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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 29화)어떤 공존, 묘지 위의 마을
"망우리 공동묘지는 다시 묘지로 돌아갔다"
2019-07-01 00:00:00 2019-07-01 00:00:00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을 모시는 봉안당 문화가 확산된 지 오래지만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아직은 산등성이 이곳저곳에 자리 잡은 봉분들을 볼 수 있다. 망자들의 휴식처를 자연의 품속에 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이고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마을 뒷산에 조상 묘가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시골의 생활환경이 아닌 이상, 도시에서 성묘를 위해 산소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 먼 연례행사가 되기 십상이다. 이에 비해 추모공원, 묘지공원으로 불리는 공동묘지는 상대적으로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국내의 추모공원 국립현충원 전경. 사진/뉴시스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묘지공원으로
 
옛 사람들은 풍수지리를 따져 조상의 묘를 쓰고 공동묘지가 아닌 개인의 묘지, 집안의 묘지를 선호했지만, 선산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 토막민과 같은 도시빈민들의 사후 안식처는 어쩔 수 없이 공동묘지였다. 요즘은 추모공원으로 불리고 망우리 묘지공원처럼 공원의 형태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예전의 공동묘지는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도읍인 한성부(도성 사대문 안과 도성 밖 십리)에 묘를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도성 안 시체들은 광희문(남소문)과 소의문(서소문)을 통해 내보내져 한성부 밖에 매장되었다. 조선 말기가 되면서 한성부의 도성 밖 십리(‘성저십리’)에 공동묘지가 들어서게 되는데, 신당동, 아현동, 금호동, 용산 지역이 그곳이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농촌에서 올라온 도시빈민들의 주거지이기도 했다. 한편, 일본인 주거지 근처인 이태원과 장충동에도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가 형성되었다.
 
1920년대부터 경성으로 유입되는 인구가 증가하고 1930년대 일제의 ‘대경성계획’이 실행되면서 기존의 공동묘지 지역에는 ‘국민학교’들이 설립되었고 이태원·장충동은 일본인을 위한 택지 부지로 개발되었다. 이에 따라 공동묘지는 경성 외곽으로 이전되어 도심에서 미아리로, 미아리에서 다시 망우리로 옮겨가게 된다.
 
1933년부터 공동묘지의 역할을 충실히 해 온 망우리 공동묘지는 1973년 약 2만8500기에 이르는 분묘로 정점을 찍은 후 안창호 선생의 묘를 비롯해 대다수의 묘들이 이장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서민들과 함께 한용운, 방정환, 이중섭, 지석영, 문일평, 오세창, 최서해, 조봉암, 함세덕, 박인환, 계용묵 등 유명 인사들이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1998년 공원화작업을 완료하면서 ‘망우리 묘지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공동묘지가 지나온 긴 시간 속에는 한때 한국전쟁의 전투지였던 과거도 담겨 있다. 
 
지난 2017년 서울 중랑구 망우리 묘지공원 내 죽산묘지에서 열린 죽산(竹山) 조봉암의 58주기 추모제. 문재인 대통령 화환이 놓인 가운데 참석자들이 분향을 하고 있다. 조봉암 선생은 인천 강화도 태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해방 후 제헌 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 2대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사진/뉴시스
 
망우리 공동묘지는
서울의 저승
1950년 9월 30일
그곳조차
싸움터였다

6천개의 무덤들은 엎드려 있고
유엔군과
인민군은
무덤 사이
총탄 빗발치다가
서로 달겨들어
총검으로 찔렀다

전사자의 시체가
무덤 사이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 … >
벌초하지 않은 풀 깔고 나뒹굴었다

사투 1시간 15분
쌍방 시체 73구
이상

망우리 공동묘지는 다시 묘지로 돌아갔다
(‘망우리 묘지’, 16권)
 
비석 위에 세워진 집, 부산 아미동 비석마을
 
망우리 공동묘지는 묘지공원이 되었지만, 여러 공동묘지들은 죽은 자들을 위한 공간에서 집 없는 산 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어야 했다. 한국전쟁의 피난민들에게는 공동묘지에 천막을 치고라도 사는 것이 절박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부산 문현동 공동묘지의 무덤 사이사이에 집들이 지어졌고, 아미동 일본인 봉안당의 비석과 상석들은 피난민들이 짓는 집의 주춧돌이 되거나 집 입구의 디딤돌, 계단, 축대 벽의 일부가 되었다. 수십 년간 달동네로만 인식되어 온 이 마을들이 지금은 문현동 벽화마을로 거듭나고 아미동 비석마을로 불리며 관심을 받고 있다. 
 
1876년 부산포 개항 이후 용두산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용두산 북쪽인 복병산에 그들의 공동묘지를 만들었는데, 1905년 북항을 매축할 때 복병산에서 흙과 돌을 채굴하느라 공동묘지를 아미산으로 옮기게 된다. 1909년에는 다른 곳에 있던 화장장도 아미동으로 옮겨 왔다. 그런데 1945년 패망한 일본인들이 허둥지둥 귀국하면서 수습을 하지 못해 방치된 묘지들 위에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이 그대로 집을 짓게 된 것이다.
 
부산 서구 아미동에 있는 비석문화 마을. 사진/필자 제공
 
일본인들의 봉안당 경계석 위에 나무판자를 얹어 집을 만들면 묘와 묘 사이가 집과 집 사이의 골목이 되기 때문에 이 마을의 골목길은 매우 좁다. 미로 같은 비석마을의 좁은 길들을 조용히(주민들의 공간이므로 반드시 조용히!) 헤집고 다니노라면 벽, 바닥, 계단에 틈틈이 끼어 있는 비석이나 상석들을 이집 저집에서 볼 수 있다.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지워진 묘비 글자들 사이에서 ‘명치’(明治, 1868~1912) 몇 년, ‘대정’(大正, 1912~1926) 몇 년 같은 것들이 엿보인다. 
 
아미동 비석마을에 방문자들이 처음 들이닥쳤을 때 주민들은 몹시 당혹하고 불편, 불쾌했을 것이다. 고단한 세월의 흔적과 곤곤한 개인의 일상이 외부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사적 공간이 침해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일본 가문의 문장이나 묘비명을 읽을 수 있는 비석들이 있는가 하면, 묘비의 글씨가 보이지 않게 하려고 뒤집어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는 비석들도 있다. 혹은 시멘트를 덧발라 묘비명을 지운 듯한 흔적도 엿보인다. 어느 쪽이 되었든 묘비라는 것을 감추고 싶은 마음, 땅을 파면 유골함이 나오는 무덤 위에 집을 짓고 살아야 했던 피난민들의 처지와 그 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부산 서구 아미동에 있는 비석문화마을. 사진/필자제공
 
'단장(斷腸)'의 미아리고개와 공동묘지
 
1956년 발표된 〈단장의 미아리고개〉(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는 ‘창자가 끊어지는(斷腸)’ 고통에 비견될 만큼 크나큰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탈환당하고 후퇴하던 인민군은 많은 남쪽 사람들을 데리고 미아리고개를 넘어 북으로 갔다. 그들 중 자발적으로 월북한 사람도 있겠으나 피랍된 이들도 많았기에 미아리고개에서 강제로 이별을 당하는 아내의 모습이 노래에 담겨 있다. 
 
서울 북쪽의 미아리고개는 인민군과 국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던 곳이고,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서울로 이주해 온 이들의 주거지였으며, 그보다 앞서 일제가 만들어낸 공동묘지 터이기도 했다. 조선총독부는 망우리 공동묘지 확장공사를 끝내고 미아리 공동묘지도 확장하려 했지만 미아리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주민들은 1943년 총독부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해 공동묘지와 화장장의 이전을 요구했고,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여력이 없던 총독부는 확장계획을 보류하고 길음동 일대 화장장 설치를 철회했다고 한다. 
 
모든 책 무능하다 고요하다
불운 가득 찬 고요

그토록 격렬하던 1950년 6월 27일
그곳
중부전선 의정부에서
빈 길 달려온 인민군 탱크들이 불을 뿜었다

지금 고요하다
그토록 요란하던 1957년 겨울
장작더미 트럭 전복되어
장작들 길 가득히 흩어졌던
그곳

지금 고요하다
또다시 태양은 떠오르고
한 많은 미아리고개
철사줄에 감겨 잡혀가던 남편도
울며 뒤쫓아가던 아내도 없어져버린
그곳

지금 고요하고 고요하다
소경
점쟁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 … >
(‘새벽 미아리고개’, 17권)
 
해방 이후 정부 수립과 더불어 고려되던 미아리 공동묘지의 이전계획은 6·25가 터지면서 미뤄졌고, 1958년 경기도 광주로 이장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미아리는 공동묘지의 망자들과 피난민들의 삶이 한데 어우러진 피난민 정착촌이 되었다. 혼령들이 많아서인지 미아리에 점집들이 모여들어 촌락을 이루었던 것도 인상적이다. 심지어 ‘미아리’라는 이름의 인지도 때문에 차용한 것인지,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북구 하월곡동의 성매매지구가 ‘미아리 텍사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월곡동은 서울 철거민들의 한 피난지이기도 했던 곳이다.
 
가난과 역사의 굴곡이 깃들었던 ‘달동네’ 미아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도로가 확장된 지도 오래이니 아직 미아리 공동묘지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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