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사실 겨우 단 두 편뿐이었다. ‘관상’의 수양대군은 지금도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악역’으로 평가 받는 캐릭터다. 그리고 이번 영화가 실질적인 두 번째 악역이다. 이정재는 자신을 악역의 대명사로 꼽는 것이 못내 아쉽다며 웃는다. 물론 한 때는 대한민국 청춘의 표상처럼 여겨지던 시기도 있었다. 멋지고 선한 인물, 권선징악의 중심에만 있어야 할 것 같은 이정재였다. 본인도 그랬다고 웃는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쩔 수 없는 자리 이동이었을 것이다. 그것조차 인정한다. 그렇다고 중심에서 벗어나진 않고 있다. 아직까진 그렇다. 이정재라서 당연한 것이고, 이정재이기에 당연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정재만큼 캐릭터의 두 얼굴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도 드물다. 악인이라고 하지만 처절한 악인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는 인물. 악을 표현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동정을 할 수 있고, 또 이유를 부여할 수 있는 연기. 그래서 이정재는 아직도 충무로의 대체불가 캐릭터 가운데 최정점에 선 배우라고 꼽아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이정재를 보면 이런 평가에 대해 부인할 관객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싶다.
배우 이정재. 사진/CJ엔터테인먼트
우선 가장 이슈가 되는 점은 황정민과 무려 7년 만에 한 작품에서 다시 만난 점이다. 남자 배우 두 명이 한 작품에서 다시 만난 게 뭐 그리 대수일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7년 전에 촬영한 영화가 ‘신세계’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대한민국 영화에서 ‘신세계’는 느와르 장르에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는 기준점 같은 작품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전혀 다른 관계가 됐다.
“아주 잘 맞는 배우와 한 작품에서 다시 만나는 건 인연이 있어야 되는 일 같아요. 그 작품이 내게 오고, 또 내가 그걸 선택하고. 또 그 배우가 그걸 선택하고, 그 작품도 그 배우에게 가야 하고. ‘신세계’에서 정민 형과 정말 잘 맞았죠. 그때도 ‘꼭 다시 해보자’라고 했는데. 그게 7년이나 걸렸네요. 하하하. ‘다만 악’ 시나리오는 정민형이 캐스팅이 된 상태에서 제가 받았어요. 읽어보니 정민형이 이런 걸 살려주면 정말 멋진 그림이 나오겠다 싶었죠.”
결국 이정재가 ‘다만 악’을 선택한 이유의 가장 큰 중심은 황정민의 출연 확정이란 얘기였다. 물론 그 점만이 이정재를 이 영화로 이끈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을 사로 잡은 것은 사실 본인이 연기를 해야 할 ‘레이’란 인물이었다. ‘레이’는 한국영화에서 전무후무할 강력함을 지니고 있다. 무자비할 정도의 잔인함은 둘째다. 배우 본인이 이 캐릭터에 덧씌울 레이어가 무궁무진해 보였다.
배우 이정재. 사진/CJ엔터테인먼트
“시나리오상에선 레이가 인남을 쫓아가는 동기 혹은 그 동기와 관련된 여러 요소들이 상당히 적었어요. 자기 형의 죽음만으로 인남에게 그렇게 집착한다? 복수심? 제 판단으론 너무 부족했죠. 제가 생각하고 떠올린 게 사냥감을 찾아 두리 번 거리는 사냥꾼의 느낌이었죠. 사실 복수는 동기가 아니었죠. 그저 방아쇠일 뿐이고, 형을 죽였단 이유 때문에 인남에게 ‘내가 널 죽여도 되지?’란 이유를 준 거죠. 감독님도 이런 판단을 할 수 있게 제가 많은 부분을 주셨어요.”
그렇게 ‘레이’는 이정재의 해석을 통해 완전한 인물이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배우에겐 쉽지 않다. 본인이 이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수 많은 레이어를 입히고 또 입힐 여지가 많았다. 하지만 그건 반대로 작품 전체로 보자면 굉장히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감독이 생각하는 전체의 색깔이나 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관객들에게 어떤 설득력을 부여해야 했다. ‘레이’를 만들어 가면서 줄 수 있는 설득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맹목적으로 인남을 추격해 가는 데, 사실 관객 분들 입장에선 ‘왜 저렇게 집착을 하지’ 싶을 수도 있어요. 복수를 해야 하니까? 그것 만으론 부족하죠. 더욱이 대사도 별로 없잖아요(웃음). 뭔가 레이가 왜 이러는지를 관객 분들도 공감하셔야 하는데. 그게 뭘까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관객 분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자는 게 제 해답이었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나오는 장면도 사실 작은 설정이지만, 뭔가 레이의 인간미를 빼는 작업이었죠. ‘저 사람은 뭐야 대체?’ 이런 느낌을 주고 싶었죠.”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스틸. 사진/CJ엔터테인먼트
그런 인간미 없는 레이의 광폭할 정도의 잔인함과 지독한 집착은 액션에서도 드러난다. 아니 액션이 사실상 레이의 대사였다. 레이와 인남은 영화에서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두 사람은 눈빛으로 대화를 한다. 때에 따라선 주고 받는 주먹질과 칼부림 그리고 총질을 통해서 대화를 한다. 그게 이 영화에서 레이와 인남이 주고 받는 감정이었다. 고도로 계산된 액션과 그 액션의 디자인은 그래서 치밀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부상까지 입었다. 그 만큼 격렬했다.
“총기 액션이 정말 많았죠. 하지만 총기 액션은 합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그게 개의치는 않았어요. 예전에 ‘태풍’ 찍을 때 받은 훈련도 도움이 많이 됐고. 그런데 칼 액션과 육탄전 액션은 얘기가 다르죠. 첫 액션이 태국에서 제가 악당들을 제압하는 장면인데, 한 7명을 연속으로 제압을 해야 하는 장면이라 연습만 나흘 정도 걸렸어요. 그리고 촬영을 하는데 왼쪽 어깨가 ‘팍’하고 다쳤죠. 예전 ‘빅매치’ 때 다친 곳이라 걱정도 됐지만, 어쩔 수 없이 왼손을 최소화 시키는 액션으로 수정해서 촬영을 끝냈어요. 아직도 수술은 못했는데, 해야 할 거 같아요.”
사실 이 영화를 찍기 전 이정재가 가장 궁금했던 점은 따로 있었다. 연출을 맡은 홍원찬 감독도, 이정재의 상대역인 황정민도. 이정재 본인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히든 카드로 이 배우를 꼽는데 주저함이 없었으니. 바로 영화 속 ‘유이’란 인물을 연기한 박정민이었다. 박정민의 존재감을 묻는 질문에 이정재는 옅은 웃음을 띠면서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여전히 이 영화의 최고는 ‘박정민’이라고 단언하면서.
배우 이정재. 사진/CJ엔터테인먼트
“시나리오를 보면서 제일 궁금했어요. 도대체 이 배역을 누가할까. ‘이 배역 누구 생각하냐’고 물으니 박정민이라고 하더라고요. 전 속으로 ‘진짜 꿈도 야무지다’라고 생각했죠. 아니 박정민은 주연 배우잖아요. ‘오피스’에서 홍원찬 감독과 인연이 있다고 해도 그 배우가 이런 파격적인 역할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근데 집에서 제가 혼자 곰곰이 생각해 봤죠. ‘만약 내게 이 배역이 들어오면?’ 전 할 거 같더라고요. 정민이하고는 ‘사바하’때도 함께 했었는데. 그 친구 성향이라면 무조건 할 거 같았어요. 그리고 나중에 촬영한 걸 봤는데, 진짜 감탄만 나오더라고요. 이건 연기가 아니라 완벽한 변신이에요. 박정민 아니면 안 되는 배역이에요.”
이정재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외에도 자신의 연출과 출연까지 겸하는 ‘헌트’로 이슈 몰이 중이다. 특히나 이 영화에는 최고의 절친 정우성이 출연을 검토 중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개봉을 앞두고 공개된 첫 연출작 소식으로 여러 관심을 받고 있는 중이다. 무려 21년 전 ‘태양은 없다’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뒤 ‘영혼의 단짝’이 된 정우성과는 현재 회사까지 함께 운영 중이다. 이후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작품을 보고 싶단 팬들의 바람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 팬들의 소원이 이젠 이뤄질 수 있을까.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스틸. 사진/CJ엔터테인먼트
“하하하, 우선 우성씨한텐 4년 전부터 함께 하자고 한 작품인데 4년 동안 퇴짜를 맞고 있어요. 오늘 인터뷰 끝나면 VIP시사회가 있는데 우성씨도 오기로 했거든요. 끝나고 또 꼬셔봐야죠(웃음). 뭐 둘이 공감대는 있어요. 더 나이 들기 전에 한 번 같이 하자. 그런데 남들이 주는 시나리오에선 답이 안 나올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한 8년 전부터 우리가 기획해서 하자 싶어서 준비를 했는데. 이번 영화에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하하하. 아직 결정된 게 아니라서. 오늘도 가서 꼬셔 봐야죠. 우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어떻게 봤는지부터 물어봐야죠. 하하하.”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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