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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현장에서)낮말과 밤말 모두 기자들이 듣는다

2019-03-0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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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영 정치부 기자
공인(公人)의 말 한 마디는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무게감이 다르다. 나라의 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냉전 막바지였던 1989년 11월9일, 귄터 샤보브스키 동독 공산당 대변인이 담화문을 발표했다. 곧 여행 자유화를 하겠다는 내용의 발표문을 읽어나가던 중, 한 기자가 언제부터 시행되는지를 물었다. 휴가를 다녀와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던 샤보브스키는 자료를 뒤적이다 "즉시"라고 답했고, 그 소식은 대서특필되어 동독 주민들에게 전해졌다. 사람들은 베를린장벽으로 몰려갔고,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했던 동독 국경수비대는 어쩔 줄 몰라할 뿐이었다. 그렇게 동독 주민들은 서베를린으로 몰려갔다.
 
지난 5일,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국회에서 '경제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국민연대'(민평련) 주최로 열린 전문가 초청간담회에 참석했다. 예상과 달리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상황에서 이를 평가하고 남북 경제협력 가능성을 전망하는 자리였다. 정상회담 둘째 날 확대회담에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배석한 장면을 언급하던 정 전 장관이 갑자기 그를 두고 "한반도 문제에서 매우 재수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인디언을 죽이는 백인 기병대 대장 생각이 났다"는 말도 이어졌다. 발언을 받아적던 기자는 순간 당황했지만, 대다수 청중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볼턴 보좌관의 미 국무부 차관 시절을 회상하며 "이사람, 헛꿈 꾸는거 아닌가 싶었다"는 등 논란이 될만한 다른 발언들도 많았다. 강연 초반 김근태 전 의원과의 일화를 소개한 점에 비춰볼 때 민평련 회원들과의 편한 자리로 생각한듯 했다.
 
정 전 장관은 이후 질의응답 과정에서 모 매체 기자가 질문하자 "아, 이 자리에 기자들이 있군요" "비보도 요청을 한다는걸 깜빡 했네요"라며 수습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상당수 매체에서 이날 강연 내용 중 "볼턴, 매우 재수없는 사람" 대목을 제목으로 뽑아 기사화했다.
 
정 전 장관은 대표적인 한반도 문제 전문가다. 그의 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향후 한반도 정세변화를 점친다. 그런 그가 미국 고위관계자를 언급할 때는 자리의 경중을 떠나 신중한 단어를 선택했어야 했다. 말 한 마디 잘못해서 일을 그르치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경우는 우리 역사에서 부지기수다.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의 "동맹국 미국의 전 국무장관이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가래침을 뱉은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류의 비판이 미국에서 나온다면 어찌할 것인가. 문득 볼턴 보좌관이 5일(현지시간) "북한이 비핵화를 하지 않으려하면 우리는 대북제재를 강화하는 방안을 들여다볼 것"이라고 말한 대목이 겹친다.
 
예전에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들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낮말과 밤말 모두 기자들이 듣는다. 이런 내용이 기사에 오르내리는 순간 우리 정부 당국자들이 감당해야 할 무게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최한영 정치부 기자(visionch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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