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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서

전두환·노태우, 애증의 70여년 인연 종지부

육군11기, 쿠데타 동지에서 청산대상이 되기까지

2021-11-2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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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장윤서 기자] 전두환씨가 23일 향년 90세 일기로 사망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한 지 28일 만이다. 전씨마저 사망하면서, 노 전 대통령과의 생애 길고도 질긴 인연은 종지부를 찍게 됐다. 
 
두 사람의 인연은 육군사관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1952년 육사 11기 동기로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다. 전씨는 1959년 대위였던 노 전 대통령이 김옥순 여사와 결혼할 당시 사회를 봐줄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다. 
 
전씨는 1958년 미국 특수전 파견 교육장교로 선발됐고, 이후 제1공수특전단 본부에 배치됐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기인 이규동씨의 딸 이순자씨와 1959년 결혼했다. 이때부터 전씨는 '정치군인'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박 전 대통령이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자 전씨는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육사 후배들을 설득해 군부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진행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씨는 박정희정권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 자리에 오른다. 
 
특히 전씨와 노 전 대통령은 군부 내 사조직이자 군부의 정치개입 폐단으로 지목된 '하나회'를 앞장서 결성했다. 이후 하나회는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당한 뒤 12·12 쿠데타를 주도하게 된다. 당시 9사단장이었던 노 전 대통령은 전방을 지휘하던 자신의 휘하 29부대를 후방으로 이동시켜 서울을 장악하며 5공화국 2인자의 발판을 마련했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사망한 23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추모관의 5·18 영상물에 전두환 모습이 방영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1980년 5월17일 하나회는 전씨를 중심으로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분 하에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의 조처를 내리고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등 2699명을 구금했다. 이때 전씨는 군부독재에 맞선 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다. 전씨는 이를 계기로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학살자'의 죄인이 됐다. 
 
전씨는 1979년 신군부의 압력을 통해 최규하 전 대통령을 물러나도록 한 뒤, 그해 8월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였다. 이후 1980년 7년 단임 대통령제가 담긴 새 헌법을 공포했고, 1981년 민주정의당에 입당해 새헌법에 따라 간접선거 방식으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제5공화국의 출범이었다.  
 
이후 전씨에 맞선 민주화운동이 불길처럼 번지게 된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지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하지만 전씨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체육관 선거를 고집했다.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저항이 확대되자,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 수용 선언을 하게 된다. 민주항쟁의 압박이 커지자, 전씨가 노 전 대통령을 설득한 끝에 직선제를 발표토록 한 것이다. 
 
전씨는 노 전 대통령을 후계자로 세우고 퇴임 뒤에도 민주정의당 총재로 남아 막후 권력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집권한 이후 들끊는 여론 속에 '5공 청산'을 진행하면서 전씨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틀어지게 됐다. 결국 전씨는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한 뒤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갔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사망한 23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추모관에서 5·18 영상물 상영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후 두 사람은 1995년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나란히 구속됐다. 12·12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폭력 진압의 주범으로 지목된 것이다. 혐의는 반란수괴·내란수괴·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등이었다. 검찰 수사 당시 전씨는 검찰의 소환에 응해 구속된 노 전 대통령을 향해 "노태우가 일을 그르쳤다. 끝까지 버텼어야지"라고 말하는 등 강한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전씨는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2심 무기징역,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이 확정됐다. 그러나 전씨는 970억원(2021년 기준)을 미납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이 29만1000원 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해 비판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1심에서 징역 22년6개월을 선고받았고 1997년4월 대법원에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전씨와 달리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추징금을 완납했다. 또 노 전 대통령은 별세하기 전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이 용서를 바란다"고 유언을 남겼다. 특히 아들 재헌씨가 수차례 5·18민주묘지를 찾아 부친의 잘못에 사죄했다. 반면 전씨는 그 어떤 사과도, 반성도 없이 사망했다. 두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명확하게 갈리는 이유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별세했다. 전씨는 노 전 대통령의 부고 소식에 침묵하다 눈물을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전씨는 당시 건강 문제로 노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지 못했고, 부인 이순자씨가 대신 조문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사이 두 사람 모두 유명을 달리하면서, 애증의 인연은 역사 속에 남게 됐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가 사망한 23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추모관 벽면에 전두환, 노태우씨의 재판 모습이 전시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장윤서 기자 lan4863@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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