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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

(피플)31년간의 외로운 싸움…세아제강, 해고자의 ‘눈물’

김정근 민주노총 총무국장

2016-10-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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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2년 세아제강의 전신인 부산파이프에 입사해 임금 투쟁을 주도한 이유로 1985년 해고가 됐다. 31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 어느덧 올해가 정년 마지막 해가 됐다.”
 
김정근 씨가 세아제강 복직을 위해 31년간 회사와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지난 28일 세아제강 본사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김정근 씨. 사진/뉴스토마토
 
김정근씨는 세아제강 복직을 위해 31년간 회사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지만 그는 어김없이 마포구 합정동 세아제강 본사 정문 앞에서 늘 같은 시간에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명함에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총무국장이라는 직함이 찍혀 있다.
퇴사 이후 민노총에서 쟁의국장, 대외협력국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총무국장으로 근무 중이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이따금 생활고에 눈물을 훔쳤다. 대기업을 상대로 개인은 무기력한 한 줌 먼지와 같았다. 그가 노동운동에 발을 디딘 계기가 됐다.
그는 지난 2009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 부당해고에 대한 복직권고 판결을 받은 뒤 2012년까지 회사와 복직 협상을 벌였지만, 복직은 이뤄지지 않았다. 회사는 복직 판결이 났음에도 원론적 답변만 내놨다. “이러다 힘들면 나가 떨어지겠지”, “무대응으로 시간을 끌면 제풀에 꺾일 거야”라는 식으로 회사는 그를 유령 인간 취급했다. 복직권고 판결이 났음에도 법적 강제성을 띠고 있지 않다는 점을 회사가 악용한 것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1인 시위에 나선 건 올해 3월 24일부터다. 김씨는 올해가 정년 마지막 해다. 올해 협상을 벌이지 못할 경우 복직은 물론 보상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31년간 회사에 맞서 복직 투쟁에 나서고 있는 그를 만나 억울한 사연을 들어봤다.
 
- 해고된 사연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달라. 
 
해고는 지난 1985년에 당했다. 그때 나이가 29살이다. 당시 세아제강에는 어용노조가 있었고, 노동자를 위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를 포함해 몇 명이 임금인상을 위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동안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해고가 됐다. 사업장을 돌아다니면서 출근자와 야근자 등을 모아 400~500여명을 모아 파업을 했지만, 80년대 사회적 분위기는 ‘파업은 불법’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결국 해고를 당한 뒤 노동운동의 길로 과감히 뛰어들었다. 부당함에 맞서고,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약하나마 힘이 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국무총리 산하 기관인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리위원회'에 신청했고, 2009년 심의위에서 ‘부당 해직’ 판결을 받게 됐다. 부산파이프에서 세아제강으로 사명을 변경한 회사는 나의 복직에 대해 거부했다. 
 
- 회사가 복직 권고를 거부하는 이유가 뭔가.
 
내 나이 60세로 올해 정년 퇴직을 앞둔 나이다. 해고된 지 정확히 31년째다. 복직이 돼서 몇 개월밖에 일을 못해도 상관없다. 억울하게 해고당한 내 명예를 지키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민주화보상심리위원회에서 판결하고, 회사에 복직 권고를 했지만, 지난 9월까지도 회사는 여러 이유로 복직이 어렵다고 공문을 보내왔다. 사실 강제조항이 아닌 권고사항이다. 회사는 이행하지 않아도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다. 이를 악용한 것이다. 
앞서 복직한 사례가 있다. 지난 2009년 9월 심의회 복직 판결에 따라 세아베스틸 군산공장에 두 명이 복직한 바 있다. 물론 이 두 분은 세아제강이 아닌 세아베스틸로 회사가 다르고, 해고 사유 역시 다르긴 하다. 회사가 나의 복직을 거부하는 건 선례를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내가 민노총에서 오랜 기간 중책을 맡아 일했던 것도 회사 입장에서 큰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 심의회에서 판결이 난 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4년간 본격적으로 시위를 했지만, 이후 법원이 나에 대해 당시 서울 봉래동에 있던 세아제강 본사에 대한 접근금지가처분 판결을 내리면서 시위를 할 수 없었다. 여기에 민노총에서 중책을 맡은 것도 1인 시위를 하기에 제약이 있었다. 
세아제강은 지난 2000년에 한노총에 소속됐으나, 2006년 민노총 금속노조 산별노조로 옮겼다. 이후 철강산업이 흔들렸고, 현대제철은 참여를 했지만, 세아제강은 금속노조에 가입을 안하면서 다시 한국노총에 갔다. 이운형 회장이 돌아가신 2013년 8월말 정년연장과 임금인상을 가지고 파업을 했다. 상경투쟁도 했다. 하지만, 노조 요구안이 관철되지 않자 9월 중순 조합원 대상 민노총 가입을 재투표해 통과됐지만, 흐지부지됐다. 현재는 세아제강 노조는 애매한 상황에 놓이면서 오리무중이다. 
 
- 올해 양화대교를 두 차례 올라 시위를 했는데. 
 
올해 3월 2일부터 1인 시위를 본격화했다. 올해 정년 마지막 해로 마지막이라 생각했고, 더 늦출 수 없었다. 홀로 나와 회사 정문에서 조용히 1인 시위를 했지만,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지난 3월 25일 세아제강이 마포구 공덕동 한국사회복지회관 대회의실에서 주주총회를 열었는데, 홀로 시위를 했지만, 무시했다. 
고민 끝에 세아제강 사무실에서 볼 수 있는 양화대교에 오르기로 맘먹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말렸고, 나 역시 올라갈 수 있을까 싶어 겁도 났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아 가능했다. 1차 양화대교 시위는 3월 24일이다. 당시 오전 8시에 올라 11시30분쯤 내려왔던 걸로 기억한다. 경찰의 중재로 세아제강 담당 기획이사가 왔고, 4월 20일까지 복직에 대해 대화를 하기로 합의하고 내려왔다. 
 
김정근 씨는 올해 3월24일 양화대교에 올라 시위를 했고, 이후 협상이 결렬돼 4월25일 다시 양화대교에 올랐다. 사진/민노총
 
이후 중재 협상을 했는데, 회사에서 나에게 전달한 내용은 ‘부당 해고가 아니다’, ‘복직만은 어렵다’, ‘때문에 협상할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협상에 대한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회사로부터 이런 답변을 받자 상실감이 컸다. 회사는 외부 전문 법률사무소를 고용해 여러 검토를 한 듯 했다. 
결국 4월 25일 2차로 양화대교에 올랐다. 지난 1985년 파업 당시 날짜가 4월 25일이다. 31년 전 오늘 파업을 통해 해고됐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나는 다시 투쟁하고 있었던 것이다. 1차 때와 달리 회사는 ‘해볼 테면 해봐라’는 식으로 방관했다. 경찰의 중재로 5월 13일까지 해결하기로 협의했지만, 회사의 입장은 변함이 없다. 답답하다. 
 
- 정년을 앞두고 있는데, 복직이 큰 의미가 있나.
 
몇 차례 협상을 진행했지만, 회사는 뒤로 민주화보상심리위원회 판결이 잘못됐다는 ‘판결 취소 가처분 소송’을 제기 했다. 나도 이 같은 사실을 몰랐는데, 6월 중순 알고보니 협상이 아닌 방대한 자료를 들고 와 가처분 신청을 내겠다며, 일방적 통보를 했다. 사실 작은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대기업이 개인을 상대로 온갖 방법들을 동원해 억누르듯 문제해결에 나서는 게 시위에 나서고 이유고, 복직 판결이 났지만, 부당 해고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문제다. 명예 회복을 위해 복직을 할 것이다. 그리고 불과 정년 2개월이 남겨놓은 상태에서 복직은 의미가 없다. 반듯이 복직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부당 해고가 됐으니 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회사는 언론을 만나 내가 경제적으로 많은 돈을 요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보상은 내 맘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 대법원 판결 기준으로 평균 임금의 70%를 요구했다. 때문에 회사의 부당해고 인정이 선결과제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 1인 시위를 할 때 가장 힘든 점은.  
 
나는 27살에 입사했고, 29살 해고가 됐다. 3년을 다녔다. 젊어서 애사심이나 그런 걸 느끼기에는 사실 짧은 기간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운형 회장님이 좋은 분이라는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회사는 민노총 소속인 나를 복직 시키는 게 상징적인 측면에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세아제강의 계열사가 20여개 정도 있는데, 민노총 소속으로 활동하는 게 달갑지 않은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 가족을 생각할 때가 가장 힘들지 않나 싶다. 올해 5월부터 현수막을 걸었는데, 혼자서 모든 걸 하려니 너무 힘든 싸움이었다. 
새벽부터 일하는 집사람이 회사를 그만두고 나를 돕겠다고 나섰다. 집사람을 볼 때면 말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고생시키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래도 두 아들도 큰 힘이 돼 준다. 모두 장성해 큰 아들은 29살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둘째는 21살로 제주도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 가족이 가장 큰 힘이 되고 있다.
 
- 부인은 어떻게 만났는지.
 
아내는 80년대부터 해태제과 노조운동을 했다. 나보다 앞장서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당시 종로에서 가두 시위를 하다가 구속이 됐다. 20대 젊은 나이에 낮에는 가족을 위해 일을 했고, 저녁에는 야학을 다니면서 공부를 배웠다. 당시 인연은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다. 
1987년 11월 나와 결혼 하면서 집사람은 가정주부와 직장인으로 사실상 가장이 됐다. 먹고 살아야 해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여의도에서 건물 청소를 다녔다. 얼마 전 회사를 그만 두고 나를 돕고 있다. 나의 경우 민노총 총무국 소속이어서 올해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 휴가가 끝났고, 지금은 연월차 휴가를 내서 집회에 나서고 있다. 11월 이후에는 무급 휴가를 내서라도 복직 및 보상을 위해 회사와 싸워나갈 계획이다. 올해가 끝나면 복직이 아닌 보상으로 가야 한다.  
 
- 앞으로 계획은. 
 
주변에서 “또 다시 양화대교에 올라가야 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있고, “너무 힘든데, 이제 끝내는 게 어떻겠냐”며 나에게 조언을 해준다. 양화대교를 두번 올라가 봤는데, 회사는 꼼짝도 안 하는 걸 보면서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도 없다. 
다만,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는 확고하다. 집사람과 둘이서 본사에서 시위하면, 외국손님도 많아 회사에서 엄청나게 부담을 느끼고 있다. 또 합정역 주변은 강화, 인천, 김포, 일산 등을 운행하는 버스가 엄청나게 다니는 교통요충지로 1인 시위 효과가 충분하다. 
많은 분이 응원을 해줘서 힘이 난다. 이제 찬바람이 불고, 추워지면서 천막농성도 준비하고 있다. 집회신고만 하면 가능하다. 24시간 농성장을 보위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 
 
김영택 기자 ykim98@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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