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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러시아 재발견 15화)국가와 민족이 낳은 경계선 그리고 휴머니즘
2019-12-30 08:00:00 2020-01-02 14:06:28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장벽 너머에서 온 사람들
폴란드 출신의 화학 전공 연구자 아쉬까 씨는 카잔의 한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를 병행하는 인턴쉽을 1년간 수행한 후 고국에 돌아가기 전 러시아 곳곳을 여행 중이라 했다. 그녀를 보니 모스크바 시절 중에서 1992년~1994년 2년간 수업을 함께 들었던 폴란드 학생들이 떠올랐다. 당시 미학과의 같은 학년에서 볼 수 있었던 외국인 학생들은 폴란드 남학생 4명, 불가리아 여학생 1명, 헝가리 남학생 1명으로, 나를 제외하고는 다 동유럽 국가 출신이었다. 폴란드 학생들은 4명이라 그들끼리 어울리는 편이었는데, 수업을 종종 빼먹거나 어떤 때는 술을 먹고 수업에 들어온 적도 있었다.
 
아쉽지만 그 폴란드 학생들과도, 활달해 보이던 불가리아 학생과도, 조용한 성격으로 수줍게 자작시를 보여주던 헝가리 학생과도, 나는 대화를 많이 나눌 정도로 친해지지 못했다. 구 소비에트 연방은 ‘형제 국가’ 출신의 유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았지만 부활한 러시아는 학비를 요구했고(물론 대한민국 출신에게보다는 적은 액수였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이 동유럽 출신의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모두 사라졌다. 북한에서 온 유학생들도 사라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신 남한에서 오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졌고, 나는 태어나서 최초로 만났던 동유럽 사람들과 친구가 될 기회를 놓쳤다.
 
2019년 기준 ‘여권 파워’ 공동 2위(세계 200개국 중 188개국을 무비자 또는 도착비자로 방문 가능)를 기록한 한국이지만, 해외여행의 전면적 자유화는 1989년에서야 실현되었던 터라 외국인, 그것도 심리적 거리감이 컸던 과거 사회주의 진영의 나라들, 구소련과 동유럽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낯설고도 신기한 느낌을 주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우리가 신기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장벽 너머의 사람들이었던 셈이다. 그때는 몰랐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오랜 갈등의 역사를 나는 2019년에 만난 폴란드인 아쉬까 씨를 통해 알게 됐다. 
 
브이(V)자 모양의 빗살무늬 벽이 목조 주택의 옛날 양식임을 설명해 주는 아쉬까 씨. 사진/필자 제공
 
보윈 대학살, 청산되지 않은 과거사
 
폴란드어로 ‘보윈’, 우크라이나어로 ‘볼린’, 영어로는 ‘볼히니아’로 불리는 이 지역은 폴란드의 남동부, 벨라루스 남서부, 우크라이나의 북서부 사이에 위치해 있고 현재는 우크라이나 땅이다. 세계사에서 흔히 보이듯이, 이 지역도 역사의 굴곡이 심했다. 13세기에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볼히니아가 포함된 키예프 루스(키예프 대공국)가 멸망했고 16세기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연방이 수립되었는데, 이때 많은 폴란드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귀족을 중심으로 폴란드 문화가 확산됐다. 볼히니아는 1795년 제3차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분할에 따라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우크라이나, 소련, 폴란드로 끊임없이 소속이 바뀌었고 다시 서부의 폴란드령과 동부의 소련령으로 분할된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38년까지 소련 정부는 부농 억압책의 일환으로 폴란드인을 비롯한 볼히니아의 수많은 주민들을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1939년에는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라 폴란드 동부가 소비에트 연방에 병합되었다. 폴란드인에 대한 제노사이드, 즉 ‘대량 인종 학살’로 불리는 ‘보윈(볼히니아) 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단체’(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OUN)의 반데라(Bandera)파와 그 군사 조직인 ‘우크라이나 봉기군’(Ukrainian Insurgent Army, UPA)에 의해 볼히니아 지역과 갈리치아 동부를 비롯한 소폴란드(폴란드 동남부) 지역에서 자행된 것이다.
 
1943년 3월 26일 우크라이나 봉기군(UPA)이 '체른(검은)'으로 불리는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도움을 받아 폴란드의 립니키 마을(코스토폴 지구)에서 저지른 학살의 폴란드 민간인 희생자들.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 블라디슬라바 시에마스코프, <제노사이드> p. 1294, 헨릭 슬로빈스키 콜렉션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원했던 민족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유태인을 ‘인종 청소’하는데 동참했다. 또한, 오랜 세월 우크라이나를 지배해 온 폴란드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어린이·여성·노인 할 것 없이 무작위로 살육해 보윈 학살의 희생자는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학살에 OUN이 조직한 우크라이나 농민 부대도 참여했다는 사실은 우크라이나 농민 역시 폴란드인에게 오랫동안 증오심을 품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17~18세기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이 그들을 멸시하던 폴란드 귀족들의 통치와 가톨릭에 맞서 봉기했던 사실도 오래 묵은 적대의 역사를 반영한다.
 
보윈 학살은 스로코프스키의 단편 <증오>를 원작으로 삼아 스마조프스키 감독이 2016년 <보윈>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나치의 부역자이자 파시즘의 추종자로 이 잔혹한 학살을 주도했던 OUN은 지금도 여전히 건재한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영웅으로 취급되고 그들의 행위는 애국적인 행위로 추앙된다. 이 비극적 범죄에 대한 사죄는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아무리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폴란드인들이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증오심을 심어주었다 할지라도―그들의 증오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그렇다고 학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오스트룹끼, 발굴 중인 죽은 자들의 들판. 사진/위키미디어 커먼스·2011년 8월7일 레온 포펙의 사진
 
자멘호프와 체르스키
 
폴란드의 안과 의사 자멘호프(1859~1917)는 세계인들이 함께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국제 인공 언어인 에스페란토를 만들었다. 폴란드인이라고 하지만 그의 부모는 혈통상 유태인에 가문은 리투아니아 출신이었고, 당시 그가 살던 폴란드 지역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으니, 여러 요소들이 복합된 상황이었다. 볼히니아(보윈)와 주변 지역의 복잡한 역사, 다민족 상황과 마찬가지로, 그의 고향 역시 여러 민족이 섞여 살아 다양한 언어가 혼재하고 종교적 차이와 문화적 갈등이 늘 있었다. 이 갈등을 보며 고민하던 소년 자멘호프는 모두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희망의 언어’인 에스페란토를 만든 것이다.
 
아쉬까가 트랙킹을 가려 했던 슬류쟌카의 산 하마르다반의 꼬마린스키 능선에는 ‘체르스키 봉우리’가 있다. 시베리아의 탐험가이자 지리학자, 지형학자, 지질학자, 고생물학자인 폴란드인 얀 체르스키(1845~1892)의 이름을 딴 여러 지명들 중 한 곳이다. “그는 1월 봉기에 참여했다가 시베리아로 추방됐어요. 석방된 후 시베리아의 산에 다니며 지질학자가 된 거죠.” 아쉬까가 설명했다. ‘1월 봉기’는 1863년 1월 22일부터 1864년 6월 18일까지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에 반대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복원하기 위해 일어난 무장 봉기다.
 
러시아에서 이반 체르스키로 불리는 얀 체르스키는 18세 고등학생으로 봉기에 참여했는데, 지역적 특성상 그를 리투아니아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폴란드인이든 리투아니아인이든,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반대했던 이 젊은이는 그렇게 시베리아의 암석과 광물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어 러시아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아쉬까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한반도의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세계 범죄의 과거사는 언제 청산되고 치유될까? 국익들 간, 이해집단들 간의 충돌이 횡행하는 속에 청산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철도차량기지가 있고 많은 운송화물이 통과하는 슬류쟌카 기차역. 사진/필자 제공
 
무작정 대기하는 대합실 풍경
 
원래 계획대로라면 환바이칼 철도를 따라 지역 열차인 ‘모따냐’를 타고 슬류쟌카에서 포트 바이칼까지 바이칼 호수를 둥글게 끼고 달렸을 것이다. 관광객들이 주로 타는 환바이칼 관광열차는 매우 비싸서 나는 비록 중간에 내릴 수는 없지만 현지 주민들이 타는 교외선인 모따냐 표를 이미 예매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쏟아지는 비로 인해 모든 열차 운행이 취소되었고 표를 환불한 채 무작정 슬류쟌카 역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시작됐다.
 
슬류쟌카의 성 니콜라스 교회는 환바이칼 철도의 건설자들에 의해 1914년에 세워졌는데, 2008년 8월 27일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2008~2009년에 완전히 재건되었다. 사진/필자 제공
 
‘오늘 안으로 떠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근심스러운 표정의 얼굴들은 나뿐만이 아니다. 기대했던 환바이칼 구간을 보지 못하게 된 실망감은 얼마 후에 들은 정전 소식, 홍수와 수재민 소식 때문에 그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기약 없이 이르쿠츠크행 교외선을 기다리는데, 언제 어느 순간 안내 방송이 나올지 모르니 배가 고파도 빵을 사러 역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작은 역 안에는 아무 가게도 없다. 문득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차렸다.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던 매표소 직원의 태도가 변한 것이다!
 
폭우 때문에 모든 열차가 취소된 슬류쟌카 역에서 승객들이 무작정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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