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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재즈·뽕짝을 만나다…'기묘한 아리랑'

한국 재즈 뿌리 탐험한 '서울재즈쿼텟', 27년 만의 재결성 무대

2022-08-3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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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26일 저녁,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마포아트센터. 검은 턱시도를 갖춰 입고 한 명씩, 무대 위를 성큼 성큼 오르는 베테랑 넷의 얼굴에서 그 때 그 시절 풋풋한 청년들을 봤다.
 
"자, 우리 멤버들을 소개합니다. 나이는 가장 많지만 '재즈 막내'인 우리 큰 형님, 희현 형님! 촘촘하고 세밀한 베이스가 멋진 우리 응규 형님! 자, 또 박수 부탁드립니다. 막내 준호! 빌 에반스 같은 연주가 일품이지요."(이정식) "왜 정작 본인은 소개를 안하나. 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색소포니스트 우리 이정식씨를 소개합니다."(김희현)  
 
'한국 재즈 불모지' 시절 활동했던 밴드 '서울재즈쿼텟'의 시계가 거꾸로 돌았다. 이들이 수천 명 규모의 대중 앞에 다시 선 것은 27년 만. 이날 이 곳에서 무대에 오른 네 멤버, 이정식(색소폰)·김희현(드럼)·장응규(베이스)·양준호(피아노)는 한 곡 한 곡 끝날 때 마다 천둥 같은 박수가 울려 퍼지자, 새삼 남다른 감회에 젖어 든 듯 했다.
 
26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서울재즈쿼텟'의 27년 만의 재결성 무대. 사진=플러스히치
 
밴드는 1980년대 초반 활동(실제 결성과 활동 기간은 1989~1993년 사이)을 시작했다. 당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드러머였던 김희현, 60~70년대 그룹사운드 ‘김혜정과 검은 장미’(전신 검은나비) 등에서 활동한 장응규가 동시에 몸담고 있던 KBS 악단의 빈 사무실에서 ‘놀듯 연주’한 게 결성 단초다.
 
세월을 거스른 이날 공연은 이들이 왜 불모지 시절을 딛고 일어난, 한국적 재즈의 뿌리인지를 증명한 자리였다.
 
'삼고무'처럼 두드려대는 국악적인 드럼의 장단, 관악기의 금빛 통 안에서 뿜어지는 경조(京調)에 가까운 시김새 선율, 그러나 재즈적 화성을 뼈대에 둔 음의 곡선이 자욱한 안개의 수묵담채 같은 미학으로 무대를 물들였다.
 
1997년 이정식이 뉴욕에서 론 카터(베이스), 케니 배런(피아노), 루이스 내쉬(드럼), 히노 테루마사(트럼펫) 같은 재즈 거장들과 녹음한 앨범 수록곡 ‘뱃놀이 변주곡’을 들려줄 때, 세기의 재즈 스탠더드 넘버 ‘TAKE FIVE’의 화성과 선율, 리듬이 기묘하게 변형되며 점차 아리랑의 가락을 타기 시작할 때.
 
"K재즈는 결국 이런 식으로 가야하지 않을까요. 국악과 접목시킨 재즈, 그것이 앞으로 우리가 꿈꾸는 방향이기도 합니다."(이정식)
 
이날 네 연주자들이 국악 외에도 R&B('Mr. Magic', 'Just the Two of Us')부터 블루스 넘버('Straight, No Chaser'), 스탠더드('My Funny Valentine', 'Danny Boy'), 그리고 팝과 가요('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Seoul Seoul Seoul')까지 이를 때, 재즈는 장르의 벽을 넘는 ‘횡단의 음악’이 됐다. 앙코르 곡 'St. Thomas'의 밝고 경쾌한 하드밥 스타일의 동그란 음표 하나 하나는 마치 성탄절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 같았다. 음의 곡선이 이끄는 '8월의 크리스마스'.
 
이날 공연기획사 플러스히치와 함께 이번 공연을 기획한 남무성 재즈평론가는 "게스트로 참여한 재즈 1세대 보컬 김준, 그리고 2세대 보컬 웅산의 노래까지 더한 15곡에서 평균 두 코러스 정도로 솔로타임의 규격을 짜고 집중적으로 연주의 기술을 보여준 방식이 특히 시원시원했다"며 "‘뱃노래 베리에이션’이나 웅산과 합을 맞춘 Take Five 등 몇 곡에서는 좀 더 즉흥에 힘을 주면서 예술적인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객석을 배려하면서 재즈의 정수를 놓지 않는 베테랑다운 균형감이 돋보였다"고 평했다.
 
26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서울재즈쿼텟'의 27년 만의 재결성 무대. 사진=플러스히치
 
다음날인 27일 저녁,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국일관에서도 또 한 번 '기묘한 아리랑'이 울려 퍼졌다.
 
왜 기묘한 아리랑이냐, 트로트 리듬을 타고 변형된 아리랑 가락이 '뽕짝계의 미원' 이박사의 목소리와 뒤섞여 묘한 난장을 빚어내서다. 관객 대부분은 400여명의 20·30대 청년들.
 
에이씨예스(acs.kr), 알삼공이팔이 이날 이 곳에서 기획한 '퓨처관광메들리'는 K팝도 혀를 내두를 만한, 독특한 공연 세계관이 돋보였다.
 
27일 서울 종로구 국일관에서 열린 '퓨처관광메들리' 공연 모습. 에이씨예스(acs.kr)
 
국일관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이건 새로운 세계였다.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와 콜라텍, 춤 연수원에서나 볼 법한 '어르신들 뽕짝' 문화가 젊은 층에 이식된 기이한 절경이 펼쳐졌다. 촌스런 조명 아래 울러펴지는 트로트 리듬, 거기에 맞춰 몸을 흔드는 젊은이들, 그리고 사이 사이 '쿵잔발','짝잔발' 같은 사교 댄스를 추며 어울리는 60·70 어르신들.
 
"역사와 전통과 문화와 예술을 위해 오신 내빈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 70 이상 되시는 분들만 있는 줄 알았더니, 왜 거의 다 30대 만 있는지 모르겠다만, 잘 맨들었든 못 맨들었든, 내 노래들을 시작해보겠습니다."(이박사)
 
이날 '전자올겐'과 "좋아 좋아" 추임새로 시작해 '몽키 매직'-'영맨' 그리고 꽹가리를 쳐가며 '후리스타일 뽕랩'으로 이어지는 이박사의 신기 어린 무대에 젊은이들이 떼창으로 반응하자 이 곳 사장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날 국일관 사장은 "보통 60·70대 어르신들 2000명 정도가 춤을 추는 공간이 이렇게 바뀔 줄은 나 역시 상상도 못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선 이런 음악이 유행이냐"고 도리어 기자에게 물었다.
 
27일 서울 종로구 국일관에서 열린 '퓨처관광메들리'에서 이박사가 공연하는 모습. 사진=에이씨예스(acs.kr)
 
이박사 같은 '진짜 뽕짝' 외에도, 이날 공연에는 뽕짝을 뼈대 삼아 국악, 힙합, 테크노, 일렉트로닉이 난장을 이루는 음악들이 이어졌다. 신인 걸그룹 뉴진스의 작곡가이자 최근 앨범 '뽕'을 낸 DJ 250도 이날 뽕과 비(非) 뽕 사이를 오가는 음악으로 젊은층들을 홀렸다. "진짜 한국 음악을 들으러 왔다"는 외국인들도 꽤 많았다.
 
지인의 추천으로 공연을 보러 왔다는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캠 먼들 씨와 부인 캐나다 출신의 크리스텐 먼들 씨는 "평소 힙합, 록, 댄스 모든 장르의 음악을 즐겨 듣는데 한국 트로트는 생애 첫 경험"이라며 "미국에서 유행하는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같은 K팝 음악과 달리 개성있고 특이해서 좋다"고 했다. 기자가 '뉴진스 작곡가 250이 최근 트롯트 앨범을 냈다'고 하니 "한국 음악이 또 그렇게 연결되는 줄은 몰랐다"며 놀라워 하기도 했다.
 
27일 서울 종로구 국일관에서 만난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캠 먼들 씨와 부인 캐나다 출신의 크리스텐 먼들 씨는 모리 세이와 닐 영, 퓨처 아일랜즈 같은 음악을 좋아한다. "평소 힙합, 록, 댄스 모든 장르의 음악을 즐겨 듣는데 한국 트로트는 생애 첫 경험"이라며 "미국에서 유행하는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같은 K팝 음악과 달리 개성있고 특이해서 좋다"고 했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이날 공연을 기획한 주최 측은 "이전부터 존재했고 한 때 전성기도 있었던 관광메들리를 주제로 현대 젊은 분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기성세대 뮤지션과 신세대 뮤지션, 종로 국일관 카바레의 조합으로, 관광메들리의 재해석과 재조명이 되길 바랐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당신도 모르는 새, 서울 어딘가 '기묘한 아리랑'이 울려 퍼진다. 장르의 벽을 허무는 재즈와 뽕짝, 다음은?
 
27일 서울 종로구 국일관에서 열린 '퓨처관광메들리'에서 뉴진스 작곡가로 알려진 DJ 250이 공연하고 있는 모습. 사진=에이씨예스(acs.kr)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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