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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최인숙의 파리와 서울 사이)물신숭배의 종말

2018-04-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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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절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글귀들이 많다. 마태복음 19장 23절(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의 구절이 그 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는 이 말이 요즘처럼 새롭게 와 닿는 때가 또 있었던가. 한국 재벌들의 행태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차녀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폭언과 이른바 물컵 파동을 보니 ‘땅콩회항’ 사건으로 구치소 생활까지 한 언니로부터 동생은 그 어떤 교훈도 받지 못했나 보다. 그뿐인가. 조 전무 어머니의 폭언도 만만치 않다는 폭로가 뒤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한항공 일등석에 명품 가방이나 식재료 등을 세금 한 푼 내지 않은 채 들여왔다는 관세포탈 의혹마저 받고 있다.
 
촛불혁명을 통해 대한민국은 많이 달라지고 있는데 조씨 일가의 사고는 봉건시대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들에게는 돈이 능사인 것인가. 상당수 다른 재벌 총수들도 감옥을 다녀왔거나 현재 수감 중이다. 이를 두고 일반 국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국 재벌”이라고 꼬집는다. 이러니 어디 부자가 천국에 갈 수 있겠는가.
 
다른 나라 부자들도 마찬가지일까. 프랑스의 경우 지난 2007년 9월10일 프랑스 일간지 <엑스프레스>에 ‘프랑스 기업회장들 역시 마음이 고결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신문은 미국의 빌 게이츠처럼 프랑스의 몇몇 기업 회장들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박애주의자라며 프랑스의 1등 부자(보유재산 330억유로, 한화 약 45조원)인 로레알(L'Oreal) 회장 릴리안 베땅쿠르(Liliane Bettencourt)가 개발도상국 에이즈 환자와 제3세계 심장병 어린이들을 위해 1억유로(한화 약 1316억원)를 기부했다고 소개했다.
 
또한 프랑스의 3등 부자(보유재산 260억유로, 한화 약 34조원)인 오샹그룹(Auchan, 유통회사) 뮐리에(Mulliez) 일가의 자선행위도 소개했다. 오샹 그룹은 대형 슈퍼마켓 뿐만 아니라 생 마클루(Saint Maclou, 양탄자와 타일), 키아비(Kiabi, 섬유 및 인테리어), 불랑제(Boulanger, 제빵), 데카틀롱(Decathlon, 스포츠용품) 등을 유통·판매하는 많은 계열사를 가지고 있다. 1960년대 이래 확장을 거듭해 지금은 프랑스 전역에 40여개의 체인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북부의 쁘띠 부르주아 출신이고 전통 가톨릭 집안인 이들은 비밀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뮐리에 일가는 대중 앞에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살아왔다. 르몽드의 니콜라 베스코바치(Nicolas Vescovacci) 기자가 이들 중 한 명을 인터뷰하고자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그들은 언론의 인터뷰에 절대 응하지 않고 사진을 공개하는 일도 아주 드물다. 뮐리에 일가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숨어서 살자”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여러 자선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캄보디아를 위해 행동하라(Agir pour le Cambodge)’ 이고,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 말리의 투아레그족(touareg) 난민을 위한 자선기구인 아틀릭(Atlik)이다.
 
이처럼 오샹그룹 오너 일가는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좋은 기업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지난 2016년 이들 중 한 사람이 오샹그룹의 탈세와 돈세탁을 밀고했고 이로 인해 검찰은 압수수색을 벌였다. 그 결과 키아비 창립자인 파트릭 뮐리에(Patrick Mulliez)는 거의 세금을 내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고 기업은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프랑스 1등 부자였던 베땅쿠르도 프랑스인들에게 성공의 화신으로 추앙받아 왔지만 말년에 ‘베땅꾸르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추락했다. 게다가 정경유착의 오명까지 쓰게 되면서 지난해 9월 세상을 떠날 때 민심은 차갑게 변해 있었다.
 
이를 통해 부자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모든 부자가 다 그렇다고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업 경영자들이 이익금을 제대로 사원들에게 나눠주고 정직하게 세금을 낸다면 그들의 빌딩이 저처럼 화려하고 하늘 높이 치솟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성경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라는 구절도 있다. 참된 마음을 가지고 사노라면 행복과 평화는 그들의 것이 될 수 있다. 정직을 최우선으로 삼아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고 타인을 존중할 때 인간은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한국의 재벌과 프랑스 부자들에게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돈이 능사’라는 물신숭배의 끝에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죽어서 천국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살아생전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나만큼 남을 존중하고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 돈이 능사라는 재벌들의 삶은 불명예로 끝나기 일쑤다. 역설적으로 부자들보다 소시민을 더 부자로 보는 까닭은 물신의 노예로 전락할 소지가 좀 더 적기 때문이다.
 
최인숙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연구교수(파리정치대학 정치학 박사)
 
* 편집자 주 : 필자 최인숙은 파리에서 10년간 체류했고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에서 한국, 일본, 프랑스 여론 연구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프랑스 정치현상을 잣대로 한국의 정치현실 개선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 ‘빠리정치 서울정치(매경출판)’를 펴냈다.
‘파리와 서울 사이’는 한국과 프랑스의 정치·사회현상을 비교 분석하는 연재 코너로 <뉴스토마토> 지면에는 매주 화요일자 23면에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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