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19화)연탄별곡
“그 연탄이 한국사람들 살려냈다”
입력 : 2019-01-28 06:00:00 수정 : 2019-01-28 06:00:00
안도현 시인의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1994)에는 연탄에 관한 연작시 세 편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너에게 묻는다’)가 그 첫 시이다. 그 밖에도 여러 시인들이 한 번쯤 연탄을 노래하게 된 이유는 반세기를 훌쩍 넘도록 서민과 함께 해 온 연탄에 그 세월만큼 삶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고 일상의 애환이 실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찬바람 불기 시작해 꽃이 필 때까지, 매일의 생활에서 뗄 수 없었던 우리들의 연탄은 이제 ‘에너지빈곤층’의 ‘생존에너지’로 불리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에서 연탄 나눔 사업에 참가한 봉사자들이 연탄을 전달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조선땅의 석탄과 연탄
 
대한제국은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한 에너지 자원으로 석탄 개발이 필요했기에 프랑스인 기술자를 고용해 평양탄광에서 채굴작업을 진행한다. 그러나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일본이 이를 중지시키고 1910년에 평양광업소를 설치해 평양탄광을 일본 해군 함대의 연료용 석탄으로 사용을 제한시켰다. 이후 ‘조선광업령’(1915)을 통해 광산개발권은 일본 자본에 넘어가고 조선의 광산자원은 일제 총독부의 관리 하에 수탈을 당하게 된다.
 
조선총독부는 1927년 ‘조선무연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평양일대의 탄전을 통합해 조선산 무연탄의 증산을 꾀했다. 미쓰비시(三菱)계가 주도하던 이 통합회사는 1935년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동척광업의 자본이 들어가면서 동척이 최대주주로 되었고, 1937년 이후에는 석탄 채굴과 판매 외에 철도 부설, 항만 건설 등 사업을 확장해 조선 무연탄의 일본 이송을 용이하게 했다. 조선 무연탄의 일본 이출비는 1912년 생산량의 73.4%, 1924년 68.2%, 1935년 55%로, 일본의 가정용 연탄제조에 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내 사용처는 국내에 진출한 일본기업의 공장 연료로 이용되는 게 대부분이어서 조선 가정의 난방 연료와는 거리가 멀었다. 1935년 국내 판매 무연탄의 74.9%를 조선무연탄주식회사에서 생산했다니 거의 독점했던 셈이다(김은정, ‘일제의 조선무연탄주식회사 설립과 조선 석탄자원 통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8, 339~370쪽, 2009).
 
1920~40년대 연탄과 관련된 신문기사들의 제목에서도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강서산(江西産)의 무연탄, 내지(內地)에 10만톤을 이출’(<매일신보> 1925년 3월13일), ‘경성부내 연탄의 소비고 이만여톤’(<매일신보> 1926년 2월4일), ‘경성연탄 소비고 삼만오천여톤’(<중앙일보> 1932년 3월24일), ‘강서무연탄광 채고 증가’(<매일신보> 1932년 12월20일), ‘경성내 연탄 공급 불원활’(<조선중앙일보> 1936년 1월25일), ‘명년 무연탄 수요 백이십만톤 예상…’(<매일신보> 1938년 12월11일), ‘가정과 문화 – 장작 배급이 준다 개량 아궁이로 무연탄을’(<매일신보> 1943년 6월25일).
 
이보다 앞서 대한제국이 선포되던 해의 신문광고도 흥미로운데, 옛글 원문을 현대어로 번역하면 이러하다. “진고개 산일상회에서 평양 석탄과 일본 석탄을 많이 무역하여 서울 용산 제물포에 지점을 벌이고 큰 장사를 하는데 그 상회에서 파는 석탄은 품도 좋고 값도 싸며 올해는 일본 석탄이 작년보다 비싼 고로 미리 주문하거드면 싸게 살 터이오 평양 무연탄도 풍범선으로 많이 실어다가 파니 누구든지 겨울에 쓸 석탄을 미리 와서 주문하시거드면 상등 석탄을 싸게 살 터이니 일기가 추워지기를 기다리지 말고 속히 와서 주문하시오 진고개 제이번지 산일상회 용산 산일상회 지점 제물포 산일상회 지점”(‘석탄광고’, <독립신문> 1897년 9월11일,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자료를 수정해 인용함. 이 광고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실렸다.)
 
연탄 전성기의 명암
 
한국전쟁 이후 연탄은 가정용 난방연료로 판매되기 시작한다. 1955년 생산된 ‘19공탄’이 주를 이루었지만 연탄구멍의 숫자는 다양했다. 구멍탄으로 불리던 연탄은 구멍의 개수에 따라 9공탄, 19공탄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1989년 1~5호까지의 연탄규격이 표준화되었는데 가정용으로 사용된 연탄은 2호였다. 연탄의 전성기가 시작된 1960년대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연탄가스 중독이어서 이는 숱한 목숨들을 앗아갔다. 자고 나면 ‘불귀객’이 되고 가족 단위로 비명횡사하는 실정이다 보니 오죽하면, ‘쇄도한 연탄가스 제독(除毒) 아이디어 현상금 1천만원’(<경남매일신문> 1968년 12월 1일)이라는 신문기사 제목에서 보이듯이, 1968년 말 서울시가 일산화중독이 되지 않는 연탄 연구에 100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이 기획은 실패로 끝나 연탄은 ‘살인탄’으로, 연탄가스는 ‘살인가스’로 불리는 오명을 쓴 채 1970~80년대에도 여전히 연탄가스 중독 사망자들을 낳게 된다. 
 
1958년 한국재건단의 지원을 받고 있는 강원광산공사 석탄 채굴 모습. 사진/뉴시스·국가기록원
 
청량리역에 가보아라
생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 것
생은 거룩한 영혼이 아닌 것
혼잡
문란
철면피
모든 시시껄렁한 불의와 부정부패가 정의의 시작인 것
 
청량리역 구내에 목재가 쌓여 있다
껍질째 목재
껍질 벗긴 목재
여기저기 와르르 무너지기 직전
장작더미도 쌓여 있다
 
강원도 정선 산골에서
중앙선 타고
서울 청량리까지 왔다
 
그뒤로 강원도 태백 탄광에서
무연탄이 실려왔다
태백 사북탄광
시커먼 무연탄이 실려왔다
청량리역 구내
무연탄 산더미 몇 개
그 연탄이 서울사람들 살려냈다
그 연탄이 한국사람들 살려냈다
긴 겨울 아랫목
잃어버린 고향이 있었다
이도 빈대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긴 겨울
언 몸 멍들지 않고
동상 걸리지 않고
피난 갔다 돌아온 지친 생 살려냈다
 
그러다가 스며든 연탄가스로 숨지는 사람 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김칫국 마시고
병원에 가서도 낫지 못하고
반신불수가 된 사람 있다
 
정릉 5동 비탈길
밤늦게 돌아오는 아버지
빙판에 넘어지지 않도록
연탄재 던져 빙판길 재를 깔아두었다
 
어허 우리 딸 심청이야 심청이야
< … >
(‘연탄재’, 18권)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지난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지만, 동시에 대한민국 사람들 대부분이 연탄 덕분에 추운 겨울에도 살아남았다. 석탄을 캐느라 막장에서 수많은 광부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뎌야 했고 사고를 당해 죽어갔지만, 동시에 나라는 그들의 희생을 딛고 산업화를 이루었다. 연탄이 가정의 난방·취사 연료로 상용화되면서 나무로 땔감을 마련하지 않아도 되게 되자 민둥산은 울창해지기 시작했다. 정부의 산림녹화정책에 크게 공헌한 존재가 가히 연탄이라 할 만했다. 연탄이 기여한 또 한 가지는, 1970년대 섬이었던 서울의 잠실을 개발할 때 부족한 흙과 모래를 보충해 강을 메운 것이 연탄재였다는 사실이다.
 
추위를 견뎌내는 생존수단이 연탄이었던 시절, 대한민국 국민들은 연탄파동도 겪어야 했다. 물가 인상률 동결을 위해 정부가 비현실적 고시가로 ‘가격 통제’를 실시했던 1966년 파동 때는 산지에 무연탄이 쌓여 있어도 공급이 되지 않아 몇 배의 ‘웃돈’을 주고 연탄을 사야 했던 데 비해, 1974년 파동 때는 1973년 오일쇼크의 여파로 기름값이 올라 연탄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실제로 연탄 공급량이 부족해진 상황이었다. 1974년 10월 시흥대교를 사이에 두고 서울과 접해 있던 경기도 시흥의 주부들이 대도시 우선의 연탄공급정책에 항의해 ‘연탄집게 시위’를 벌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연탄의 오늘
 
1989년부터 시작해 1990년대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탄광들이 폐쇄되고 연탄공장들도 하나둘 문을 닫았으며, 가구들은 연탄 사용을 기름보일러, 가스보일러로 대체하게 된다. 밥상공동체 복지재단의 연탄은행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7년 연탄사용가구는 14만여 가구로 전국 총가구수 대비 0.62%인데 2018년에는 14만5000여 가구로 잠정 집계되어 오히려 5000여 가구가 증가된 것으로 나타났다. 저소득층의 생활고가 심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산업통상자원부가 2018년 11월23일부로 연탄값을 개당 534.25원에서 639.00원(공장도 가격)으로 19.6% 인상함에 따라 연탄사용자들의 겨울나기는 더욱 힘들어졌다. 이에 따라 연탄 한 장의 소비자 가격은 660원에서 765원으로 15.9% 오를 것으로 추정된다는데 이는 서울 평지기준의 가격이고, 고지대인 도시의 달동네나 농어촌 산간벽지에서는 배달료를 포함해 900원이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 3년간 연탄의 소비자 가격(인상률)은 각각 2016년 600원(14.6%), 2017년 700원(16.6%), 2018년 800원(19.6%)이었다. 올 겨울에도 직장·단체에서, 혹은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독거노인들의 달동네에서 연탄나르기 봉사를 하고 연탄은행에 ‘사랑의 연탄’ 후원을 하지만, 매년 후원이 줄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가 심심찮게 보인다. 정부에 따르면, 연탄 가격 인상은 2010년 G20 서울 정상회의에 제출한 ‘화석연료 보조금 폐지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것으로, 정부가 생산자에게 지원하는 연탄 제조 보조금을 축소해 연탄값을 인상하는 대신 저소득층 연탄사용가구에게 지원하는 연탄쿠폰 금액을 31만3000원에서 40만6000원으로 상향조정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연탄은행전국협의회의 보도자료에 의하면, 2018년 연탄사용가구 14만5000여 가구 중 10만여 가구가 절대빈곤층으로, 이들은 고지대 달동네, 도시빈민지역, 농어촌에 기거하는 월소득 25만원 미만 평균 80세 이상의 고령자들이다. 연탄은행 조사에 따르면, 한 가구당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연탄 약 1,050장이 필요한데, 연탄쿠폰 40만6000원으로는 연탄을 400~500장 정도밖에 구입할 수 없어 600여장이 부족하다. 또한 정부가 지원하는 연탄쿠폰 대상자는 6만3000가구로, 절대빈곤층 10만여 가구에서 4만 가구 정도는 누락되게 된다는 것이다. 밥상공동체·연탄은행이 연탄가격인상 철회와 저소득층의 맞춤형 에너지복지정책 마련을 요구하는 이유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또한, ‘연탄가격 이원제’, 즉 에너지빈곤층의 난방용 연탄가격은 동결하고 사업자의 영업용 연탄가격은 인상하는 방식을 요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0.62%의 연탄사용가구에 속하지 않더라도, 연탄이 ‘생존에너지’인 누군가의 겨울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다음의 시구와도 상통하지 않을까.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 삶이란 / 나 아닌 그 누구에게 /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 < … >”(안도현, ‘연탄 한 장’) 
 
올해 1월23일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연탄사용 가구 시민들이 연탄가격 동결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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