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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79화)하늘로 올라간 노동자들

“누군가가 대변하지 않아도 되었다”

2017-09-04 08:00

조회수 : 7,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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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22일~30일 경복궁역 메트로전시관 1관에는 ‘1987 노동자대투쟁 30주년 기념 노동전시회’라는 매우 드물고 뜻깊은 전시회가 열렸다.(민주노총, 노동자역사 한내, 서울지하철노동조합 주관) 1987년 7·8·9월 산처럼 일어났던 노동자대투쟁의 기록뿐만 아니라 87년 이래 노동조합 30년의 역사, 나아가 노동자역사 120년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감회 깊은 전시여서 짧은 전시기간이 못내 아쉬움을 자아냈다. 대한민국 역사상 아마도 최초였을 이 ‘노동전시회’는 참으로 살아있는 역사의 전시장이어서 중·고교생들이 단체견학을 온다면 생생한 교육현장이 되겠다싶기도 했고 전국순회전시를 통해 보다 많은 국민들이 관람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지기도 했다.
 
1987 노동자대투쟁 30주년 기념 노동전시회를 둘러보는 관람객들. 앞의 왼쪽은 징시계, 오른쪽은 전태일노동상. 사진/필자 제공
 
을밀대의 노동자 강주룡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30년, 8월의 끝자락에 만난 ‘87노동자대투쟁 30주년 기념 노동전시회’는 지난 세월 한국사회의 노동운동이 지나온 궤도와 현재를 돌이켜보게 한다. 지난 2011년,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1월6일부터 11월10일까지 309일간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투쟁이 보도되면서 당시 대중적으로 새롭게 조명되었던 역사적 인물이 있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1901~1932), 1931년 5월28일에서 29일로 넘어가던 밤 광목천을 줄 삼아 타고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라 29일 새벽에 모여든 100여 명의 산보객 앞에서 사측의 일방적인 임금삭감의 부당함을 폭로했던 노동자, ‘최초의 고공농성자’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이 놀라운 인물에 대한 <만인보>의 시 ‘을밀대’는 1986년에 출판된 <만인보> 1권에 실려 있는데, 이는 고은 시인이 우리 사회의 언론과 대중이 주목하기 훨씬 전에 이미 강주룡의 삶을 접하고 시로 형상화했다는 것을 뜻한다. (단, 이 시에 역사정보 상의 오류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시인이 집필할 당시 정확한 정보를 얻기는 어려웠던 듯싶다. 오류의 일부는 2010년도 개정판에서 정정되었고 일부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나라 여자는 슬픈 여자가 아닙니다
한 많은 여자가 아닙니다
그놈의 한이란 반역입니다
이 나라 여자는 밭에서 자식 앞에서 눈 부릅뜬 역사입니다
< … >
이 나라 여성은 싸낙배기 투가리입니다
밑구멍 스무 개 뚫린 시루입니다 가마솥입니다
 
그 이름 강주룡
압록강 굽이 강계에서 태어나
열네살에 만주땅 서간도 건너가
스무살에 독립단 수령 백광운부대 제2지대의 한 병사 아내가 되어
성난 독립운동 뒤에 따라다니며
독립군 밥해주었는데
일년 뒤 딸 하나 두고 남편이 눈감았습니다
스물넷에 딸 데리고 돌아와
평양에 머물러 친정부모 동생들 생계까지 도맡게 됩니다
공장 여공이 됩니다
1931년 평원고무공장 파업 주동자로 단식동맹을 이끌어갑니다
그 단식동맹의 여공들 강제해산당하자
을밀대에 올라가 목매어 죽으려고
광목 한 필 사가지고
대동강 위 을밀대로 올라갑니다
그는 죽어서 여공의 싸움 만천하에 알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음보다는 끝까지 살아서 싸워야겠다고 생각 돌려서
을밀대 지붕 위로 광목 끈 삼아 올라갑니다
40여척이나 되는 꼭대기에서
이른 아침 을밀대 오르는 평양사람들에게
이 땅의 여공 강주룡은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2천3백 고무공장 직공 임금인하와 죽기로써 싸웁니다
평양에는 부자가 많아
국일관에는 연일 풍악소리 요란한데
이런 흥청망청이 다 우리 직공의 피땀입니다
나는 평원고무 사장이 임금인하를 취소하기까지는
여기서 내려가지 않습니다
죽음을 각오합니다 누가 나를 강제로 끌어낼 생각 마시오
그러면 나는 여기서 떨어져 죽을 터입니다
 
1931년 5월 21일자 신문
평원고무 쟁의 평양 을밀대 체공녀 나타남 사십척 고공에서 연설
모란대 위에 올라선 여투사 이번에는 단식으로 완강히 버티다
 
그렇습니다 강주룡은 지붕에서 고공농성 했습니다
그러다가 몰래 기어오른 소방관들이 밀어뜨려 잡혀버렸습니다
그 뒤 1935년
만 4년의 감옥 평양형무소 남사 저쪽 여사에서 나왔습니다
나와서 배 곯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과연 이 나라 여자입니다
이 싸움이 이 나라 여자의 삶과 죽음입니다
한이라고?
그 무슨 개수작인고?
퉤 천년 묵은 한! 아나 한! 한 좋아하네
(‘을밀대’, 1권)
 
강주룡의 고공농성에 대한 보도들은 (21일이 아니라) 5월30·31일자 신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29년 대공황의 여파는 일본제국주의의 자본에도 미쳐 노동자들은 임금삭감이나 해고, 노동시간 연장과 노동강도 강화와 같은 악조건에 시달리게 된다. 강주룡은 이미 1930년 평양고무직공조합이 임금인하와 해고에 반대해 8월부터 9월 초까지 진행한 파업투쟁에 참여했었다. 당시 2천여 명의 파업노동자들 중 3분의 2가 여성노동자로 기혼여성들이 많았다고 하니, 이들이 임금인하·해고 반대뿐만 아니라 ‘산전 산후 3주간 휴양과 생활보장, 수유시간 자유' 같은 요구를 한 것도 필연적인 것이었다. 임금이 싼 고무신발공장에는 식민지 조선의 여성노동자들이 많았는데, 1929년 기준 공장노동자의 임금이 일본인 남성 2.32원, 일본인 여성 1.21원, 한국인 남성 1.00원, 한국인 여성 0.59원이었다고 하니, 이들은 일본인 남성노동자들의 4분의 1 수준으로 임금을 받은 셈이다. 게다가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아기의 젖을 물리고 남자감독관으로부터 몸 검사, 폭행, 성희롱을 받아가며 12시간 이상 심지어 15시간까지도 노동을 해야 했던 것이다.
 
강주룡은 이듬해인 1931년 5월 평양 선교리의 평원고무공장노동자들의 임금삭감반대 파업투쟁을 이끌었는데, 이들의 싸움은 그 결과에 따라 다른 고무공장들에서 일하는 2300여 노동자들의 임금삭감에도 영향력을 미치게 될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잡지에 실린 강주룡의 을밀대 연설 내용은 자신의 공장 동료들뿐만 아니라 전체 노동자를 생각하는 그녀의 노동자 연대의식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강고한 의지를 보여주며 그들이 처했던 절박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賃金減下)를 크게 역이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平壤)의 2300명 고무직공의 賃金減下의 원인이 될 것임으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랴는 것입니다. < … >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집웅 우에 올라 왓습니다. 나는 평원(平元) 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賃金減下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겟습니다.”(<동광> 제23호, 1931년 7월 5일)
 
약 8시간 만에 소방대원에 의해 떠밀려 지붕에서 내려오게 된 강주룡은 옥중에서 76시간의 단식농성 후 검속시간이 끝나 풀려난다. 그녀는 곧바로 투쟁을 계속해 자신은 비록 해고되었지만 마침내 임금삭감 저지에 성공한다. 그러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활동가이던 그녀는 ‘평양 적색노조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6월 9일 다시 검거되고 만다. 옥중 단식을 하며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에 시달리던 강주룡은 (1935년이 아니라) 1932년 병보석으로 풀려나지만 수감생활 중 얻은 병으로 인해 결국 두 달 후인 8월 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만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동광>지에 실린 그녀의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14살 때 서간도로 건너간 강주룡은 여러 해 동안 농사꾼으로 살았고, 20살 때 다섯 살 어린 최전빈과 결혼해 이듬해 남편과 함께 백광운의 독립군부대 2중대에서 활동했으며, 남편이 죽은 후에는 귀국해 1926년부터 평양의 고무공장노동자가 되었다. 이후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 파업투쟁을 이끌고 을밀대에서 고공농성을 결행하는 지도적 노동자로 성장하기까지 그녀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을지는 가히 짐작할만하다. 남편의 죽음을 그녀의 탓으로 돌려 중국 경찰에 고발했던 시집이니 시집살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고국에 돌아와 친정 식구들을 부양하는 가장으로서 살아야 했던 노동자의 삶도 몹시 고단하고 곤곤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노동운동사에 고공투쟁의 첫 기록을 남길 정도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 열심히, 강건하게 싸운 노동자였다.
 
2011년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서 309일째 고공농성을 벌이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농성을 풀고 내려온 뒤 소감을 말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굴뚝, 크레인, 송전탑, 광고탑으로부터의 소리 없는 절규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출신인 김진숙 지도위원이 올라갔던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의 85호 크레인은 2003년 고 김주익 전국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이 129일간 농성을 벌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곳이다. 한진중공업은 구조조정 철회라는 노사 간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고 2001년 말부터 정리해고를 예고하기 시작했다. 2002년 한 해 동안 희망퇴직·명예퇴직·정리해고로 600여 명의 노동자를 떠나보낸 이 기업의 같은 해 매출액은 1조6000억 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동조합 간부들에 대한 18억여 원의 손해 배상 가압류 처분, 고소·고발, 노동조합원의 징계위원회 회부 등 노조활동과 노조원들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자 2003년 6월11일 밤 김주익 지회장은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가 목숨을 건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권력의 투입과 사측의 회유·협박 속에 궁핍에 시달리던 노조원들이 속속 파업 대오를 이탈하게 되고 김주익 지회장은 결국 10월17일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그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투쟁의 현장을 떠났던 동료 곽재규 노동자의 자책을 불러오고 10월 30일 마침내 85호 크레인 맞은 편 도크 위에서 투신 자결하게 만드는 연이은 비극을 낳았다.
 
85호 크레인 이전에도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하늘을 향해 올라야 했다. 크레인에, 굴뚝에, 송전탑에, 광고탑에 오른 이들은 더 이상 탈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절망의 심정으로 희망을 부여잡기 위해 하늘로 향했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을밀대 지붕으로 올라간 강주룡의 심정과 그가 처했던 현실은 이후의 역사 속에서 다시 많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문제는 우리들의 귀가 둔감해져 고공에서의 외침을, 그 소리 없는 절규를 종종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들에게 회의의 시선과 비판의 목소리를 보낼지도 모르나 그 회의와 비판 이전에 먼저 ‘외침의 내용’을 알아볼 일이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귀를 열어두고 그 귀를 열심히 하늘에 고립되어 있는 그들에게 기울일 일이다.
 
스스로를 대변할 권리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도약이 있기 전, 누군가에 의해 수동적으로 ‘대변당해야’ 할 존재처럼 여겨지던 노동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글로 담아내 한국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준 적이 있다. 관에 의한 ‘근로자 모범수기’식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노동현실이 생생한 목소리로 담긴 진정한 수기들로, 1970년대 말에 시작되어 80년대에 활발히 확산되었다. 그 대표작이 월간 <대화>(1977년 1~3월)에 연재되다가 <어느 돌멩이의 외침>(1978년)이라는 책으로 출간된 인천 삼원섬유노동자 유동우의 수기와, 역시 월간 <대화>(1976년 11~12월)에 ‘어느 여공의 일기’라는 부제와 함께 ‘인간답게 살고 싶다’, ‘불타는 눈물’로 연재되고 1984년 보완작업을 거쳐 <공장의 불빛>이라는 책으로 출판된 동일방직노동자 석정남의 수기이다. <공장의 불빛>이란 제목은 1978년 11~12월 사이에 제작된 김민기의 창작노래굿 <공장의 불빛>에서 따왔는데, 이 작품 역시 동일방직노동자들의 투쟁과 연관되어 있다(동일방직사건에 대해서는 본 연재 제7화 참조). 고은 시인은 노동자문학과 노동문학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의의를 갖는 이 두 수기의 저자들을 잊지 않고 <만인보>에서 언급한다.
 
헤겔의 <역사철학>이 그렇게 썼던가
아시아인은
누군가가 대변해주어야 할 대상이다라고
그 뒤 누군가가 말한다
노동자는
누군가가 대변해야 할 대상이다라고
 
이런 말을 알든 모르든
여공 석정남의 수기를 읽고 먹물들 놀랐다
 
그 처녀는 공장 구석구석을 그려냈다
그 처녀는 공장 밖의 세상도 생생하게 그려냈다
풀빵 열 개의 점심 뒤 세상이 잘 보였다
누군가가 대변하지 않아도 되었다
 
< … >
석정남
그 얼굴은 둥글었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양날의 칼이 썸벅썸벅
 
누가 밥을 사주면
한번에 설렁탕 두 그릇 당당하게 먹었다
아무 부끄러움도 필요없다
그렇다 일하는 놈들 당당할 것
(‘석정남’, 13권)
 
한편, “깡마른 몸매 / 깎인 턱 / 코끝이 날카롭”고 “그의 입에서 네 네라는 대답은 없”는 “공장 노동자 유동우”도 “노동현장의 글을 썼다 / 노동자가 대변해주는 대상이 아니라 /
스스로 대변하는 때가 왔다“(‘유동우’, 13권). 2017년 오늘도 스스로를 대변하는 노동자, 그들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고 있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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