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객주 천봉삼과 직업정신
입력 : 2020-09-09 06:05:00 수정 : 2020-09-09 06:05:00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19세기 말 격동의 시간을 배경으로 조선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소설에는 천봉삼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는 정의로운 인물의 전형이다. 한평생 보부상으로 살면서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노동으로만 얻은 것을 손에 넣었다. 눈 한 번 딱 감으면 출세의 지름길이 훤히 열리는 기회가 수차례 있었음에도 뿌리치고 멀찌감치 돌아서 갔다.
 
그는 답답할 정도로 원칙에 충실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물 근성의 장사치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의 사전에는 청탁, 뇌물, 편법, 반칙이란 단어가 없었다. 특히 사익보다는 공익을 늘 먼저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소설 속에서 20만 보부상들의 이익단체인 보부청을 해체하라는 왕의 어명에 보부상들이 단체로 반발하지만, 천봉삼이 나서서 어명을 따르라고 설득하고, 거리에 나섰던 보부상들은 해산한다.
 
그는 자신의 단체가 폭동을 일으킬 경우 백성들에게 돌아갈 해악을 걱정했고, 동패들의 이익보다는 나라 법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정이 정당하지 않으면 그 결과 또한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이 사람은 알고 있었다. 비록 허구의 인물이지만 150년 전 천봉삼의 삶이 지금 탐욕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코로나19로 어지러운 이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정부의 4대 의료정책 철회를 요구하며 진료 거부에 나섰던 전공의들이 드디어 8일 업무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정부·여당으로부터 기어이 원점에서 재논의한다는 양보를 얻고 나서다. 이들이 병원에 돌아와도 파업 이전의 진료환경으로 정상화하기까지는 최소 2주에서 1달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정부와 합의하면서 또 다른 조건을 내걸었다. 의사 국가고시 시험을 거부한 의대생들을 2주 안에 구제하라는 것이다. 이미 한 차례 연기해줬던 시험이다. 세상 어디에도 국가고시 일정을 응시생 사정에 따라 바꿔주는 나라는 없다. 더군다나 정작 시험을 봐야할 장본인들은 거부하고 있는데 무슨 명분으로 이들을 구제를 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밥 먹기 싫다는 어른을 어르고 타일러 억지로 떠먹이라는 말인가. 법과 제도, 공권력을 우습게 생각하지 않고선 결코 나올 수가 없는 요구다.
 
의료계 파업 과정에서 한 걸음, 두 걸음 계속 양보해줬던 정부와 여당은 이제라도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가뜩이나 광화문집회 세력이 다음 달에도 집회를 하겠다며 공권력을 조롱하는 마당에 또다시 물러섰다간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 재확산 사태에서 보듯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한 공권력은 곧 국민들의 피해로 고스란히 귀결되기 때문이다.
 
최근 동네 병원에서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은 60대 초반의 한 환자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 환자는 더 큰 병원으로 옮겨 검사 치료를 받으려 했지만 지금은 거의 포기했다. 19일간 끌어온 의료계 파업 여파로 두 달 뒤에나 의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한시가 급한 처지인데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백방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다른 대형병원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환자와 그 가족들은 지금 과연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객주 천봉삼이 평생을 지킨 건 장사꾼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도리, 직업정신이었다. 정부와 여당이 의료정책을 원점에서 재논의한다고 한 만큼, 의사들도 원점으로 돌아가 직업윤리를 곱씹기 바란다.
 
세종 때 발간한 동양 최대 의학사전 의방유취에서는 의사의 도리, 의사 정신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환자의 집에 가서는 아름다운 비단과 천에 눈을 팔지 말 것이며, 좌우를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환자가 한시도 참을 수 없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의사로서 태연하고 오만하게 있을 수는 없다.”

이승형 산업부 에디터 sean1202@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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