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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기획2050)29-홍콩시위와 촛불혁명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미래
10월1일 국경절 시진핑 주석 '홍콩 자치' 입장표명 여부가 관건
홍콩시위, 공산당 맞서 '행정장관 직선제' 요구…민주주의 이정표될 것
2019-09-16 07:00:00 2019-09-16 07:00:00
홍콩 민주화운동이 기로에 섰다. 지난 5일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홍콩시위의 시발점이 됐던 '범죄인 인도법안'을 공식 철회했다. 그러나 시위는 사그라지지 않았고, 15일에도 시민들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돼가는 빅토리아 공원에서 시위를 했다. 홍콩시위를 통해 홍콩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특히 오는 10월1일은 중국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절 70주년이다. 1949년 이날에 마오쩌둥이 신중국을 선언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올해 국경절에 중국의 새로운 30년에 관한 테제를 내놓을 것으로 관측된다. 그에게 가장 민감한 현안은 미중 무역분쟁과 함께 홍콩의 자치를 얼마나 인정할 지다. 국경절에 시진핑이 제시할 테제로 홍콩의 미래도 판가름날 전망이다. 홍콩시민들이 걱정하는 건 지금의 대규모 저항운동에도 불구하고 시진핑이 침묵하는 것이다. 지금 홍콩 시민들은 10월1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홍콩시민들도, 시진핑도 모두 아는 사실이다.
 
한국과 중국, 서로 다른 두 개의 100년

더 길게 보면 앞으로 2년 뒤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는다. 동아시아에선 비슷한 시기에 '두 개의 100년'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전망이 진행 중이다. 한국의 3·1운동 100주년과 중국의 공산당 창당 100주년이다. 동아시아의 두 나라는 같은 시기에 같은 듯 다른 길을 걸어 왔다. 한국은 1919년에 3·1운동에 이어 4월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1919년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선언한 29년 뒤 실질적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중국 공산당도 1921년 창당 이후 28년 만에 신중국을 건설했다. 두 나라가 모두 선언으로부터 30여년 만에 실질적 국가를 건설했다. 그리고 70년이 흘러 오늘날 한국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자유주의 나라가 됐다. 반면 중국은 사회주의를 지향하다가 덩사오핑 이후 현재 체제로 자리 잡았다. 두 나라는 절대빈곤을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 측면에선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3·1운동 100주년과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의 시기에 두 나라의 국민들은 자문하게 됐다. '건국 아버지들이 선언했던 국가목표가 제대로 성취되고 있는지'에 관해서 말이다.
 
홍콩시위가 시작된 계기는 ‘범죄인 인도법안’ 반대였지만, 지금은 행정장관 직선제가 핵심 아젠다로 됐다. 홍콩시위는 캐리 람의 행정장관 퇴진이라는 개인적 거취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의 문제까지 발전했다. 사진/뉴시스

문재인정부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정신이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지 성찰하고 있다. 100년 전 4월11일에 공포된 임시헌장 11개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과 함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세계평화'이다. 민주공화제에 대한 선언은 유명하지만, 세계평화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임시헌장을 만들 당시엔 세계평화가 중요한 가치로 등장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해로, 파리에선 세계대전을 반복하지 않을 새로운 세계에 대한 모색이 진행됐다. 이런 글로벌 흐름을 이어받아 '아시아의 뉴욕'으로 불리던 상하이에서도 세계평화에 대한 아시아인의 희망이 생겨났고 임시정부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세계평화에 대해 희망은 해방공간에서 김구의 '문화국가론'을 통해 더욱 구체화됐다.

1919년 한국의 건국 아버지들이 꿈꾼 나라는 왕정이 아니라 민주공화정이었다. 이 꿈은 2016년 촛불혁명을 통해 100여년 만에 시민참여의 광장에서 실현됐다. 건국 아버지들이 꿈꾼 공화정은 미국의 '연방주의자 논집(The Federalist Papers)'과 헌법, 프랑스 대혁명의 선언들에서 나타난 대의제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를 넘어 시민참여와 직접 민주주의로까지 진화한 형태의 새 민주주의를 만들고 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상상한 것보다 더 많은 주권과 인권이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고 있다.

세계평화를 가장 절실한 국가목표로 하는 나라도 한국이다. 20세기 가장 첨예한 갈등과 분쟁의 지역인 한국에선 역설적으로 21세기의 가장 현실감 있는 세계평화 담론이 나올 수 있다. 한국은 글로벌 소프트파워 전략과 평화국가론 등으로 새로운 세계평화 비전을 모색하고 있다. 세계평화도시가 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후보지는 서울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에는 글로벌 거버넌스가 국제연합(유엔) 체제보다 훨씬 진화된 형태로 등장할 것이고, 글로벌 거버넌스의 수도를 모색한다면 미국과 중국의 패권대결 가운데에 있는 한반도가 될 것이다.
 
'홍콩시위', 신중국 건국 70주년에 던져진 질문

장차 중국 인민들도 공산당의 지난 100년을 성찰하고 공과를 물을 것이다. 중국은 1921년 공산당 창당 이후 100주년이 되는 2021년에는 인민의 복지가 충족되는 '소강사회'를 이루고, 1949년 신중국 건설 100주년이 되는 2049년에는 지구의 최강국이자 초일류국가인 '대동사회'를 만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지금 중국은 2021년을 불과 2년을 남겨두고 '중국 공산당 창당과 신중국 건국 아버지들이 설계하고 인민들에게 제시한 나라로 되어 가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시작할 것이다.

그 근본적 질문의 첨예한 최전선에 홍콩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시진핑은 10월1일 건국 70주년에 이에 대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21년 7월1일에 상하이에선 진독수와 이대교 등이 참여하여 중국 공산당을 창당했다. 이때 마오쩌둥도 호남성 대표 자격으로 참가했다. 이들은 반봉건과 반제국주의, 인민독재를 당의 강령으로 제시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 반봉건과 반제국주의의 목표는 달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인민독재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인민독재의 정신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이다. 100년 전 중국 공산당이 상상한 인민독재는 일당독재나 일인지배가 아니었다. 비록 공산당이라는 외형을 갖더라도 인민의 뜻으로 나라가 운영되는 걸 꿈꿨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사태에서 인민의 군대가 탱크를 몰고 인민을 짓밟는 피의 학살을 한 이후 공산당은 정치적으로 인민독재의 정당성을 잃었다. 지금 공산당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인민독재라는 창당 정신, 건국 정신에서 크게 벗어났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은 4일(현지시간) 홍콩 시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범죄인 인도법안' 철회를 발표했다. 사진/뉴시스
 
홍콩시위는 궁극적으로 공산당과 신중국의 정신을 묻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행정장관 직선제다. 홍콩시위가 처음 시작될 때는 범죄인 인도법안 반대가 계기였지만, 지금은 행정장관 직선제로 핵심 아젠다가 변했다. 행정장관 직선제는 홍콩 민주주의에서 최소한의 강령으로 진화했다. 홍콩시위를 주도하는 민간인권진선(民間人權陣線, 이하 민진)의 소집자(Convener) 지미 샴(Jimmy Sham)은 "홍콩시민들은 그들이 직접 뽑은 행정장관에 의한 행정이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말했다.

행정장관 직선제는 6월12일 민진이 홍콩 당국에 캐리 람의 하야 대신 5개 조항(△행정장관 직선제 △경찰 강경진압에 대한 독립적 조사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체포된 시위대 석방 및 불기소)을 요구하면서 구체화됐다. 홍콩시위는 캐리 람의 개인적 거취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의 문제까지 발전했다. 홍콩시위가 아시아 민주주의 역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순간이었다.
 
홍콩시위·촛불혁명, '20세기식' 탈피한 새 민주화 물결

홍콩 시민들은 이번 시위를 우산혁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2014년 76일간의 우산혁명은 조슈아 웡 등 주요 활동가들이 구금되면서 미완의 혁명으로 남았다. 이번 홍콩시위가 홍콩 민주주의의 새 역사가 된 극적인 전기는 6월9일 103만명의 시민들이 시위에 폭발적으로 참여하면서다. 2007년에 한 차례 50만명이 참여한 시위가 있었지만 그 이후 홍콩에서 민주주의는 잠복기를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6월9일 집회 이후 민진의 주요 활동가들은 2016년 한국의 촛불혁명을 응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구체적 자료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조직과 모금의 형태 등 운동의 구체적 자료를 찾았지만, 결국은 홍콩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집회와 시위를 준비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로 협의라도 한 것처럼 유사한 민주주의 운동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6월9일부터는 다양한 단체와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공산당의 무도한 홍콩 지배에 분노한 사람들이었다. 시민들은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로 소통하면서 자발적인 참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제 홍콩시위는 민진이 운동의 주도권을 갖는 게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 홍콩의 정체성을 묻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6월16일 민진은 주도자의 역할로 시위에 나서는 게 아니라 하나의 참여자로서 역할을 한정했다. 민진은 집회의 시간과 장소를 경찰청에 신고하는 등 행정 절차만 수행하고 그 이상의 역할은 시민들이 인터넷에서 공론을 모아 진행하고 있다. 당시 집회엔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 역대 최대 시위 인원인 200만명이 참가했다.
 
임채원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8월31일~9월1일 홍콩을 방문, 홍콩시위 지지를 선언하고 촛불혁명과 홍콩시위의 연대를 논의했다. 사진/뉴스토마토
 
홍콩시위는 촛불혁명처럼 운동의 핵심지도부가 수직적으로 존재하는 20세기적인 모델에서 벗어나고 있다. 수평적으로 연결된 개인들이 자유롭게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론을 형성하고 운동의 방향을 결정하며 시간과 장소를 선정해서 집회와 시위를 만들어 가고 있다. 촛불혁명과 홍콩시위는 서구의 노동조합 운동이나 정당 지도부가 주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식이다. 홍콩과 한국의 민주주의 집회 양식은 '평화, 합법, 안전'의 새로운 투쟁방법이다. 최근 홍콩시위엔 화염병과 바리케이드 등이 등장했지만 민진이 소집한 집회에선 여전히 평화와 이성, 비폭력을 의미하는 '화이비(和理非)' 원칙이 준수된다. 지미 샴은 "민진이 소집하는 집회에는 한 살짜리 간난애기를 어머니가 안고 참여한다"고 했다. 촛불혁명 당시 젊은 엄마들이 아기를 유모차에 싣고 나온 것과 같은 장면이 홍콩에서도 연출됐다.

홍콩 민주주의는 지금 아시아 민주주의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아시아 사람들은 홍콩 민주화운동을 지켜 보고 있다. 중국으로부터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제안받았던 대만은 그들의 미래가 홍콩과 같을 것으로 관측하며 홍콩시위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티베트와 위구르, 내몽골 등 소수민족 자치구도 홍콩의 자치권이 어떻게 보장되는지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올해 천안문 사태 30주년을 맞은 중국 본토 사람들도 홍콩 문제가 중국 민주주의와 인권에서 거대한 갈림길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2016년 한국 촛불혁명이 아시아 민주주의의 새 길을 열었던 것처럼 2019년 홍콩시위는 아시아 민주주의에서 또 하나의 징검다리를 놓고 있다. 홍콩시위와 촛불혁명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미래다.
 
임채원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
 
 
* 필자 소개 : 필자는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다.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후 동대학원 행정학 석·박사를 수료하고 동대학 한국행정연구소와 국가리더십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경희대에서는 세계화와 사회정책 등 글로벌 어젠다와 동아시아문명의 국정운영을 연구 중이다. 또 문재인정부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공공정책분과 위원장으로 국가 미래전략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30년 후의 국가비전을 모색하는 이번 기획은 격주로 총 30회로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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