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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러시아재발견 28화)이르쿠츠크여 안녕! 예카테린부르크로 가는 길
2020-07-20 08:00:00 2020-07-20 08:00:00
어느 크리스마스 날 저녁, 낫과 망치와 별이 그려진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러시아의 삼색 국기가 올라갔다. 지난 세기 인류는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을 경험했지만 그 세기가 저물 무렵 이 첫 실험의 실패도 목격해야 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사라지고 새로운 러시아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타국의 사람들은 충격과 호기심으로 이 세계사적 사건을 지켜보았고 러시아인들은 혼돈과 기대, 희망과 절망의 시간 속에 던져져 있었다. 강산이 두세 번 바뀔 동안 커다란 변화를 겪어온 러시아인들, 그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연재를 재개하며 - 모스크바에서 들려온 소식
 
부득이한 사정으로 한동안 연재가 중단된 시기에 러시아의 친구들로부터 소식이 들려왔다.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가 그들의 일상에 가져온 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그런 소식이 낯설지 않다. 알혼 섬의 게르 숙소에서 만난 따냐는 직업이 바뀌었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출신의 그녀는 일자리가 많은 모스크바로 가 식당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었지만(21화 참조), 코로나19 사태로 식당이 장기간 문을 열지 못하게 되자 새로운 직업 훈련을 받고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게 됐다.
 
모스크바의 한 과학기술센터에서 근무하는 친구 미샤(24화, 25화 참조)는 4월부터 재택근무 중이다. 최근 모스크바의 일일 신규 확진자수가 500~600명 정도로 줄었다고 전해 준 그는 식료품점과 치과, 동네 산책 외에는 외출을 하지 않고 조심한다고 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가 발견한 긍정적 요소도 있다. 재택근무로 인해 평소 출퇴근에 사용되던 2시간 이상의 시간을 벌게 된 것이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직업군은 재택근무를 많이 하며, 모스크바의 상점과 대중교통에서는 마스크를 쓰지만 그 수가 많이 줄었다고도 전한다.
 
2020년의 절반이 코로나와 함께 지나갔다. 이 긴 싸움의 끝은 기약이 없지만, 2019년 여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990년대의 러시아를 오가던 두 시간의 기억과 남은 기록을 2020년 여름에 다시 시작한다.
 
트루베츠코이 집-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이르쿠츠크 시 즈나멘스키 교외에 있던 트루베츠코이 가족의 집으로 현재 소실됐다는 소개와 함께 20세기 초에 찍은 사진(이르쿠츠크 주 향토박물관 소장)의 사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사진/필자 제공
 
못 다한 이야기들
 
데카브리스트를 빼고 이르쿠츠크를 논할 수는 없지만, 그에 관련된 이야기가 워낙 많고 또 많은 사람들에 의해 소개되다 보니, 이 연재에서는 지난번(27화)의 짧은 이야기에 몇 마디 덧붙이는 것으로 족해야겠다. 먼저, 정확히 밝혀 둘 게 하나 있다. 이르쿠츠크의 여행객들이 데카브리스트의 역사를 보기 위해 종종 찾는 트루베츠코이 집-박물관은 그 이름 때문에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가 살았던 집으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이 저택에 산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박물관의 공식 자료에 의하면, 1845년 이르쿠츠크로의 이주를 허가 받은 트루베츠코이 가족이 이르쿠츠크 시의 즈나멘스키 교외에 살았는데, 이때의 목조 주택은 1908년 불에 타 소실되었다고 한다. 도시의 전설상 데카브리스트들에게 속하는 또는 트루베츠코이 가족의 집으로 추정되는 구 아르세날스카야 거리(현 박물관 위치인 제르진스키 거리)의 집에 기초해 1965~1970년 건물이 복원됐다. 이 거리의 집이 트루베츠코이의 세 딸들 중 한 명을 위해 지어졌다는 설도 있지만, 사료가 불충분하다 보니 역사가들의 의견도 분분해 이 집의 귀속 주체나 건설 연도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 1970년 ‘이르쿠츠크 데카브리스트 집-박물관’으로 명명됐던 이 건물은 2006~2011년 두 번째 복원을 하면서 현재와 같이 ‘트루베츠코이 집-박물관’으로 불리게 된다.
 
1974~1985년에 복원된 이르쿠츠크의 발콘스키 집-박물관. 사진/필자 제공
 
반면, 발콘스키 집-박물관은 세르게이 발콘스키 가족이 실제로 살았던 저택이다. 흥미롭게도, 발콘스키 가족은 1838년 우리크 마을에 지었던 이층집을 현 위치로 옮겨와 1847년 확장·개선된 형태로 완성했다. 발콘스키의 집은 이르쿠츠크의 문화와 사교계의 중심 공간으로 정치 토론과 시낭송, 연극 공연과 음악회가 이뤄지는 곳이었지만, 실상 발콘스키 자신은 농사에 열중해 농민의 삶을 더 좋아했고 안뜰에 있는 하인(농부)들의 통나무집에서 지내는 걸 선호했다고 한다.
 
세르게이 발콘스키가 저택보다 선호해 자주 머물렀다는 하인(농민)들의 통나무집이 발콘스키 집-박물관의 안뜰에 위치해 있다. 사진/필자 제공
 
1856년 발콘스키 가족이 시베리아를 떠나고 몇 년 후, 그의 집을 상인인 하미노프가 사들여 이르쿠츠크의 가난한 소년들이 다닐 공예학교 설립을 위해 시에 기증하게 된다. 1920~1974년에는 20가구가 사는 공동주택이 되기도 했는데, 1974~1985년에 현재와 같이 복원되어 데카브리스트들의 삶을 전하고 있다. 발콘스키 집-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마침 푸시킨의 <스페이드의 여왕>(삐까바야 다마) 특별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푸시킨은 발콘스키의 아내 마리야 발콘스카야와 한때 연인이었고 데카브리스트들의 친구였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데카브리스트인 니키타 무라비요프의 아내 알렉산드라 무라비요바가 시베리아로 떠날 때 데카브리스트들에게 바치는 시 <시베리아 광산 깊은 곳에서>를 그녀 편에 보냈다. 
 
푸시킨의 소설을 차이코프스키가 오페라로 만든 <스페이드의 여왕>(삐까바야 다마)의 ‘도박장’ 무대 장치의 스케치가 2019년 여름 발콘스키 집-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체모두로프, 1972년, 벨라루스. 사진/필자 제공
 
세 명의 학생-승무원
 
2019년 8월 2일 이르쿠츠크를 떠나 예카테린부르크로 향하는데, 올라탄 기차를 살펴보니 치타-모스크바행이다. 알렉산드라가 푸시킨의 헌시를 가지고 1827년 2월에 도착한 시베리아 남동부의 도시 치타, 데카브리스트들이 있었던 치타 감옥의 그 치타이다. 물론 그녀는 기차 대신 마차와 도보로 혹한 속을 이동해야 했지만,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3등칸 2층, 아늑한 내 자리로 돌아왔다. 바이칼 호수에서 심한 감기에 걸린 터라 기침에 시달리면서(2019년이었던 게 다행이지만 다른 승객들에게 몹시 미안했다) 2층에 늘어져 있던 나는 목소리가 조금씩 회복되자 새로운 동승자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 기차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역에 정차할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고 기차 안을 관찰하느라 벽보까지 읽다 보니 승무원들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 우리 칸 담당자는 옐레나 뻬트렌코 씨와 나탈리야 스메르찌나 씨, 두 명이 12시간씩 교대로 일한다. 그런데 이들은 ‘바이칼 국립대 치타 대학(인스티튜트)’의 학생들이다. 즉, 이르쿠츠크에 위치한 바이칼 국립대의 치타 분교다. 법학 전공 2학년생인 이들이 어떻게 기차의 승무원으로 일하게 된 것일까?
 
바이칼 국립대의 치타 대학 학생인 승무원 나탈리야 스메르찌나 씨가 정차한 기차 승강구에 서 있다. 사진/필자 제공
“치타-모스크바 기차는 5일 걸려요. 근무를 먼저 시작한 한 명은 5회, 다른 한 명은 4회 일하게 되지요.” 나는 처음에 이들이 철도학교 학생으로 실습 중인 줄 알았다. “아뇨, 우리는 철도와 상관없는 전공이지만 철도 승무원 직업에 대한 별도의 수업과정을 이수했어요.” 설명을 들어보니, 레나(옐레나)와 나타샤(나탈리야)는 ‘러시아학생분견대’의 ‘승무원학생분견대’인 ‘에셸론’에 들어가 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2학년을 마친 여름방학을 이용해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에셸론 분견대에는 모든 대학의 모든 학과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요.” 나타샤의 말이다. “월급은 어떤가요?” 레나가 답했다. “45,000루블이에요. 정식 차장과 같아요.” 학생 차장도 같은 월급을 받을 수 있다니 인상적이다! 그녀가 추정하는 교사 월급은 약 25,000루블, 광부 월급은 6~70,000루블이니 철도 승무원은 그 중간쯤 되는 셈이다(2020년 7월 기준 45,000루블은 약 76만원). 후에 메신저로 받은 나타샤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4일 동안 자바이칼 변강주를 따라 일을 한 후에야 러시아 전역으로 가는 기차 근무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바이칼 국립대의 치타 대학 학생인 승무원 옐레나 뻬트렌코 씨가 승객들과 얘기하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레나가 대화를 중단했다. 기차가 다시 역에 정차할 참이라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열차의 어느 쪽 문이 열릴지, 어느 쪽에서 승객들이 탈지, 기차가 서기 전까지는 승무원도 모른다. 승무원은 자기 칸의 열차 청소도 담당하고 있다. 처음엔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청소할 때 입는 작업복으로 갈아입어 못 알아본 탓이다. 동료와 교대하고 나면 일상복 차림으로 12시간 쉬게 된다. 한 역에 내려 주변을 뛰어다니는 나를 레나가 부른다. 같은 학교 학생이자 다른 칸 승무원인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하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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