시간이 훨씬 컸던 시인,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신이자 1976년~1977년 월간 <대화>의 편집장이었고,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홍보국장이자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 1988년 ‘부산민족민주운동연합’ 의장이었던 임정남 시인의 다음 글들은 노동운동과 야학에 맺은 그의 인연을 짐작하게 한다 ― ‘청계노조 합법성 쟁취대회’(<현실과 전망> 1집, 풀빛, 1984),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현장> 2집, 돌베개, 1985).
 
1970~1980년대의 노동야학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발전에 기여한 역할은 대단히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동안 야학의 대세는 검정고시 야학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90년대에 빈민운동의 일환으로 대안학교와 공부방이 일어날 때에도 검정고시 야학은 활발했다. 초·중등교육의 의무화, 사회민주화의 부분적 달성, 해외 이주노동자와 외국인 배우자의 유입, 제도권 교육에서 소외된 장애인에 대한 관심 등 한국사회의 변화된 조건과 환경은 이제 새로운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형식의 야학운동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시대가 변화해도 소외된 이들이 필요로 하는 한, 그들에게 대안교육의 역할을 다하는 야학의 생명력은 끈질기게 유지되지 않을까.
 
노들장애인야학 학생 등 관계자들이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시청 신청사 앞에서 열린 노들장애인야학 '밥' 콘서트와 현장수업 두 번째이야기에서 무상급식을 요구하며 콘서트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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