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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97년생 최종근'은 죄가 없다
2019-05-29 06:00:00 2019-05-29 06:00:00
최한영 정치부 기자
#1.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욕망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욕망대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 사회 여성들이 겪었고, 겪고 있는 '욕망대로 하지 못하는 비극'은 책 82년생 김지영에 잘 나와있다.
 
소설 속 김지영은 다섯 살 어린 남동생의 분유를 얻어먹다 '입과 코로 가루가 튀어나오도록' 할머니에게 등짝을 맞았고, 라면을 덜어갈 때도 남동생이 남자라서 누리는 특혜를 감내해야 했으며, 사회생활 중 회식 자리에서는 남자 부장의 걸쭉한 19금 유머를 듣고 있어야 했다. 김지영의 어머니도 국민학교 졸업 후 상경해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로 들어간 월급을 벌었고 이후에도 문풍지를 말고, 출장미용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책을 쓴 작가 조남주의 "딸이 살아갈 세상은 제가 살아온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되어야 하고, 될 거라 믿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세상은 그래야 한다.
 
#2. 작가 김훈은 책 '연필로 쓰기'에서 칠곡·곡성·양양·순천 할매들의 글을 읽고 느낀 소회를 적었다. 그는 자신보다 5~10살 연상인 여성 노인들의 문맹률이 심했던 배경으로 "조혼, 육아, 남녀차별, 가사노동, 생산노동, 시집살이처럼 여성의 생애에 유습된 억압"을 꼽았다. 할매들은 일상의 노동에서 삶의 고난을 감당해내는 마음의 힘을 키웠으며, 생명을 가꾸고 키움으로써 스스로의 생명을 긍정했다.
 
긍정은 이타심으로 옮아간다. 강원 양양의 97세 이옥남 할매는 십 몇 년 전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 때 농사일을 하며 모아놨던 쌈짓돈 10만원을 성금으로 냈다. 할매는 그날 일기장에 "없이 사느라고 남의 신세만 지고 좋은 일 한 번 못해보고 그게 한이 돼서 조금이나마 보탰다" "텔레비전 보면 맨 속상하기만 하다"고 적었다. 할매의 마음은 10만원 이상의 무게로 다가온다.
 
#3.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해 9월 취임사에서 "우리 사회는 '함께 사는 법'을 잃었다. 여성과 남성이, 아동·청소년과 성인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큰 혼란을 겪고 있다"고 언급했다.
 
진 장관의 취임사에서 문득 '97년생 최종근'의 죽음을 대하는 몇몇 사람들의 반응이 겹친다. 지난 24일 진해 해군기지사령부 내 부두에서 열린 청해부대 최영함 입항 행사 도중 홋줄(선박 육지고정용 밧줄)이 끊어지는 사고로 고(故) 최종근 하사가 순직했다. 최 하사 순직 다음날부터 여성 우월주의 커뮤니티 워마드에 올라온 몇몇 글은 버나드 쇼가 지적한 '욕망대로 하는 것의 비극'이자, 극단적인 혐오에 다름 아니다. 이들의 철없는 행동에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느낀 미안함, 이옥남 할매의 따뜻함은 가려진다.
 
워마드에 해당 글을 올린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여성들의 권리 신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걸까. 글 작성자는 최 하사 여동생이 자신의 SNS에 쓴 "이제는 힘들게 말고 편안하게 있어줘"라는 추모글을 보면서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나. 82년생 김지영만큼이나 97년생 최종근도 죄가 없다.
 
최한영 정치부 기자(visionch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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