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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글로벌 기업에서 덴마크 왕세자비까지…세계가 주목하는 디자이너 '문승지'
디자인 작업의 70~80%는 '고민'에 투자…"내 디자인이 세상에 이로운 것이었으면"
2019-07-02 06:00:00 2019-07-02 10:14:18
 
"아찔하다"
이는 문승지 디자이너가 본인이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란다.
산업 디자인이 주 전공이었던 그는 예술과 상업을 모두 넘나들 수 있는 '가구'라는 오브제만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에 매력을 느껴 가구디자이너가 됐다. 그의 디자인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지속가능한 것을 향하고 있다. 자신이 디자인한 제품들이 세상에 나와야 한다면 꼭 필요한 것, 이로운 것 이었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그런 그에게 세계적인 관심은 반갑다. 혼자일 때는 자신의 손이 뻗치는 범위에서만 영향을 끼칠 수 있었지만, 더 큰 채널을 만나 전 세계의 사람들과 공유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가 속한 레이블 '팀바이럴스'의 이름에 담긴 '바이러스' 처럼 지칠 줄 모르는 그의 '고민'은 지구 곳곳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인터뷰 당일 오전 팀바이럴스 사무실에서 기자를 맞으며 "누구에게 맡겨도 되는 일이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혼자 하다보니 밤을 샜다"며 양해를 구하는 그에게선 '행복'이 엿보였다. 그에게 행복이란, 마음껏 몰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같은 꿈을 향해 달려가는 팀바이럴스 구성원들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문승지 디자이너. 사진/팀바이럴스
 
[뉴스토마토 권안나 기자] 지난 5월 문승지 디자이너가 속한 팀바이럴스에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청와대였다. 덴마크 왕세자비를 위한 국빈 선물로 문승지 디자이너의 '이코노미컬 체어'를 구매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무려 청와대라니…' 코스(COS),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대기업들의 협력 요청에 이은 또 다른 쾌거의 순간이었다. 정창기 팀바이럴스 매니저는 당시를 회상하며 "청와대에서 갑자기 연락이 와서 다음주에 덴마크 국빈 방문이 있는데 왕세자비에게 '이코노미컬 체어(Economical Chair)'를 선물하려고 한다고 해서 어안이 벙벙했다"며 "세계 탑 디자이너는 다 덴마크 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고 말했다. 청와대를 거쳐 덴마크 왕세자비에게 전달된 이코노미컬 체어는 현재 덴마크 왕실의 국고에 보관된 '보물'이 됐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그의 가치는 문승지에게서 한순간도 떠나지 않는 '고민'에서 비롯된다. 그의 고민은 때로는 지구 한바퀴를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디자인 작업과 설계는 며칠 밤을 새면 마무리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고민하는 데 쓰인다. 고민을 오래할수록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은 명쾌했고, 고객들의 좋은 반응으로 이어졌다. 문 디자이너는 "작년까진 절반정도를 고민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면 이제는 70~80%의 시간을 고민으로 보내는 것 같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손은 더욱 빨라지고 생각은 더 많아진다. 어쩌면 내가 만드는 디자인에 대한 책임감과 관련된 것 같다"고 말했다.
 
 
(위) 코스 매장에 전시된 '포 브라더스' 의자. (아래)포 브라더스 도안. 합판에서 버려지는 부분 없이 모두 사용된다. 사진/팀바이럴스
 
 
그가 하는 고민은 결국 '소비'와 맞닿아 있다. 어느 한 영역에서의 소비가 아닌, 사용자에서 제작자까지 전체를 아우른다. '포 브라더스(4 Brothers)' 와 '이코노미컬 체어'는 이 같은 고민의 집결체다. 두 제품은 하나의 합판에서 버려지는 부분 없이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의자다. 양산이 쉽고 조립 분해가 가능해서 공간의 손실을 줄이고, 유통과정에서 불필요한 에너지도 줄어든다. 코스가 전 세계 45개 도시의 수백개 매장에 전시한 포 브라더스가 '작품'의 성격이 강하다면, 이코노미컬 체어는 좀 더 실용적이고 기본적인 형태의 '제품'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는 매년 20여개의 다양한 프로젝트로 기업들과 협력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한번도 제안서를 준 적은 없다.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은 결과로 보여줘야 하는데, 고객의 마음을 사기 위해 불가능한 내용들을 담은 제안서로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는 대신 좋은 컨셉을 고객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그만큼 작업 과정에서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모 건설회사와 작업을 진행할 때는 그 회사의 대표이사가 일주일에 3번을 맥주를 들고 스튜디오로 찾아왔다고 한다. 직접 찾아가면 만나기 어려운 대기업 경영인이 직접 그를 찾은 것은 좋은 작업물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안서는 없지만 작업이 끝난 뒤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문서는 몇 100페이지 분량이라도 아주 자세하게 작성해서 준다. 제안서도 안받고 프로젝트를 진행할 만큼 '신뢰'를 보내준 데 대한 보답이다. 
 
문승지 디자이너. 사진/팀바이럴스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대학교 졸업 직후 곧장 사업가로 출발했던 경험을 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그는 대학교 4학년 소파의 버려지는 공간에 주목하고, 고양이의 특성을 연구해 등받이와 팔걸이를 하나의 파이프관처럼 연결해 고양이 터널을 접목한 '캣 터널 소파'를 졸업작품으로 내놨다. 그리고 여기에 착안해 팔걸이 아래 동일한 각도로 애견하우스를 만들어, 남겨진 공간을 애견과 공존할 수 있는 '도그하우스 소파'와 함께 '엠펍(M.PUP)'이라는 애완동물 가구 브랜드를 론칭했다. 
 
당시 프로젝트를 줄 고객을 찾기 위해 전 세계 기자들에게 이메일을 전송하는 과감한 수를 뒀고, 실제로 통했다. 로이터, 데일리메일, 디자인붐 등 유수의 매체들이 그에게 주목했고 기사가 나가면서 널리 알려졌다.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입점 제안이 왔고, 국내 유명 연예인들도 구매해가면서 유명세는 더해졌다. 하지만 잘될수록 그는 두려웠다. 입점업체 컨텍, 재고 관리, 하자품 관리, 소비자와의 소통 등 이 모든것들을 혼자서 하다보니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고, 어느날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거지?" 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해외 수출건 얘기까지 오고가면서 그는 사업가가 아닌 디자이너로 남기 위해 모든 것을 과감하게 접었다. 
 
전자제품 제조사인 삼성전자와의 협력도 그에게는 또다른 도전이었다. 산업 디자인 전공을 통해 제품 디자인에 대한 프로세스를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큰 도움이 됐다. 모바일을 담당하는 사업부와 가전 사업부에서 각각 연락해 온 점도 눈길을 끈다. 문 디자이너는 비스포크 냉장고 관련 협력 제안을 받던 당시 모바일 사업부와 함께 '갤럭시 S10 팬파티' 공간 조성에 협력하고 있었다. 그는 전국 5개 도시를 돌며, 거울로 둘러싸 무한한 숲이 펼쳐지고 바닥에는 구름이 놓여 하늘에 거꾸로 매달린 듯한 판타지를 형상화한 공간 '판타지오'를 디자인하고 세팅했다. 정 매니저는 "대기업이다 보니 같은 회사 내에서도 그들끼리 서로 누구와 협력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며 "추천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각자의 필요에 의해 요청한 것 이어서 우리도 신기했다"고 말했다. 
 
(위) 갤럭시 S10 팬파티에서 문승지 디자이너가 만든 공간 '판타지오' (아래) 패브릭 소재를 덧대 자연의 느낌을 더한 삼성 '비스포크 냉장고'. 사진/팀바이럴스
 
한편 문 디자이너는 현재 '팀바이럴스'를 통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 팀바이럴스는 디자이너는 철저하게 디자인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목표 하에 운영되는 레이블 형태의 조직이다. 소속 매니저들은 아티스트들의 창작활동 외적인 모든 것을 관할하면서 이들이 불필요하게 소모해야 하는 에너지를 최소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는 시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소비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문 디자이너는 "아티스트들은 각자 조금씩 다른 영역을 맡고 있지만, 프로젝트가 있으면 모두가 자기일처럼 뭉쳐서 해 나간다"며 "팀의 모든 일원들이 가족같은 존재이고 서로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향후에는 팀바이럴스 내에서 하나의 프로젝트 개념으로 다시금 브랜드 론칭에 도전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다만 과거의 '실패 아닌 실패'의 경험을 되뇌이며 신중하게 준비해 나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문 디자이너는 "세상에 무언가를 판다는 것은 책임감이 부여되는 일이더라"며 "견고하게 정리한 후에 내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3년 정도 목표로 삼고 하나씩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먼 미래에 자신이 고민한 디자인 방법론을 구체화시켜 교육 사업에 투영하고 싶다는 꿈에 대해서도 조심스레 털어놨다. 특히 '스토리즘'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세상에 남기고 싶다고 했다. 디자인 작업에는 하나의 선을 그리더라도 그 속에는 의미가 담겨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유없는 형태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메세지를 담았다. 문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들 마다 자신만의 방법이 있고, 제가 고민한 것들도 언젠가는 구체화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슷한 성향을 가진 아티스트들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권안나 기자 kany872@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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