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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법썰)'포토라인' 위의 두 사람

2018-11-30 13:38

조회수 :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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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손님'들과 포토라인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기자들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경찰이나 검찰, 법원이 손님을 부르면(출석요구·영장실질심사 통지 등) 고위공직자나 재벌총수 등 공인들은 경우 포토라인이 그려지게 됩니다. 위치나 가이드라인은 통상 기관 공보관과 카메라기자단 간사가 협의해 정합니다. 의견이 엇갈릴 경우에는 취재기자단 간사가 중재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워낙 많은 손님들이 오기 때문에 청사마다 한 곳쯤은 관행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지난 3월14일 이명박 전 대통령 출석을 앞두고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에 설치된 포토라인. 사진/최기철
 
대부분 청사 정문 현관 앞이 되겠는데, 서초동의 경우 서울중앙지검은 중앙현관 좌측 출입구(민원실 방향) 앞, 서울중앙지법은 청사 뒷편 주차장쪽 후문 전방에 그려집니다.
 
단, 서울중앙지검의 경우 VIP급(3부 요인)이면 통상 중앙현관 계단 앞 인도에 위치합니다. 그동안 매우 드문 경우였는데 2017~2018년 사이 세분이나 서게 될 것 같습니다. VIP급이 출석하면 그 전날 서울중앙지검 앞마당과 도로변은 모두 취재차량과 부스(텐트)로 뒤덮입니다. 출석 당일에는 최첨단 고급 취재장비가 모두 투입됩니다.  2009년 4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검찰청에 출석했을 때에는, 크레인으로 끄는 지미집 카메라가 눈길을 끌었죠. 하지만 요즘은 드론이 날아다닙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진/뉴시스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3일 청구되면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연내 검찰 조사를 받을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사법농단 의혹'을 받고 있는 양 전 대법원장이 검찰에 출석한다면 여기에 그려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앞서 출석한 박병대·고영한 대법관은 일반 손님과 같은 곳에 포토라인이 찍혔습니다만, 양 전 대법원장은 우선 전 사법부 수장이라는 지위가 있고 얼마 전 김명수 대법원장 '화염병 피습'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안전과 청사보안 측면에서 다른 VIP와 같은 곳에 포토라인이 설치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은 VIP들이라고 해도 별도 위치를 정하지 않습니다. 박 전 대통령도 이 전 대통령도 모두 일반 손님과 같은 곳에 서서 플래시를 받았습니다.
 
이때 취재기자단은 일명 '풀기자'를 둡니다. 서초동(법원·검찰 등록) 출입사 40곳 가운데 신문사 기자 1명(또는 통신사 1명), 방송사 기자 1명이 임무를 맡는데 손님에게 기자단 대표로 질문을 합니다. 취재 효율성과 안전을 위해서죠. 사전에 이들은 기자단 동료들 질문을 취합해 추리고, 가까이에서 들은 손님의 말을 기자단에 공유합니다.
 
100억 원대 뇌물수수, 횡령, 조세포탈 등 혐의를 받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 조사를 받기 위해 지난 3월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출석하고 있다. 통상 포토라인 앞 질문 기자는 2~3명이 배치되지만, 이날은 이 전 대통령 요청으로 1명만 배치됐다. 사진/뉴시스
 
풀기자는 아주 말진(경험이 없는 신입이거나 서초동 출입한 지 얼마 안 된 기자)은 제외하는데, 가끔 기싸움을 시도하는 손님들 때문입니다. 대표적 인물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입니다. 그는 원장직에서 물러난 뒤 정치개입 및 여론조작 등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거나 영장실질삼사 또는 공판을 받으러 2013년부터 법원에 자주 출석했습니다. 그때마다 안전요원이라는 미명 아래 선글래스를 쓴 건장한 남성들이 그를 에워싸는 바람에 취재에 애를 먹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과 기자간 몸싸움이 발생하기도 했지요. 지금 제 기억으로, 원 전 원장은 법원과 검찰에 시위하는 듯 보였습니다.
 
노련한 풀기자는 앵무새형(아몰랑형)이나 침묵형 손님이 오면 기지를 발휘해 상당히 의미 있는 말을 끄집어 내기도 합니다. 이른바 '애드립'인데, 이 때도 지켜야 할 것은 있습니다. 인신공격이나 추궁하드싱 억지로 답변을 강요하는 질문은 하지 않습니다.
 
예외가 있기는 했죠. 2008년 4월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비리 사건' 특검 때입니다.
 
지난 2008년 4월4일 오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 조준웅 삼성특검팀에 피의자신분으로 소환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008년 4월4일 오후 2시에 서울 한남동 특검사무실로 출석했을 때입니다. 우선 화면으로 보시지요. 클릭
  
대전지검 차장검사 출신인 이완수 변호사를 대동하고 등장한 이 회장은 매우 여유가 있었습니다. 풀기자들이 질문 공세를 퍼부었지만 여의치 않습니다.
 
기자 :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을 직접 지시했습니까?
이 회장 :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다.
 
기자 : 삼성생명 차명 주식이 이병철 선대회장의 상속재산입니까?
이 회장 : 잘 모르겠습니다.
 
기자 : 계열사 비자금 조성을 직접 지시하셨습니까?
이 회장 : 한 적 없습니다.
 
기자 : 경영권 승계과정을 직접 보고받았습니까?
이 회장 : 아니요
 
이때 이 회장의 답변이 실망스러웠는지 기자가 무리수를 둡니다.
 
기자 : 글로벌 기업 삼성이 범죄집단처럼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나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순식간에 얼굴이 굳은 이 회장은 잠시 있다가 질문한 기자 눈을 보고 한마디 한마디 힘을 줘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회장 : 법죄집단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걸 옮긴 여러분들이 문제가 있지 않느냐 나는 그래 생각합니다.
 
이어 '정관계나 법조계 불법로비 여부·'수사 때마다 임직원만 처벌받는 선례' 등에 대한 질문이 나왔지만 이 회장은 포토라인을 바로 벗어나 조사실로 들어갑니다.
 
저 기자의 애드립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평가가 엇갈립니다. 하지만, 피의자 이 회장이 아닌 삼성그룹 전체에 대한 명예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은 대체로 일치합니다.
 
그럼 저 때 어떤 질문이 적절했을까.
 
오랜 시간 사건이나 법조를 취재해 온 베테랑들이 아껴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손님의 정의감이나 도덕의식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질문.
 
바로 '국민', '가족', '자녀' 등을 소재로 한 질문입니다.
 
1995년 11월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지검에 출석한 노태우 전 대통령. 사진/YTN 캡쳐
 
이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치 비자금 혐의 등 피의자로 서울지검에 출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취재진 질문을 듣지 않고 포토라인을 그냥 지나다시피 해서 통과했는데, 청사 안에 들어서자 조사실로 빠르게 이동합니다. 
 
이때 그를 잠깐 멈추게 한 질문이 있으니 바로 이겁니다. 클릭
 
기자 : 국민 여러분께 한 말씀 해주십시오.
 
노 전 대통령 : 국민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구속기소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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