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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고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2019-06-04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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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무엇으로 사는가. 돈인가 행복인가. 추억인가.
우리가 사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없다.
....................................
 
 무언가는 가사가 없는 노래다. 없을 무. 말 언. 노래 가. 무언가는 멘델스존의 노래집이다. 
 
멘델스존은 누나가 죽은 후 1년 뒤 세상을 떠났다. 여성은 작곡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파니 멘델스존은 부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난 뒤 멘델스존은 무슨 이유인지 '여성은 작곡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파니는 작곡을 이어갔다. 왠걸. 그러나 누나는 음악을 발표하지도 못하고 심장마비로 죽었다. 부모 밑에서 30년을 참았지만 꽃을 피우지 못했다. 누나의 죽음으로 멘델스존은 마음이 아팠다.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니의 죽음소식을 듣고 멘델스존은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든 곡.
 
'파니의 죽음'. 이 음악은 기존의 멘델스존 스타일과 완전히 다르다. 혼돈스럽고 고통이 느껴지는 곡이다. 누나가 죽자 멘델스존은 1년 뒤에 따라 죽었다.
 
  
'나는 홀로 고통스러워 하네.
이 고통은 끝나지 않으리라.
나는 너로부터, 너는 나로부터. 
아아, 사랑하는 이여, 헤어져야 했으니'
 
-파니의 죽음 中
 
멘델스존은 음악 역사상 최고 부자의 아들이었다. 음악적 역량도 뛰어났다. 1829년 '칸초네타'. 음악은 혁신적이었다. 빨랐다가 느려졌다가를 반복한다. 힘이 빠졌다가 점점 느려졌다가 빨라진다.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베토벤을 넘지 못했다. 베토벤 현악사중주 15번과 멘델스존 현악사중주 2번 1악장은 같다. 대놓고 베꼈다. 어쩔 수 없다. 음악이나 글이나 유명한 작품을 표절하는데서 나온다. 교향곡 7번 베토벤과 멘델스존 현악사중주 2번 2악장도 멜로디가 같다.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15번 4악장과 멘델스존 현악사중주 2번 4악장도 같다. 멘델스존은 여기에 대해 "베토벤에 경의를 표했다"고 말한다. 음악도 그림도 글도 마찬가지다. 베껴라. 다만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 
 
멘델스존은 1829년 20세때 바흐를 꺼냈다. 바흐는 이전까지 잊혀진 사람이었다. 멘델스존이 바흐를 부활시킨 것이다 .
이로인해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가 된다. '무언가'에는 대표적으로 '봄노래'가 있다. 
 
  
노래의 날개위에 사랑하는 이여 
내 그대를 실어 나르오 
저 갠지스 평원으로 
거기 너무도 아름다운 것을 내가 알고 있다오.
 
-이탈리아의 뱃노래 中
 
멘델스존은 슈만과 함께 음악의 혁신을 이끌었다. 그럼에도 멘델스존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는다. 히틀러는 바그너를 좋아하고 멘델스존은 경멸했다. 한번은 멘델스존의 동상을 부수라고 명했다. 인부들은 누가 멘델스존인지 몰라 실수로 바그너 동상을 부쉈다는 일화도 있다.
 
4. 입맞춤
 
콘스탄틴 브랑쿠스의 작품.
입맞춤.
언뜻 보면 모른다. 
자세히 보면 팔이 보인다. 
가까이 보면 남자와 여자가 보인다. 
입맞춤을 하고 있다. 
 
 
작가는 천편일률적인 조각이 싫었다. 
사람들이 자세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싶었다. 
팔을 감싸고 입을 맞춘다. 
두개의 눈이 하나가 된다.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
 
그 흔한 키스임에도. 
그 어려운 키스다. 
입맞추기는 쉽지가 않다. 
 
'사랑은 눈으로 보는게 아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 그래서 큐피트는 눈을 가리고 활을 쏜다'
-한여름밤의 꿈.
 
신은 우리에게 사랑을 하라 그랬건만.
사랑은 쉽지 않아라. 
모두가 사랑에 시샘한다. 
이별을 아픔을 겪은 사람을 우습게 본다. 
 
하지만 정작 나도 실연의 아픔을 겪고 싶어라. 
불타는 사람에 타고 싶어라. 
사랑은 부러운 것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3. 신앙
 
 신. 그리고 인간. 신과 인간은 화해할 수 있는 존재일까? 그것은 철학과 신학이 양립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진리는 '신' 중심의 보편적인 것일까? '인간' 중심의 상대적인 것일까? 종교인들은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본다. 과학자들은 빅뱅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종교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과학자는 인간은 진화론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종교는 신의 계시를 진리로 본다. 과학은 이성에 의해 추리한 것을 진리라고 믿는다. 신학이냐 철학이냐. 신앙이냐 이성이냐는 아주 오래된 문제다. 신학과 철학을 화해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코란의 아베로에스. 가톨릭의 토마스 아퀴나스.
 
아베로에스는 12세기 스페인의 아랍계 철학자다. 당시 스페인은 이슬람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3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자이자 철학자다. 아베로에스의 공적은 크다. 서양철학은 중세로 넘어오면서 아리스토문헌이 대부분 사라졌다. 이슬람의 아베로에스가 이를 아랍어로 번역해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아베로에스가 라틴어와 희랍어로 이를 번역해 서양에 전달해줬다. 서양은 아베로에스에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아베로에스는 서양에서 '패배자'로 기억된다. 
 

<그림 : 토마스 아퀴나스의 승리>
 
두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팬이었다. 아퀴나스는 100년 후에 아베로에스의 글을 읽는다.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코란.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 성전을 합쳤다. 그들은 신학과 쳘학이 양립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게시진리가 참된 진리. 이성으로는 진리를 모른다는 것이 신앙주의다. 반면 이성진리가 참된 진리. 합리주의라고 부른다. 두사람은 신앙주의와 합리주의 둘 다 받아들였다. 신앙과 철학은 양립 가능하다고 봤다.
 
먼저 아베로에스를 보자. 신의 뜻은 이성으로 증명될때 확실해진다고 봤다. 신앙은 비유, 철학은 이성. 
코란은 신학자와 철학자, 대중이 보는 시각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계시진리와 철학을 화해시키려 했다. 
물론 신자들의 반발이 컸다. 그는 철학과 신앙을 화해시키려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계시진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철학과 종교가 상충할때는 이성의 진리를 수정하라고 말한다. 그는 철학과 종교가 같은 진리를 공유하되 종교로 인해 더욱 체계화되고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퀴나스는 모순이 되는 두개의 진리를 모두 받아들였다. 이른바 이중진리론. 종교계에서는 이를 좋지 않게 본다. 원흉을 아베로에스라고 본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을 수용하되 그 위를 종교로 올려놨다. 결국 아베로에스만 뺨 맞은 꼴이다. 
 
신학과 철학을 모두 인정. 다만 철학이 더 높다는 아베로에스. 철학과 신학이 일치하면 철학과 충돌할 경우 신학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을 더 높게 봤다. 철학은 보조 혹은 시녀. 충돌하면 철학을 수정하라고 말한 아퀴나스.
 
아베로에스와 아퀴나스 둘다 종교와 철학을 받아들였다. 다만 철학의 위상을 다르게 봤다.
 
그럼 지금 2019년의 철학과 신학은 어떤 관계인가. 철학과 신학의 화해. 다른 차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진화론은 옳지만 프로세스는 신이 간섭. 빅뱅으로 우주가 생겼지만 신이 원인. 우리가 보는 세계의 관점은 현재 이렇다.  신학. 인간과 신은 여전히 화해를 못하고 있다.
 
2.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는 1564년에 태어났다. 소문으로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주옥같은 글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라고 사람들은 본다. 그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게 남은게 없다. 처음에 셰익스피어는 유명하지 않았다. 그의 글은 19세기에 와서 명성을 남긴다.
 
그의 글로 음악을 만든 사람들은 대부분 19세기에 태어난다. 벨리니 1801년, 베를리오즈 1803년, 1809년 멘델스존, 베르디 1813년. 구노 1818년. 19세기에 와서 이들에 의해 셰익스피어가 재발견된다. 
 
그 중에서 멘델스존을 보자. 멘델스존의 이름은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다. 38살에 죽는다. 멘델스존이 성이다. 하지만 유태인 티를 안내기 위해서 그는 바르톨디라는 성을 붙인다. 당시부터 유태인을 사람들이 싫어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은행가다. 규모가 가장 컸다. 멘델스존 브라더스 뱅크는 지금의 골드만삭스 정도 된다. 음악사에서 가장 부자집 아들이 멘델스존이다.
 
대부분 천재는 연체자나 신용불량자다. 멘델스존은 부유했던 천재다. 게다가 유명한 지휘자다. 셰익스피어 '한여름밤의 꿈'을 17살에 작곡했다. 20대가 되서는 유명한 지휘자가 된다. 5개국어에 능통했다. 여행만 다녔다. 그림도 잘그렸다. 10살에 작곡을 시작했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괴테가 집으로 초대했다. 멘델스존은 15살에 괴테를 처음 만난다. 당시가 1824년이다. 누나는 같이 못간다. 부모가 못가게 했다. 
 
멘델스존은 여러가지를 작곡했다. 칸타나, 오라토리오, 오페라. 칸타나는 내용이 있는 노래로 규모가 작다. 오라토리오는 내용이 있는 노래로 규모가 크다. 오라토리오에 연극을 붙이면 오페라가 된다. 
 
파니 멘델스존은 그의 누나다. 동생과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여성은 당시 음악을 할 수 없었다. 동생과 싸운 후 누나는 자살을 한다. 그 죄책감은 평생 멘델스존을 따라다닌다. 부모의 반대로 작곡가가 되지 못한 누나. 여자라서 부모는 반대했다. 요즘엔 남자가 음악을 하면 부모가 반대한다. 아이러니하다.
 
멘델스존 이전에는 '베버'라는 사람이 셰익스피어 음악을 잘 만들었다. 베버의 '마탄의 사수'. 그는 모차르트 부인의 친척이다. 1821년 작품. 이야기는 이렇다. 총을 잘 쏘면 한 귀족의 딸과 결혼을 할 수 있다. 남성은 총을 못쏴서 악마와 거래를 한다. 악마는 그에게 총을 잘쏘게 해준다고 한다. 그를 데려온 친구에게 악마는 고맙다고 한다. 그리고 친구에게 "그의 영혼을 내가 가질 것"이라고 말한다. 악마의 총알은 모든 것을 맞혔다. 7발 중 6발이 명중한다. 하지만 마지막 1발이 문제다. 1발을 쏘자마자 귀족 딸이 쓰러진다. 소리에 놀라 기절한 것이다. 그 총알은 어디갔을까. 그 친구에게 박힌다. 악마는 그 친구의 영혼을 노린 것이다. 악마에게 속은 것이다. 
 
멘델스존의 걸작은 '옥텟'이다. 현악 8중주. Oct는 8을 의미한다. 문어 Octopus. 10월 October. 원래 October는 8월이었다. July와 August를 신성시 하는 것 때문에 추가되면서 10월로 밀렸다. December도 10월이었다가 12월로 밀린 이유다. '옥텟'은 8개 현악기 악보가 다 다르다. 협주하기도 하고 따로 연주하기도 한다. 조화롭다. 
 
 
멘델스존의 최고음악은 '한여름밤의 꿈'이다. 1826년 17살에 만들었다. 시작은 요정 퍼크의 '스케르초'로 방정을 떤다. 일은 항상 꼬인다. '야상곡'은 사랑의 분위기, '결혼행진곡'은 귀족의 결혼식에 연주된다. 이외에도 한여름밤의 꿈에는 '연극의 프롤로그', '장송곡', '배우들의 춤' 순으로 연주된다. 마지막에는 다시 퍼크 요정의 장난으로 끝난다. 대사 하나하나가 아름답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은 연극이다.
 
'사랑은 눈으로 보지 않아요. 마음으로 보는 것이죠. 그래서 큐피트의 눈을 가린 것입니다'
-한여름밤의 꿈 
 
멘델스존은 부수음악으로 극을 만든다. 부수음악은 연극이 중심이고 음악이 부가 되는 것이다. 오페라는 음악이 이끈다. 이와 달리 연극이 중심이면 부수음악이라고 한다. 영화OST도 부수음악이다. 한여름밤의 꿈은 부수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들어서 셰익스피어 전문가는 '케네스 브래너'다. 그는 헨리5세를 영화로 만들면서 음악을 작곡했다. 헨리 5세의 이야기. 전쟁이 끝났다. 아주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이겼다. 왕은 소리친다. "이것은 우리가 아닌 신의 힘으로 이긴 것이다". 한 병사가 일어나서 찬송가를 부른다. 그 음악을 만든 작곡가 '케네스 브래너'가 그 병사로 직접 출연했다.  
 
  
1. 절망의 달인
 
인생은 권태로 가득하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만이 이 권태에서 탈출하는 방법이다. 자신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몸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을 발견하는 법. 타인을 통해서 혹은 자기와의 대화를 통해서. 헤겔은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와 '너'. '주인'과 '노비'. '아버지'와 '아들'. '사용자'와 '사용인'. '남편'과 '아내'. 헤겔은 냉철했다. 오직 타인과의 관계속에서만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다고 말했다. 키에르 케고르는 자신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고 정의했다. 자신 내면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아의 발견은 결국 자기 안에 있다. 사람은 자아발견이 쉽지 않다. 그래서 절망에 빠진다. 당연한 수순이다. 절망에 빠지는 것은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당연한 과정이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자아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윤리적인 자아를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은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사회적인 요구를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절망이다. 절망이 깊어지면 죽음에 이른다. 죽음에 이르는 병. 그것은 '절망'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죽음을 갈망한다. 의식적 절망과 무의식적 절망. 사람은 자아를 찾지 못해 '無'가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소멸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은 더 절망에 빠진다. 죽음을 열망하는 무의식적 절망. 누구나 겪는 일이다. 하지만 의식적 절망은 오히려 해결지점에 다가갈 수 있게 한다. 무의식적 절망은 자기 자신도 실존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허무를 낳는다. 나의 자아를 인식 못한다.
 
그러다보니 사물이나 어떤 대상을 갈망하게 되는 현상이 생긴다. 팬덤이 대표적이다. 동물이나 사물에 집착하는 현상. 이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절망이다. 고로 사람은 내향성을 가져야 한다. 오히려 절망앞에서 경건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을 이겨내는 시점이 생긴다. 거기까지 가봐야 죽음을 거부한다. 그것을 이겨내고 자신을 인식하는 것. 거기서 삶과 존재의 의미가 생긴다. 절망에 대한 반감. 그곳에서 절망에 대한 분노가 생긴다.
 
절망은 자기가 자신을 소외시키는 현상이다.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의식적인 절망을 해야 한다. 그래야 실존을 선택한다. 고로 누구나 절망에 빠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답이 없거나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왜 쓸데없는 것에 집착할까? 우리는 이것을 심리적 실존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욕구와 쾌락에 치중하는 것. 하지만 여기선 자신을 찾지 못한다.
 
심리적 실존은 두가지가 있다. 밑바닥 실존과 고상한 귀족실존. 원초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 주말에 널부러진 사람. 하지만 행복할까? 누구는 말한다. '일주일 동안 노동에 치여서 벗어나려는 것인데 그것이 왜 문제인가?'라고. 그것은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는 것이다. 놀이와 쾌락이다. 하지만 놀이에는 의미있는 놀이와 무의미한 놀이가 있다. 리모콘 재핑을 하루종일 한다고 생각해보라. 일주일동안 한다고 상상해보라. 무의미한 것이 연속되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 시간 죽이기다.
 
사업가들은 너무 바쁘게 산다. 아무것도 없이 끝난다. 자신의 실존에 대해 고민하지 못하고 이윤과 승리의 쾌감만 느끼다 떠난다. 인생은 죽으면 끝이다. 수조원을 쌓아놓는 것보다 1만원이라도 값지게 쓰면 그게 자신의 행복이다.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물질보다 정신적인 행복이 더욱 높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삶의 초점은 자신의 만족이지 물질이 아니다. 귀족적 쾌락은 무엇일까? 사실 밑바닥 쾌락과 다를게 없다. 좀 더 고상한 것일 뿐이다. 사람은 밑바닥 쾌락에서 벗어나면 고상한 심리적 단계에 머무르기 쉽다. 하지만 책속에 처박힌다고 행복할까? 클래식에 둘러싸이면 행복을 얻을까? 아니다. 그것은 고상한 심리적 실존일 뿐이다.
 
자신의 고민에서 단순하게 벗어나는 것에 그친다. 밑바닥이나 귀족적 쾌락이나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자기의 쾌락에만 집중하는 것일 뿐이다. 책 뒤에 숨어버리거나 피아노 뒤에 몸을 숨기는 것 외에는 없다. 이런 이유로 공리주의는 논란이 많다. 벤담의 쾌락주의적 공리주의. 밀의 귀족주의적 공리주의. 이를 심미주의라고 한다. 영화감독이나 작가들도 그렇다. 조선에서는 안평대군이 이랬다.
 
이것은 자아를 찾는게 아니라 상실하는 것이다. 자신의 통제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도 환상이다. 단순함에서 세련된 취미로 간다고 해도 권태는 계속된다. 이것들은 자신의 심리에서 머물게 한다. 그래서 절망으로 더욱 치닫는다. 절망이 결국 반영된 것이다. 아담은 지루해했다. 이브도 마찬가지다. 온가족이 지루해 한다. 심미주의자들은 쾌락을 좇으라고 한다. 하지만 고상하거나 밑바닥이거나 그게 그거다. 권태에 빠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 취미도 윤작법이 중요하다고 한다. 아이스크림과 클럽도 질린다. 차라리 포인트를 잡고 돌아가면서 놀면 해방이 된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태는 찾아온다. 자신에 대한 '숙고'외에는 절망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없다. 그것은 오직 '절망'에 빠져봐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모두가 절망에 빠져봐야 한다. 모두가 절망의 달인이 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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