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기자
닫기
최한영

(현장에서 느끼다)해태가 롯데를 만났을 때

2017-04-25 00:26

조회수 : 2,272

크게 작게
URL 프린트 페이스북
최한영 정경부 기자
한 국가에서 프로스포츠가 활성화되려면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적어도 2만 달러는 넘어야 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에 프로야구가 도입되는 과정은 지극히 부자연스러웠다. 1인당 GNP 1500달러에 불과했던 지난 1982년, 고작 6개 팀 체제로 프로야구가 출범한데는 잘 알려진대로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1979년 12·12 쿠데타와 이듬해 ‘체육관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국민들의 이목을 돌리기 위해 선택한 ‘3S(스포츠·스크린·섹스) 정책’ 중 한 축이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프로야구는 정권 차원의 대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인기 스포츠로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프로야구가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지역 연고제가 꼽힌다. 이 중 광주를 연고로 둔 해태타이거즈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가 가득했던 호남민들의 울분을 토해내는 대상이었다. 해태 홈경기가 있는 날 광주 무등야구장은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소리칠 수 있는 공간이 됐다. 3년 간의 스페인 내전을 거쳐 권좌에 오른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 축구팀 FC바르셀로나 홈구장 ‘누캄프’에서만큼은 카탈루냐 인들이 그들의 언어로 울분과 분노를 표출할 수 있도록 한 것과 비슷하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무등야구장에서 해태를 대표하는 응원가로, 청승맞기 짝이 없는 ‘목포의 눈물’이 불린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목포의 눈물은 호남 사람들에게는 김대중의 좌절과 슬픈 도전을, 그래서 끝내 중앙정치 무대와 경제발전 과정에서 소외되고 짓밟혀온 호남인들 자신의 한을 달래는 노래였다. 그리고 해태타이거즈 우승의 감격을 보듬어주는 응원가이기도 했다”(김은식 저, 해태타이거즈와 김대중).

시간이 흘러 해태는 팀 이름이 기아로 바뀐다. 경기장도 무등야구장에서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로 옮겨갔다. 그리고 더 이상 기아 홈경기에서 목포의 눈물은 불리지 않는다. 민주당의 한 호남지역 당직자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 기아 응원가가 목포의 눈물에서 남행열차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지역 내에서 야구의 기능이 ‘한의 표출’에서 여가생활 향유로 바뀌어감을 보여주는 예다. 홈팀 관중들이 상대편 선수들에게 맥주캔, 소주병 등을 던지는 것에 대비해 원정팀 외야 수비수들이 헬멧을 쓰고 경기에 나섰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도 이제는 올드 야구팬들 사이에서나 기억되는 중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야구의 사회통합 기능에까지 주목하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이듬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통해 야구는 전 국민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가 됐고 진정한 국민스포츠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야구의 이미지가 기존 ‘갈등’에서 ‘화합’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19대 대선을 앞두고 각 후보들의 전국순회 유세가 한창인 가운데 지난 18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광주 충장로를 찾았다. 이 자리에서 문 후보는 해태 야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김응룡·김성한 전 감독으로부터 해태타이거즈 빨간 유니폼을 전달받아 착용했다. 22일 부산 서면 유세에서는 부산 야구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박정태 전 롯데자이언츠 2군 감독으로부터 파란색 롯데 유니폼을 전달받고 사직야구장만의 독특한 응원문화인 주황색 봉지를 머리에 쓰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전국에서 골고루 지지받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문 후보가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야구팀의 유니폼을 며칠 사이로 착용하며, 지역통합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살을 붙이면 너무 과도한 해석일까.

스포츠와 정치의 만남을 통한 통합의 순기능, 사실 생소하지만은 않다. 지난 2009년 개봉한 영화 ‘우리가 꿈꾸는 기적 : 인빅터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럭비 국가대표팀 이야기를 다룬다. 남아공은 우리의 지역감정을 상회하는 흑백갈등을 경험한 나라다. 27년 간의 교도소 생활을 버텨낸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모건 프리먼 분)가 남아공 대통령이 되었지만 갈등은 여전했다. 럭비만 놓고 봐도 백인들은 남아공의 새로운 국기·국가를 사용하지 않았고, 흑인들은 자국 대신 영국팀을 응원하는 것으로 백인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델라 대통령이 선택한 방법은 결국 통합이었다. 영화에서 그는 럭비팀 주장 프랑수아 피에나르(맷 데이먼 분)를 만나 1995년 자국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에서의 우승을 기원한다. 피부색에 관계없이 대표팀을 응원하고 선수들이 자국에 우승을 안겨줌으로써 전체 국민들이 기쁨을 누리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실제 남아공 럭비 대표팀은 우승을 차지하며 갈등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계기가 됐다.
 
기존 지역감정이 완화되는 대신 세대, 계층별 갈등이 심각해지고 있는 한국에서 스포츠가 지닌 통합의 순기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우리에게도 꿈만은 아닐 것으로 믿는다.
 
(왼쪽)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가 지난 18일 오후 광주광역시 충장로 입구에서 진행된 집중유세에서 프로야구 해태 왕조를 이끈 김응룡·김성한 전 감독이 선물한 해태 유니폼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른쪽)문 후보가 지난 22일 부산 서면 젊음의 거리에서 진행된 부산지역 집중유세에서 롯데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최한영 정경부 기자
  • 최한영

  • 뉴스카페
  •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