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정주현 기자] 36년 전 '혁명적 노동자계급 투쟁동맹'(혁노맹) 영남지부 책임자로 활동한 혐의로 유죄가 확정됐던 A씨가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법원은 당시 수사기관이 영장 없이 약 36시간 동안 피고인을 불법 구금하고 강요된 자백을 받아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은 물론 법정 자백, 다른 관련자들의 진술, 압수 문건과 감정서 등 유죄의 증거들은 효력이 부정됐습니다.
시민단체 회원들이 2025년 12월1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법률안 발의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뉴시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구고법 형사2부(재판장 원호신)는 지난달 8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재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A씨는 1989년 혁노맹 영남지부 책임자로 가입해 무장봉기와 임시혁명정부 수립 등을 주장하는 문건을 제작·배포한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당시 검찰은 A씨가 유인물 300부와 혁노맹 기관지 '불꽃' 창간호 200부를 대학가에 배포하도록 지시했다고 의심했습니다.
1990년 당시 대구지법 1심 재판부는 함께 기소된 A씨와 B씨의 법정 진술,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압수 문건과 이를 분석한 감정서 등을 근거로 유죄를 인정했습니다. A씨는 1심에서 징역 2년을 받고 항소심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됐으며, 상고를 포기해 판결이 확정됐습니다.
그러나 재심 재판부는 수사의 출발점부터 중대한 위법이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A씨는 1990년 3월12일 오전 11시15분쯤 연행돼 다음 날 오후 11시35분 구속영장이 집행될 때까지 약 36시간20분 동안 구금된 채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재심 재판부는 "사전에 동행을 거부할 수 있음을 고지받았다거나 자유로이 동행 과정에서 이탈 또는 동행 장소로부터 퇴거할 수 있었다고 인정할 아무런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며 "적법하게 긴급구속됐다고 볼 만한 자료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A씨 측은 당시 '불법 구금 상태에서 고문과 가혹 행위를 당해 허위자백을 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재심 재판부는 이 부분에 관해 경찰과 검찰에서 이뤄진 진술을 증거에서 제외하면서 "진술의 임의성에 관한 의문점을 없앨 만한 검사의 구체적인 주장·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진술의 임의성'이란 피고인이 고문, 불법 구금 등 외부의 강압 없이 자신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진술했는지를 뜻합니다.
재심에선 수사기관에서 형성된 강압적 심리 상태가 법정까지 그대로 이어졌다는 점도 인정됐습니다. 재판부는 "법정에서도 임의성 없는 심리 상태가 계속돼 수사기관에서의 진술과 동일한 내용의 자백을 하게 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며 "변호인의 조력을 받았다는 사정만으로 임의성에 관한 의문이 완전히 해소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습니다.
A씨 사건에 증거로 제출된 B·C씨와 다른 혁노맹 관련자들의 수사기관·법정 진술도 모두 배제됐습니다. 관련자들 역시 유사한 절차로 수사와 재판을 받았고, 검찰이 진술의 임의성에 관한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다는 판단입니다.
진술 증거뿐만 아니라 물적 증거의 효력도 상실됐습니다. 불법 구금 상태에서 임의제출받은 문건은 자발성이 증명되지 않았고, 주거지 압수물 역시 영장 제시와 압수 목록 교부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압수 문건을 토대로 작성된 감정서 또한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에서 파생된 '2차 증거'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재심 재판부는 A씨가 혁노맹에 가입했거나 활동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적법한 증거가 전혀 남지 않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재판부는 "표현물 그 자체만으로 피고인이 제작·소지·반포·가입 등의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한편, 혁노맹 사건과 관련해 수사를 받은 다른 관련자들의 재심 절차도 잇따르고 있습니다. 서울고법과 대구지법은 불법 구금을 이유로 관련자들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했습니다. 특히 서울고법은 지난 6월24일, 다른 관련자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던 서울중앙지법의 결정을 뒤집고 항고를 인용해 재심 개시를 확정한 바 있습니다.
정주현 기자 givehyun@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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