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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레이첼 야마가타의 겨울 음표, 그 아늑함 속으로

사랑과 위로를 음표로 그려낸 레이첼…5일간 서울과 부산 2500여 관객과 교감

2018-11-1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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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땅거미 질 무렵의 회색 빛 하늘, 나뭇가지 위에 있다 날아가는 새, 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 무채색 계열의 자연 풍경이 교차하며 한없이 춥고 고독한 심상을 뿜어내고 있었다.
 
잠시 뒤 은은한 빛을 나란히 뿜어내는 촛불들로 화면 전환. 피아노 앞에 앉아 관객들과 스크린을 함께 바라보던 그가 조심스레 마이크에 입을 갖다 댔다. “제가 2016년 홈레코딩으로 직접 찍은 영상이죠. 저긴 바로 우리 집 거실이랍니다. 저렇게 (헤드폰을 쓰고) 가사를 다듬으며 녹음을 했었죠.”
 
지난 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레이첼 야마가타의 10번째 내한 공연. 마치 집에 친구를 초대한 것처럼 그는 초반부터 관객들을 온화하고 따스하게 맞아주었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한국은 저에겐 고향과 같은 곳이에요. 오늘은 워싱턴디시에서 여기까지 와주신 아버지도 여러분과 함께 공연을 보고 계세요. 제가 올 때 마다 모두 친절하게, 그리고 각자 아름다운 방식으로 저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첼 야마가타. 사진/에이아이엠
 
2003년 EP앨범 'EP'로 데뷔와 동시에 빌보드에서 주목 받은 그는 4개의 정규를 비롯한 각종 OST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국내에서도 정규 1집 '해픈스탠스(Happenstance)' 수록곡 '비 비 유어 러브(Be Be Your Love)', 2집 '엘리펀츠…티스 싱킹 인투 하트(Elephants…Teeth Sinking into Heart)' 수록곡 '듀엣(Duet)' 등이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삽입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최근 국내 인기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OST 작업에 참여한 곡은 국내 스트리밍 사이트 1위를 기록하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공연으로도 한국과의 연은 10년째 꾸준히 맺어오고 있다. 2009년 첫 공연을 한 후로 2011~2016년까지 해마다 한국을 찾았다. 올해 10회째인 공연은 새 EP 앨범 '포치 송스(Porch Songs)' 발매를 기념한 투어 일환이다. 
 
6~7일 부산 동아대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이번 내한은 당초 총 4회로 계획됐다. 하지만 빠른 매진과 팬들의 지속적인 요청에 주최 측인 공연기획사 에이아이엠은 11일 서울 올림픽공원 뮤즈 라이브홀에서 1회 공연을 추가시켰다. 주최 측에 따르면 5일간 총 2500여명의 팬들이 몰려 들었다. 
 
레이첼 야마가타의 공연이 열린 연세대 백주년기념관. 사진/에이아이엠
 
이날 8시40분쯤 손을 흔들며 등장한 레이첼은 피아노 앞에 앉아 첫 곡 ‘딜브레이커(Dealbreaker)’로 인사를 대신했다. 비오는 날 차 안에서 찍은 그의 영상이 뒤의 스크린에 흘렀고, 그는 ‘상실’의 아픔을 덤덤히 읊조리듯 노래했다.
 
‘당신이 찾던 레코드를 어제 찾았어요/ 내가 계속해서 찾던 거였죠/ 밤새 그 레코드를 들었어요,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네요/ 그래요, 모든 건 무의미해요/ 모든 게 무의미하죠/ 당신이 없으면’
 
삶의 변화를 꾹꾹 눌러 담는 그의 가사는 마음을 위로하는 한 편의 수필 같다. 계속되는 싸움으로 마음에 생채기 난 연인들을 위해 ‘자존심 무게’를 같이 조금만 줄여보면 어떻냐 권하기도 하고(‘Heavyweight’), 내 머릿 속에 들어찬 당신을 지우기 위해 하염없는 비를 바라보기도 한다.(‘Over and over’) 언어 하나, 하나에 영혼 한 줌이 서려 있는 것 같은 사랑과 삶의 이야기들. 무거운 호흡으로 뱉어내는 깊은 서정의 음악은 이른 겨울의 소리를 앞당겨 연상시킨다.
 
레이첼 야마가타. 사진/에이아이엠
‘모두가 제게 넌, 넌, 넌 그의 사랑이 될 수 없다 말하죠. 하지만 난 원하고 원해요. 당신의 사랑이 되길. 당신의 사랑이 되길 원해요, 정말로’ (‘Be Be Your Love’)
 
차고 모진 상황마저 위로하고 사랑하는 방식이 마치 겨울날 벽난로 앞에서 보내는 아늑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공연장에선 아날로그틱한 영상이 곡의 끓는점을 천천히 한계치까지 끌어 올렸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커튼 장식과 초록색 풀이 무성한 나무, 간간히 내리는 빗줄기와 비가 그친 후 맑은 하늘의 무지개. 레이첼이 직접 찍은 자연 풍경들은 사계절을 지나 마지막에 이를 무렵 아름답게 피어난 눈 꽃송이로 막을 내린다.
 
레이첼 야마가타. 사진/에이아이엠
 
곡들의 정서는 대체로 무겁고 진중했지만 레이첼은 시종 밝고 털털한 유머를 구사하며 유쾌한 면모를 가감없이 드러냈다.
 
‘아이 원 유(I Want You)’를 부르기 전에는 “고양이를 좋아하냐”고 물으며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 사진들을 여러 장 보여주기도 하고, ‘썸띵 인 더 레인(Something In The Rain)’ 전에는 “(밥 잘 사주는 누나의) 드라마 영어 제목이 ‘프리티 오덜 시스터(Pretty Older Sister)’가 맞냐”고 장난스레 묻기도 했다.
 
‘렛 미 비 유어 걸(Let Me Be Your Girl)’ 때는 아예 무대 아래로 내려오더니 관객들과 하이파이브를 시도했다. 다시 노래를 부르려 할 때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방탄소년단(BTS)은 무대에서 어떻게 그렇게 뛰어도 노래를 잘 부르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관객들이 ‘빵’하고 터지기도 했다.
 
‘비 섬바디스 러브(Be Somebody’s Love)’, ‘아이 위시 유 러브(I Wish You Love)’로 앙코르 두 곡까지 마친 레이첼은 “때때로 외로울 때도 있지만 늘 여러분과 ‘연결’돼 있다고 느낄 때면 마음이 행복해진다”며 따뜻한 작별 인사도 건넸다.
 
총 2시간여의 긴 무대가 끝나고 공연장을 나설 즈음 레이첼이 공연 시작 전 스크린에 걸어뒀던 문구가 다시금 생각 났다. “지난해 상실을 비롯한 급진적 삶의 변화를 겪었다”고 인터뷰에서 전한 레이첼의 감정이 오롯이 투영된 듯한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의 말.
 
“음악은 나의 피난처였다. 나는 음표들 사이의 공간으로 기어 들어가 외로움 쪽으로 몸을 기울일 수 있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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