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스포츠계, 침묵의 계율 깨야
입력 : 2019-01-15 06:00:00 수정 : 2019-01-15 06:00:00
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우스 에셔(M.C. Escher)는 ‘서클 리밋 IV’에서 천사와 악마는 한 끗 차이임을 기발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국 빙상계에서 벌어진 성폭력 뉴스를 접하면서 에셔의 그림이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올림픽에서 메달리스트들은 포디움에 올라 메달을 목에 걸고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그 찬란함 뒤에는 지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요즘 폭로되는 빙상계의 성폭력 사건은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었던 심석희 선수의 생활을 보여준다. 빙상의 여왕으로 각종 대회에서 메달을 거머쥔 그녀였지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소식은 충격 그 자체다. 이게 사실이라면 그녀는 분명 빛과 어둠 속을 넘나드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물론 그녀의 코치인 조재범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러나 조 코치만이 범인인가.
 
아마도 성과 지상주의에 빠진 대한민국이 주범일지도 모른다. 메달을 따야 환호하고, 그렇지 않으면 온갖 독설로 린치를 가하는 우리 사회. 꽃다운 청년들의 인권이 유린당하든 말든 성적을 내야 박수를 보냈던 스포츠팬들. 이제는 제발 스포츠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 스포츠 자체를 즐기는 성숙한 사회가 돼야 한다.
 
물론 성과주의는 어디든 존재하지만, 우리는 너무 과도하니 문제다. 프랑스 AFP통신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스포츠계에 침묵의 계율(Omerta)이 있다. 그들은 폐쇄된 공간에서 자급자족하며 생활한다. 그리고 능력을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엄격한 훈련을 한다. 그 안에서는 육체적·언어적·성적 폭력과 성희롱 등이 일어나고 있지만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보도한다.
 
심리상담사 메리엄 살미(Meriem Salmi)는 “스포츠계에서는 혼잡함이 불가피하다. 성관계 등의 ‘일탈’이 이뤄지기 쉬운 환경이다. 코치와 선수 간 극도로 관계가 두텁다. 그들은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어쩌면 지켜야 할 거리를 상실한다. 선수들도 마찬가지로 1년 내내 함께 생활하고, 연습하고, 해외 전지훈련을 다닌다. 2013년 프랑스 유도계에서 한 여자 선수를 폭행한 사건은 선수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일들은 다른 세계보다 스포츠계에서 더 자주 일어난다”고 말한다.
 
지난해 4월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코치와 선수 사이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을 폭로했다. 젊은 여자선수 두 명이 고소한 사건으로, 각각 성추행과 성폭력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검찰은 수사를 착수했고, 프랑스체육연맹(Federation francaise d’athletisme·FFA)은 비공개로 윤리위원회를 열어 심의했다. 프랑스체육연맹 총괄본부장 프레데릭 사노르(Frederic Sanaur)는 방지책을 강화하는 한편 각 지역에 윤리 통신원을 임명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같은 조치 목적을 “다른 희생자들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며 “문제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고 감시하기 위해, 그리고 폭로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다. 우리는 실제로 가해자들에게 강경하게 대처할 것이다. 이 두 코치의 일탈은 체육계의 이미지를 더럽혔다. 체육계는 이미 약물복용으로 이미지가 실추된 상태다. 체육계는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와 비슷한 사건은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에 따라 2008년 2월 프랑스는 스포츠계의 성희롱과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헌장을 만들어 ‘성폭력’에 대한 정의를 규정하고, 스포츠계에서 일어나는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항할 관계자를 지정했다. 그리고 벽보, 광고물, 팸플릿, 카드 등을 만들어 캠페인을 벌이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전화도 설치했다.
 
우리도 빙상계의 이번 폭로를 절호의 찬스로 이용해 그 동안 불문율이었던 체육계의 문제를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 심석희 선수의 고발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체육계의 불편한 진실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도록 정부는 좀 더 적극적으로 대책을 강구하라. 이는 빙상계 만의 일이 아니라 체육계 전체의 일이다. 그리고 프랑스 경우에서 알 수 있듯 코치와 선수 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선수와 선수 간에도 일어날 수 있는 문제다. 이 점을 고려해 선수들 사이에서도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주목하고 파헤쳐라. 이번 일을 빙상계에 한정해 몇 사람만 처벌하고 만다면 우리 선수들의 인권유린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프랑스 심리학자 그레그 데샹(Greg Decamps)의 분석처럼 스포츠계는 외부와 단절되어 있어 상식을 벗어난 믿기 어려운 행동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희생자들은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하면 그룹에서 격리되고 선발에서 제외될 것을 두려워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피해 선수들이 두려움 없이 신고할 수 있는 전화를 설치하거나 각 지역에 윤리 통신원을 파견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시급하다.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sookjuliette@yahoo.fr)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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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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