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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고르

그림

2019-06-0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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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림.
 
르네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대해 미셸 푸코의 해석을 보자. 이것은 '이미지의 반역'이다.
 
즉,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고 파이프를 그렸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르네상스의 전통을 깼다. 이것은 두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번째는 '그림이 대상을 재현하는 전통을 깬 것'이다. 그림은 더이상 이미지를 옮겨놓는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 해석의 도구가 됐다.
 
 
칸딘스키의 '작곡'이라는 그림을 보자. '작곡'을 어떻게 그림으로 옮길까? 음악은 대상이 없다. 구체적인 대상을 재현하는 음악은 세상에 없다. 단지 분위기를 전할 뿐이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그림은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칸딘스키는 대상을 그리지 않았다. 마그리트 역시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다고 한다.
 
 
두번째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결합시켰다. 과거 종교그림에서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종종 결합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그럼 말과 글은 어디로 갔을까? 그림의 제목에만 남게됐다.
 
파울 클레의 그림을 보자. 텍스트를 이미지처럼 그린다. 텍스트와 이미지를 결합시킨 마그리트 그림도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당시는 생소한 그림이었다. 그림과 대상을 분리시키고 이미지와 텍스트를 결합시킨 것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씨. 이것은 파이프를 재현하는 것일까? 아니면 파이프가 아님을 알리는 것일까?
 
푸코는 말한다. '대상에 이름은 없다. 우리가 파이프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 그것은 사회적인 약속이다. 파이프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없다. 무엇이 파이프인가? 저렇게 생긴 것을 저런 용도로 쓰자고 한 임의적인 약속'이라고 한다.
 
파이프라는 것은 없다. 종이컵이라는 것도 없다. 숫자 3은 존재하는가? 그것은 우리들이 상대적으로 부르는 '값'에 불과하다. 절대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파이프도 종이컵도 숫자 3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그리트 그림의 예술적 가치는 무엇일까? 화가가 의도한 것에 예술적 가치가 들어있을까? 그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5. 팥죽
 
성경이야기.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 대신 양으로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부인 사라는 죽는다. 이삭은 두 아들을 낳는다. 
 
큰 아이는 애서. 작은 아이는 야곱이다. 야곱은 일을 잘했다. 야곱이 어느날 팥죽을 쑨다. 형 애서가 다가온다. 야곱은 이런 말을 한다.
 
"형 배고프지? 팥죽을 줄테니 내게 장남상속권을 넘겨"
 
형 애서는 배고픈데 장남상속권이 무슨 상관이냐며 허락했다. 팥죽하나에 장남상속권. 이 일은 나중에 화를 부른다. 이삭은 죽기전에 장님이 된다. 애서에게 상속을 하려했으나 야곱이 몰래 자신이 장남인척했다. 이를 안 애서는 야곱을 죽이려 한다.
 
이에 어머니는 야곱에게 숨어있으라고 명한다. "메소포타미아로 가거라"
야곱은 가는 길에 밤을 맞는다.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돌배게를 위에서 잠이 든다. 꿈에서 하늘 끝까지 사닥다리가 이어진다.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한다. 야곱은 잠을 깬다. 라헬과 결혼해 12명의 아들을 낳는다. 야곱은 번성한 후 20년이 지나 돌배게로 돌아온다.
 
그때 신은 이런 말을 한다. "야곱아. 넌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쓰거라"
 
팥죽은 먹을 것으로 환심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가장 치사한 것이 먹는 걸로 놀리는 것이다.
밥 한덩이 주고 재물을 얻는 일. 많이 본 광경아닐까? 영주가 소작농에게 밥을 주고 쌀을 달라한다. 공장주가 노동자들에게 밥을 주고 땀을 달라한다. 재물은 이렇게 밥하나에 농락을 당한다. 가치가 실종되는 것이다. 장남상속권은 노동과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 '야곱'은 '애서'에게서 밥 한덩이로 '땀의 가치'를 뺏었다. 장님이 된 아버지 앞에서 장남인척 상속을 받는 장면. 교회나 일터나 어디서나. 우리가 흔히 보는 모습이다. 장남상속권을 농락해 피신한 야곱.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된다. 그럼 그 땅은 누구의 것인가. 애초 누가 주인이었을까. 누가 침략자일까.
 
4. 식도락
 
식도락은 놀고 먹는 것을 의미한다. 식도락의 어원은 Epicure다. 에피쿠로스에서 나왔다. 에피쿠로스는 '정원공동체'라는 것을 만들어 힐링하는 단체를 만들었다. 정원공동체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우정을 나눴다. 소문이 퍼지자 40만명이 모였다. 각계 각층 사람들이 찾아왔다.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노예와 매춘부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소문이 이상하게 났다. ''정원공동체' 사람들은 매일 먹고 마시고 놀기만 한다'. 심지어 에피쿠로스는 밤마다 여자들과 파티를 한다고 소문났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를 주장했다. 쾌락주의는 힐링의 철학이다. 육체적인 즐거움이 아닌 정신적인 행복. 고대 그리스는 지중해의 수많은 도시국가로 이뤄졌다. 말이 국가지 크지 않았다. 아테네는 10만명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여자와 노예는 뺏다. 당시는 이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들은 일종의 재산이었다. 작은 도시는 1만명 이하였다. 그중 스파르타는 중산층이 붕괴되면서 사라졌다. 에피쿠로스는 알렉산더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오면서 시작됐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그리스, 인도, 아시아까지 70개의 큰 도시를 만들었다.
 
이른바 '알렉산드리아'. 전국에서 여기로 모여든다. 일종의 세계화가 시작됐다. 이를 헬레니즘이라고 한다. 시각적 문명. 신에서 인간중심으로 생각이 바뀐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힘들다. 살인적인 물가. 취직도 안된다. 지금의 세계화와 같다. 취직도 안된다. 헬라어라는 그리스어도 못하면 사람 취급 못받았다. 지금 영어를 못하면 그렇다. 사람들은 군중속에서 고독을 느낀다.
 
이로 인해서 만들어진 것이 대안 공동체 '정원'이다. 지금도 그렇다. 사람들은 힐링을 원한다. 행복의 반대는 불행. 쾌락의 반대는 고통. 행복이 선이다.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자기고 가지고 싶은 것과 가지고 있는 것. 계속 갖고 싶어지는 것이 많아지면 영원히 행복하지 않게 된다. 1만원이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하면 행복해진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다. 온천지에서 "이것 좀 사라"라고 부추긴다.
 
에피쿠로스는 금욕주의다. "물과 빵만 있으면 나는 신도 부럽지 않다". 에피쿠로스는 실제 물과 빵만 먹었다. 치즈는 가끔 먹었다고 한다. 매일 먹으면 자꾸 먹고싶어지기 때문이다. 무소유와 미니멀리즘. 지금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쉽지 않다. 욕심만 버리면 다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에겐 사명같은 것은 필요없다. 인생은 그냥 사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지는 것이다. 살아지는 것이다. 꿈과 희망, 사명감, 의무. 이런 것은 없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무의미하다. 인간은 원자들의 이합집산이다. 사명감 따위는 없다. 자기가 행복하면 그만이다. 
 
그럼 인간이 두려워 할 것은 없는가? 오직 죽음에 대한 공포만 있다.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 우리가 살아있을땐 안 죽는다. 죽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힐링은 무엇인가? 물질로부터 고통받지 않는 것. 정신적으로 고통받지 않는 것. 죽음의 공포도 사라지는 것. 매우 높은 단계의 힐링이다. 쉽지 않다. 다 버리고 소유하지 않는 것이 쉬울까? 이는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원하는 행복은 같다'. 고통으로부터의 탈피. 덜 불행해지는 것이 행복.
 
3. 그림
 
이 그림은 이중섭 화가의 '아이들과 물고기 그리고 게'다. 평범한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놀고 있다. 잘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아이 둘은 이중섭 화가의 아들들이다. 둘은 낚시를 하며 놀고 있다. 서로의 발바닥을 간지럽히고 있다.
 
물고기는 낚시에 걸렸다. 잘 보면 물고기는 아이들과 놀고 있다. 게는 물고기를 낚은 줄을 자르려고 한다. 서로가 서로를 간지럽히며 웃고있다. 이중섭 화가는 가난했다. 종이와 붓이 없어 못으로도 그렸다. 이 그림은 손바닥만한 작은 종이에 그린 것이다. 
 
 
화가는 가난하여 아이들과 떨어져 지냈다. 이 그림은 같이 살때 기억을 떠올리며 그렸다. 화가는 아이들을 그대로 그린다. 아이들에게 어른을 그려보라고 해보자. 아이들은 어른을 '아이처럼' 그린다.  아이들의 눈에는 어른도 아이다. 화가의 눈에는 아이들도 어른들도 아이다.
 
우리가 그릴때는 어떤가? 우리는 아이들을 그릴때 아이처럼 그린다. 그러나 어른들을 그릴때는 어른처럼 그린다. 
 
2. 존재란 무엇인가
 
이런 사람이 있었다."내일 저녁까지 꼭 갈께". 친구와 약속을 한 남자. 그는 돌아가는 길에 바람에 날아온 기왓장을 맞고 사망한다. 얼마나 허무한가. 내일 저녁까지 꼭 가겠다고 약속한 것은 의미가 없다. 당장 날아올 기왓장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이다. 한치앞도 모른다. 존재는 이렇게 불안한 것이다.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예측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삶은 그냥 내던져진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지는 것. 존재는 명확하지만 실체는 알 수 없다. 고로 '존재는 실체에 우선한다'
 
-불안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성경을 보자. 아담은 사과를 따먹었다. 신이 먹지말라는 것을 굳이 먹었다. 이는 욕망과 자유를 의미한다. 불안은 욕망과 자유 그리고 미래에서 시작된다. 욕망을 가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가지지 못하면 불안하다. 가져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충족하지 않으면 사람은 언제나 불안하다.
자유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선택해야 하는 불안감에 매일을 산다.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없기 때문에' 불안하다. 선택을 해야 한다면 매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불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아담의 사과는 '자유의지와 불안'을 의미한다. 실재 존재하는 자신의 존재는 불안하다. 매번 흔들린다. 그렇다고 실체를 알 수는 없다. 결국 객관적인 세상에서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자기 안을 들여다 봐야 한다. 자유와 의지 그리고 욕망. 그래야 자신의 존재가 보인다. 물론 흐릿하게만 볼 수 있다.
 
-의식은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의식은 무엇일까. 의식은 자기기만이다. 그리고 종교의 모습에 가깝다.자신의 삶과 선택의 순간 믿음과 의심이 무한히 반복된다. 사람은 사물을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현상을 상대적으로 해석할 뿐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다. 의식은 항상 오류를 저지른다. 우리가 기대는 지식은 무엇인가. 지식은 허무함이다. 자연과학이론도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과 지식. 상대성에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결국 이성과 지식에 대한 허무함은 '개인의 몫'이다. 의식과 자연. 주체적 지위로써 실존이 없으면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한다. 역할놀이만 하다 끝이난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삶과 죽음에 대해 하나로 이어져 있다. 실존과 불안. 그리고 삶에서 시작해 죽음으로 달려가는 존재다. 죽음을 외면한다면 존재는 쓸데없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삶과 동시에 죽음은 항상 인간에게 '실존'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에 인간은 불안과 허무함을 반복한다. 어쩔 수 없다. '개인의 몫'이다.
 
-실존은 무리수다
 
본질은 객관적이다. 인간은 이에 접근할 수 없다. 그러기에 상대적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실존은 가치다. 그리고 주관적인 것이다. 판단하는 것은 '무리수'다. 무한은 끝없이 뻗어가지만 유한안에 갇혀있다. 두변의 길이가 1cm인 삼각형의 빗변은 루트2다. 루트2는 1.414.......무한을 이루는 무리수다. 실존의 의미가 그렇다.
 
이런 이유로 실존은 개념화가 안된다. 물질은 물질로 사유가 가능하다. 원자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존은 물질에서 관념으로 사유가 되지 않는다. 주체적인 사유만이 답이다. 그럼 '나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파악하고 생각해야 할까?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만 세계를 알 수 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애매하게 파악되는 세계. 그 지식에서 언어를 훔쳐내 지식에 대항하는 법. 지식은 애매하지만 실존은 명확하다. 언어게임을 통해 사막에서 바늘을 찾듯 존재를 더듬는 방법 뿐이다.
 
지혜는 객관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간접화법. 주관적인 역설로만 이해할 수 있다. '존재는 무엇인가'라고 객관적으로 정의내릴 수 없다. 보편적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능과 목적이 없다. 그래서 칼로 무 자르듯 정의 내릴 수 없다. 존재의 가치는 그렇다.
 
-신 앞에선 단독자
 
신이 있다고 보자. 신을 보거나 찾게 된다면 그 혹은 그녀는 모두 '단독자'가 된다. 신 앞에선 모두가 홀로 대면한다. 그것은 자신과 만나는 작업이다. 그 과정은 어떤 것일까. 상황일 수도 있다. 혹은 감정의 바닥에 닿으면 본능에만 충실한 자기 자신과 마주친다. 신 앞에선 혹은 자기 자신 앞에선 모두 단독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절망을 피할 수 없다. 가급적이면 모두 절망을 겪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와 마주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기 위한 것이다.
 
1.생각.
 
어쩌면 그것은 호러일 수도 있다. 생각의 깊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무서운 생각에서 '정확한 판단'이 파생된다. 알 수 없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으로. 모른다는 것은 무서운 것이다. 안다는 것도 불안하다. 모르나 아나 이성이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 태어난 거북이가 바다로 질주하듯이. 사람은 모르는 것에서 아는 것으로 슬그머니 다가갈 수 밖에 없다.
 
생각은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됐을까. 그리스 철학을 보자. 2,500년전. 파르메니데스라는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만물은 변하지 않는다' 이 무슨 궤변인가. 지금 우리의 관점으로 본다면 언어폭력이다. 하지만 이 생각은 지금의 '원자설'을 낳았다. 당시 그리스에선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라이벌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변한다'라고 말했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어떤가? 세상은 변하지 않는가? 변하는가?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이렇다. 뜨거운 커피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식는다. 뜨거운 커피가 차가운 커피로 변한 것은 감각으로만 변한 것이다. 이성의 눈으로 보면 커피는 변하지 않았다. 파르메니데스는 왜 커피가 변하지 않았다고 했을까? 이 말은 '만물은 변하지 않는다'이다. 즉, 세상의 물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고로 '있는 것은 있다' '없는 것은 없다'가 성립된다. 뜨거운 커피는 지금 차가운 것이 됐다.
 
그럼 뜨거운 커피는 어디로 갔을까? '있는 것은 있다'와 '없는 것은 없다' 뜨거운 커피는 있기 때문에 있다. 그럼 차가운 커피는 없기 때문에 없어야 한다. 그런데 차가운 커피가 있다. 차가운 커피가 있으면 뜨거운 커피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뜨거운 커피는 있었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가 모순이 생긴다. 파르메니데스는 궤변이라고 취급받았다.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변할 수 없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것을 보자. 커피를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겨보자. 커피가 이동이 가능한가?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빈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가는 중에는 빈공간이 없다. '없는 것은 없다' 파르메니데스는 커피가 이동하는 것은 허상이라고 말한다. 빈공간이 없기 때문이란다. 그럼 커피와 볼펜을 예로 들자. 커피와 볼펜 사이에는 빈공간이 없다. 그럼 커피와 볼펜은 따로가 아닌 하나라는 의미다. 고로 파르메니데스는 만물은 영원불변한 단일체다라고 주장한다. 공간이 없다니?
 
우리가 이해 못하는게 정상이다. 이해하는게 이상하다. 2500년전에 남긴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의 씨앗은 훗날 데모크리토스에게 영향을 준다. '있는 것은 있다' 이말은 '있는 것은 원자다'로 바뀐다. '없는 것은 없다'는 '빈 공간은 있다'로 발전한다. 파르메니데스의 '단일체'는 원자로 발견된다. 즉 원자를 발견하면서 원자와 원자의 공간이 나타난 것이다.
 
고로 만물은 원자들의 이합집산이다. 세계의 모습을 원자로 밝혀낸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플라톤에게 영향을 준다. '이성을 통해 세계를 꿰뚫어본다' 플라톤은 이성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 '이데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세계가 '원자'의 세계다. 이런 이유로 서양철햑은 궤변론자 파르메니데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원자와 이데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감각이 주는 것은 거짓이다. 참모습은 이성을 통해서만 꿰뚫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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