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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기업지배구조, ‘연성규범’으로 맞춤형 처방할 때
법제도의 경직성 보완해 기업의 자율적인 선택권 보장
‘원칙준수 예외설명’ 원칙 적용으로 실효성도 확보해야
2019-01-14 08:00:10 2019-01-14 08:00:10
법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 법은 안정적이고 명확한 반면, 느리고 경직적이다. 제정은 물론 개정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려 정작 적용돼야 할 땐 빠르게 변화한 현실과 괴리되기 쉽다. 장기적 측면에서 강행법에 의한 규제는 필수적이지만, 그것만으론 역부족이다. 사회 곳곳에서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상의 특성이 다양하고 처해있는 환경이 불안정할수록 복합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기업에 대한 규제가 대표적이다. 기업의 규모, 성장단계, 업종 등은 쉽게 범주화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게다가 기업이 기반으로 하는 경제 환경은 국제 경제 동향이나 정세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일률적인 법의 적용은 과잉규제로 이어져 기업은 물론 산업 전반을 위축시킬 수 있다. 반대로 적절하게 규제해야 할 영역을 놓쳐 과소규제 문제가 발생할 위험도 있다. 법률로써 규제의 방향성을 설정하되 세부 법 적용 항목에 재량권을 부여해 법의 사각지대를 메꾸는 보완책이 필요한 이유다. 
 
연성규범, 기업 선택권 보장하며 효율적 규제 가능케 해
 
기업에 대한 효과적인 규제를 위해 ‘연성규범(soft law)’이 주목받고 있다. 연성규범은 법률로 대표되는 ‘경성규범(hard law)’과 대비되는 용어다. 둘을 구분하는 핵심 기준은 법적 구속력이다. 규범을 어겼을 때 공권력이 나서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경성규범에, 그렇지 않다면 연성규범에 가깝다. 언뜻 윤리나 도덕과 같이 추상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보다는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다. 연성규범은 법적 구속력이 없을 뿐, 일정한 기준과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주체들의 행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연성규범이 폭넓게 적용된 가장 보편적인 사례로 국제법이 있다. 국가들이 국제법을 어기더라도 공식적으로 제재를 가할 수는 없으나, 신뢰도 하락 등으로 인해 국제 관계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강제력을 갖는다.
 
획일성, 경직성 등 기업을 규제할 때 나타나는 경성규범의 한계를 연성규범으로 보완할 수 있다. 기업에게 준수해야 할 원칙을 제시하되 구체적인 사안은 기업이 선택해 적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기존의 경성규범과 연성규범이 조화한다면 시너지 창출이 가능하다.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사항으로 반드시 필요한 규제는 구속력 있는 법률에 의하고, 탄력적 대처가 필요한 사항은 연성규범으로 제시해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연성규범은 경성규범만 적용됐을 때의 한계를 유연하고 효율적으로 극복하는 대안으로 점쳐진다.
 
지배구조 선진국들, ‘원칙준수 예외설명’ 원칙으로 실효성 확보
 
해외에선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연성규범이 폭넓게 적용되고 있다. OECD는 1999년 OECD 회원국의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OECD 기업지배구조원칙’을 수립했다. 이 원칙은 경제적 효율성을 개선하고 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며 투자자의 신뢰 제고를 위해 제도적 기초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요 규정 사항은 ▲실효성 있는 기업지배구조체계의 구축 ▲주주의 권리 ▲기관투자자와 관련 기관의 역할 ▲이해관계자의 역할 ▲투명한 공시 ▲이사회의 책임 등이다.
 
OECD 원칙의 1장 ‘실효성 있는 기업지배구조 체계의 구축’ 부분에서 ‘원칙준수 예외설명(comply or explain)’ 방식의 도입을 권고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칙준수 예외설명’ 원칙이란 기업이 원칙적으로 모범규준을 ‘준수’하되, 예외적으로 준수하지 않을 경우 그 이유를 이해 관계자에게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회사나 투자자 혹은 이해관계자에게 합리적인 규제가 다른 환경이나 상황에 놓여있는 주체들에겐 비합리적인 규제가 될 수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영국은 공시 의무에 의해 모범규준을 간접적으로 강제하는 ‘원칙준수 예외설명’ 방식을 최초로 도입한 국가다. 1992년 ‘Cadbury 보고서’에 도입된 이래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현재는 강제력을 높이기 위해 영국 금융감독청의 상장규정 안에 연성규범인 ‘원칙준수 예외설명’을 포함시켜 적용 중이다. 영국의 ‘원칙준수 예외설명’ 방식은 규제의 유연성과 신속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연성규범의 장점에 제도로 편입함으로써 사실상 강제력을 갖는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영국의 ‘원칙준수 예외설명’ 방식은 많은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영연방국가에서는 대체로 영국의 규준을 골자로 하는 모범규준이 채택됐다. 영국법계와 동떨어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대륙국가에서도 영국식 모범규준이 반영됐다. 영국식 모범규준의 효과에 대해선 장기적인 분석이 뒤따라야 하지만 당장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주주의 권리가 신장되고 이사회의 경영진 감독기능이 강화되는 등 지배구조 개선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은 ‘원칙준수 예외설명’ 방식과 더불어 ‘원칙중심주의(principle-based approach)’를 강조한다. 회사의 업종, 규모, 사업특성, 기관설계, 환경 등에 따라 모범규준의 이행 형태가 달라질 수 있으며 회사가 처한 여건에 따라 기업지배구조와 관련한 전반적인 평가가라 선택해 구체화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원칙중심주의 하에선 추상적이고 대략적인 원칙으로만 규범이 제시되기 때문에 해석의 폭이 넓다. 개별 사정에 따른 유연성이 확보된 것이다. 일본은 연성규범 도입 후 기 비약적으로 개선됐다고 평가받는다.
 
우리나라 기업지배구조 OECDㆍ아시아 최하위권
 
우리나라에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활용된 연성규범에는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과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이 있다.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은 2014년 시행에 들어간 것으로 ▲사외이사 구성의 다양성 확보 ▲사외이사의 자기권력화 차단 ▲구체적인 CEO승계계획 마련 ▲지배구조 연차보고서 도입 ▲‘원칙준수 예외설명’ 원칙 도입 등을 골자로 한다. 이에 따라 금융회사는 2015년부터 지배구조 연차보고서를 공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슷한 내용의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이 2016년 8월 시행됨에 따라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은 폐지됐다.
 
현재는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이 연성규범을 활용한 대표적인 모범규준으로 꼽힌다.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은 지난 1999년 민간에서 상장회사의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글로벌 스탠더드에 준해 만들어진 연성규범이다. 다만, 준수 여부와 관련한 국가의 제재는 물론이고, 자율규제기관의 제재도 전무해 실질적 강제력이 전혀 없었다. 이후 2003년과 2016년에 개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국제 흐름을 충분히 반영하고 지배구조 개선에 있어 기관투자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이에 더해 한국거래소는 지난 2017년 3월 유가증권시장 공시규정 시행세칙을 개정해 ‘원칙준수 예외설명’ 방식의 기업지배구조 공시제도를 도입했다. 주주, 이사회, 감사기구 등을 포괄하는 10대 원칙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공시 항목이 추상적이라 기업이 스스로 공시 여부를 판단하기에 어려움이 따르고 이마저도 상당부분 자율에 맡겨져 있어 실효성이 떨어진다. 공시된 내용도 자유 서술식으로 기재돼 공시대상 주요 항목의 준수 여부를 핵심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11월 서울 마포구 경총회관에서 열린 법무부-한국경영자총협회 기업지배구조 관련 상법개정안 정책 간담회에서 손경식 경총 회장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한국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연성규범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국가로 분류된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경성규범 중심의 강력한 규제 체계다. 우리나라는 상장회사에 대한 규제가 주로 상법, 자본시장법, 상장규정, 공시규정 등 법령 중심으로 운영돼온 편이다. ‘금융회사 지배구조 모범규준’과 같이 기능이 중복될 경우 뒤늦게 제정된 경성규범이 연성규범을 제치고 살아남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구체적인 세부사항을 열거하거나 기준을 명시하는 방식으로 명확성을 우선시했으며, 준수하지 않았을 때의 법적 처벌 여부가 규제의 이행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두 번째는 기업이 연성규범을 이행해야 할 유인이 부족하단 점이다. 연성규범은 각 주체들에게 실효성있는 영향을 미치기 위해 자발적 의무들을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모범규준은 자율적인 선택을 보장하면서도 이에 따른 ‘설명’의 의무를 부과하지 않아 기업들이 굳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항목들을 공시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sian Corporate Governance Association)가 2016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평가대상 아시아 국가 중 기업지배구조 관련 평가에서 11개국 중 9위에 머물렀다. 회계 및 감사영역을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 같은 해 OECD가 각국의 기업지배구조 현황을 조사한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조사대상국 46개국 중 유일하게 ‘원칙준수 예외설명’과 같은 규범 실행 메커니즘을 도입하지 않은 나라로 분류됐다. OECD 회원국 35개국을 포함하여 전체 조사대상 46개 국가 중 45개 국가는 ‘원칙준수 예외설명’ 방식에 따라 공시를 의무화하거나, 상장규정 등을 통해 연성규범 적용의 실효성을 높이고 있었다. 
 
원칙 중심 규제에 가이드라인 제시로 한계 극복해야
 
국내외적으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법적 규제의 경직성을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한국의 기업 가치가 불투명한 기업지배구조로 평가절하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문제가 외국인투자자 등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비재무지표인 ESG(환경, 사회, 거버넌스)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는 추세다. 이에 따라 기업들도 투명한 경영과 주주가치의 제고 등을 위해 자발적으로 지배구조 개선을 추진하는 등 업계 내 개선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러나 자발성에 기댄 개선엔 한계가 따른다. 사회적 요구를 수용해 제도적 개선이 뒷받침돼야 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은 연성규범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기업별 여건에 맞춰 유연한 적용과 집행과정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재규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선임연구위원은 “현행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은 상당히 세부적인 사항까지 열거하는 규칙중심방식에 가깝다”고 지적하며 “원칙중심방식으로 개선해 모범규준 자체는 명확히 하되 별도의 해설서나 가이드라인 등을 마련해 현장에서 참고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효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선 영국, 일본 등 선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원칙준수 예외설명’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현행 방식은 기업에 대한 강제력이 낮을뿐더러 공시된 정보에 대한 활용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원칙준수 예외설명’ 방식을 잘만 활용한다면 효과적으로 기업을 규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시된 자료를 가공해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선 절차적, 제도적 뒷받침이 전제돼야 한다. 준수 여부를 공시해야 하는 항목을 명확하게 하고 공시 보고서 양식을 마련해 기업 간 비교를 용이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해관계자들이 미준수 사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설명도 있어야 한다. 정 위원은 “올해부터 한국거래소는 유가증권시장 자산총액 2조 이상 상장기업에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공시를 의무화할 예정”이라며 “만시지탄이지만 우리나라 역시 Comply or Explain(원칙준수 예외설명) 실행 매커니즘을 도입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분석했다.
 
송은하 KSRN기자
편집 KSRN집행위원회(www.ksr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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