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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용기와 정치인
2019-06-18 06:00:00 2019-06-18 06:00:00
용기는 고대로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문명에서 영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요 덕목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플라톤은 용기를 신중, 절제, 정의와 함께 4대 기본 덕목으로 봤다. 타키투스는 "용기가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라고, 공자는 "의로운 일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용기는 인간의 삶에 있어 중요한 덕목임을 누구나 알지만,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요즘 우리 사회를 봐도 이를 절감한다. 특히 정치권은 더욱 그러하다. 의로운 일은 커녕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조차 없다. 3개월이 넘는 촛불시위 속에서도 국민 앞에 나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 한 마디 할 줄 모르고 사라진 박근혜 전 대통령. 숱한 인사실패를 반복했음에도 끝까지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청와대, 국회로부터 탄핵된 대통령을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은커녕 끝없는 막말 잔치를 일삼는 자유한국당 의원들…희망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의 이런 풍경과는 달리 지난주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한 정치인이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는 보기 드문 용기를 보였다. 그 주인공은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12일 국제노동기구(ILO) 100주년 기념행사 연설에서 프랑스 노란조끼 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의 위기대응에 대해 처음으로 메아 쿨파(mea-culpa·자기고백)를 했다.
 
그는 지난해 11월17일부터 프랑스를 흔든 노란조끼의 저항을 환기시켰다. 그러면서 "지난 몇 개월 매우 힘든 위기를 겪었다. 우리는 좋은 해법을 구축하지만 이는 때때로 국민과 너무 동떨어질 때가 있다. 나는 '중대한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부를 중심으로 지방정부나 기업들이 우리식(프랑스식)의 보다 친밀한 방식으로 변화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인간과 인간애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국민의 생활이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때 그들을 유인하려는 권위주의의 위협이 판을 친다. 우리가 겪는 위기는 전쟁이나 민주주의의 붕괴를 불러 올 수 있다. 두려움에 떨면 오인하고, 이는 피선거권이 없는 사람들을 흔들거나 유럽 탈퇴 운동을 부추기지만 그러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결론 부분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다시 한 번 "프랑스 국민이 강력하게 말할 때 나는 그것을 아주 겸손히 들을 줄 알고, 잘못한 일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을 중단하지 말고, 방법을 바꿀 줄 알고, 직관적으로 메시지의 깊은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로 연설을 마쳤다.
 
단지 프랑스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는 입에 발린 연설이 아니라 정책의 방법론이 잘못 되었음을 시인하고 언제나 국민이 옳다는 것을 자인하는 꽉 찬 내용의 연설이었다. 이런 고백을 대중 앞에서 한 마크롱 대통령의 모습에서 "용기는 남자도 여자도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는 영국 속담이 떠오른다. 모럴리스트(16~18세기 프랑스에서 인간성과 인간이 살아가는 법을 탐구해 수필이나 단편적인 글로 표현한 문필가) 보브나르그의 말처럼 마크롱 대통령의 용기는 "역경에 있어서의 빛"이 될 수 있다.
 
국내 상황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한국의 경기침체는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 물가는 치솟고 서민경제는 어려워져 간다는 아우성이 이어진다. 이 모두가 이번 정부의 탓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청와대는 "정책실패가 아니다"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프랑스를 소란스럽게 한 노란조끼 운동도 따지고 보면 2008년 금융위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니콜라 사르코지가 이끈 공화당 정부가 시작한 각종 개혁과 정보혁명으로 인한 고용의 불안정, 노동의 우버화(uberisation)로 인한 사회안전망 부실 등이 원인이 되어 국민의 분노를 산 것이다.
 
우리라고 해서 결코 이런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단지 우리는 아직 운이 좋을 뿐이다. 극한 상황까지 내몰리지 않아 노란조끼 운동 같은 집단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결코 안심할 수만은 없다. 따라서 우리 정치인들은 마크롱의 제노바 연설에서 배워야 한다. 물론 마크롱 대통령의 자기고백은 뒤늦은 감이 있어 조금은 애석하다. 하지만 그의 연설은 우리 정치인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먼저 국민 앞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기고백을 할 줄 아는 용기, 아무리 좋은 해법이라도 국민과 동떨어지면 '개발에 편자'라는 사실 등이다.
 
문재인정부는 이제 3년 차로 접어들었다. 남은 임기를 별다른 무리 없이 끌어가려면 청와대는 자기고백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국정을 수행하는데 완벽은 있을 수 없다. 잘못을 범하면 적절한 시간에 인정하고 국민의 협조를 구하면 된다. 이는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 하지만 진정한 용기가 있으면 가능하다. 이번 정부가 과거와 달리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싶다면 이 점을 제일 먼저 보강해야 한다.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sookjuliette@yahoo.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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