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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과 남북경협)첫 방북, 금강산 개발사업 제안
(5)5개 사업 제휴 의정서 체결
2018-08-18 06:00:00 2018-08-18 10:11:19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현대의 경영전략을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투자 대상으로 남북경협(경협)과 북방경제권의 연동을 구상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경부터 재일기업인 손달원이나 요시다 다케시 신일본산업 사장 등을 통해 대북 접촉을 꾀했다. 그 결과 금강산호텔 건립 건을 명분으로 두 차례에 걸쳐 허담(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조선로동당비서)의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아산에 따르면, 처음에는 때가 아니라 생각해서, 7월에는 안무혁 안기부장이 신분조작 문제로 “가지 말라고 해서 포기해야” 했다. ‘7·7 선언’ 직후인 1988년 8월에도 초청을 받았지만 정부가 여전히 아직은 빠르다고 해서 “네 줄짜리 거절” 편지를 보내야 했다. 그 직후 그해 11월2일 허담의 초청장을 다시 받았다. 이때는 방북을 반드시 성사시키겠다고 생각했다.
 
아산은 특유의 추진력으로 방북을 다시 추진했다. 노태우 정부의 대북-북방정책을 관장하던 박철언이 방북(1988년 11월30~12월2일) 하기 두 달여 전인 10월4일에 그를 만나 자신의 방북 성사를 요청했다. 아산이 경협을 추진하고자 한 기업인으로서의 논리는 간단명료했다.
 
지금은 한국 국민총생산(GNP)이 타이완의 50%이지만(1987년의 경우 정확하게는 69%: 필자) 5년 내에 따라잡을 수 있다면서 남북경협-북방경제권 구상을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지렛대로 설정한 것이다. 박철언에게 설명한 주요 계획안은 소련에 어선 수리·상선 제조·석유 자원 개발 제의, 철원과 속초에 금강산 관광특구 설치, 미국·일본·서독·영국·프랑스·이탈리아와 한국의 공공차관과 민간 투자 유치를 통한 자금 조달, 세계은행 차관 모색 등이었다.
 
아산은 박철언이 방북에서 돌아온 보름 후(1988년 12월17일) 자신의 방북 허가를 다시 강청하면서 50여 일 전에 얘기했던 사업안에 통천에 자동차 부속품 공장을 설립, 남한 사람이 들어가는 통로 계획안을 추가했다.
 
1989년 1월23일 9박 10일의 일정으로 한국 대기업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공개 방문한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오른쪽에서 네번째)이 고향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 마련된 부친의 묘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아산정주영닷컴
 
1989년 1월23일, 마침내 아산은 전 국민의 “가슴을 설레게 한” 공개적 방북의 길을 떠났다. 경협의 ‘아이콘’으로서 대기업인 가운데 최초의 공개 방북이었다. 그는 9박10일 동안 “국빈대접을 받으면서” 평양, 원산, 진남포 등의 화학공장과 시멘트공장을 시찰하고 금강산, 통천, 원산 일대를 헬기를 타고 답사했다. 남북고위급 첫 예비회담(1989년 2월8일)을 갖기 직전이었다.
 
아산은 ▲금강산 공동개발안을 먼저 제안했다. 이미 17년 전인 1972년에 남북 당국이 동의한 사안이자 투자비용이 적은 평화산업으로 합의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은 ▲원산철도차량공작소 합작 투자로 생산품 일부를 소련에 수출하는 계획 ▲원산조선소 합작생산으로 소련에도 수출하고 소련 선박도 수리하는 계획 ▲시베리아 석탄을 캐내 코크스를 만들어 북한도 쓰고 중국에 파는 계획 ▲시베리아의 암염을 캐내 북한도 쓰고 중국에 파는 계획 등 네 가지 사업을 제안했다. 협상을 거쳐 아산과 최수길 조선대성은행 이사장 겸 조선아세아 무역촉진회 고문은 1989년 1월31일, 5개 사업에 대한 ‘금강산 관광 및 시베리아 공동 개발과 원동지구 공동 진출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했다.
 
이 사업안들은 본래 아산의 경협 구상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었고 당시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 속에서 남북이 쉽게 함께할 수 있는 사업들이었다. 실제로 북한은 노태우 정권과 남북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소련과 시베리아 공동 개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북한으로서도 남한과의 경협은 보다 시베리아 진출을 확실하게 보장되는 일이었다. 철도차량제작·보선업 등의 제조업도 남한의 자본과 기술 수입 창구로 활용할 수 있었다.
 
아산은 처음에 금강산개발을 7개년 계획으로 설정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의 자본이 남한 기업과 공동투자하면 위험이 분산되고 어느 일방이 사업을 좌우할 수 없어 외국관광객 유치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은 애초에 남한 관광객 유치를 상정하지 않았다. 아산은 같은 민족에게 구경을 안 시키면 손님이 오겠냐고 북한을 설득했다.
 
당시 북한은 5개년 계획을 설정했고 관광 피크 때에는 12만 명의 관광객을 예상할 만큼 금강산 관광 사업을 크게 기대했다. 결국 1989년 7월부터 남한 관광객을 허용한다는 전금철과 최수길의 제안에 조응하여 아산은 먼저 외금강 호텔 2개 신축, 삼일포에 1개, 명사십리에 2개 호텔을 짓자고 제안했다. 이때 아산은 또 하나의 전격적 제안을 던졌다. 미군이 없는 금강산과 설악산 사이를 관광객 통로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군사분계선 통과가 이뤄지지 못하면 ‘합일로 나아가는 출발의 상징’인 금강산 관광의 의미가 없다면서 군사분계선을 관통하는 사람, 장비, 자재의 이동경로를 중시했다. 정치적 감각이 경제적 타산 못지않았던 그의 주장은 결국 관철되었다. 이로써 금강산 관광 사업의 골격이 만들어졌다.
 
현대그룹은 경협 추진 과정에서 조선 부문은 현대중공업이, 철도차량 합작 사업은 현대정공(현 현대로템)이 추진하고 미국, 일본과 시베리아 개발계획 협력방침을 구체화했다. 국내 대기업간의 업종도 구분했다. 즉 결국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아산이 4월에 재방북할 때 럭키금성(현 LG)은 전자제품-농수산물의 구상무역, 삼성은 직접투자 가능성 타진, 대우는 도로 항만 호텔건설 등 합작 사업을 모색한다는 업종 구분이 합의된 상태였다. 2월15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는 경협이 현대의 단독 사업이 아니라 국내 기업의 공동 참여와 외국 기업 참여도 필요하다는 인식이 모아졌다. 아산도 소련 방문은 전경련 사무국이 주관하고 경협에서 한국 기업끼리 경쟁하지 말고 공동 프로젝트로 협력 진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산이 1980년대 초부터 구상했던 경협안이 북측과 합의되고 바야흐로 경협 추진은 순풍에 돛을 단 듯했다. 더구나 이 무렵은 박철언 등의 막후 남북 접촉이 싱가포르에서 이뤄져 1989년 9~10월, 늦어도 1990년 상반기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낙관적 분위기가 조성될 때였다.
(자료: 실리적 남북경협 - 아산의 탈이념적 구상과 실행,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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