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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 세상읽기)닭과 √2
2017-08-25 06:00:00 2017-08-28 11:13:52
 ½, 1, √2, 2, 3, π. 이게 무슨 수열일까? 고등학교 때 수열을 배운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 볼 문제다. 그런데 아무런 규칙이 없다. 지난 5월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에 개관한 서울시립과학관의 층 표시일 뿐이다. 과학관 건물이 리본 형태로 꼬여 있어서 건물의 좌우 높이가 다르고, 거기에 따른 층수를 표기하다 보니 지하층과 1층 사이에 ½층, 1층과 2층 사이에 √2층, 3층과 옥상 사이에 π층이 놓이게 된 것이다.
 
나름 재미있는 표시 방식인데 가끔 헷갈리는 아빠들이 계시다. 이 분들은 “왜 루트 2층이 2층 아래에 있냐”고 따진다. √2가 2보다 크다고 착각하신 것. 이 점을 설명하면 “아니 π야 원둘레를 계산할 때 필요하지만 √2는 어디에 쓴다고 층수에 써서 사람 헷갈리게 하냐”고 핀잔을 늘어놓으신다. 뭐, 아이들 앞에서 살짝 망신을 당하신 그 심정을 이해한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2를 사용한다. 바로 종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는 종이는 A4 용지다. A4 용지 두 장을 가로로 이으면 A3가 된다. 마찬가지로 A3 두 장을 합치면 A2가 되고 이어서 A1, A0가 된다. 종이를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서 크게 이어 붙이는 것은 불가능하니 반대로 큰 사이즈의 종이를 쪼개서 작은 사이즈로 만든다.
 
시작은 A0다. A0의 면적은 1㎡. 하지만 1m×1m가 아니다. 이 종이를 반씩 쪼개면 항상 가로:세로=1:2가 되어서 좁고 긴 모양이 된다. 편하지가 않다. A0는 841㎜×1189㎜. 0.999949㎡이다. 최대한 1㎡에 가까우면서도 사용하기에 적절한 비율을 찾아낸 것이다. 이때 비율이 바로 √2다. A0를 네 번 자른 A4 용지는 210㎜×297㎜. 마차가지로 가로와 세로의 비율은 √2.
 
그렇다면 1980~1990년대에 많이 쓰던 B5 용지 사이즈는 어땠을까? B5는 B0에서 시작하는데, B0의 면적은 1.5㎡. 하지만 1m×1.5m가 아니라 1030㎜×1456㎜. 정확히는 1.49968㎡이다. 이때도 가로 대 세로의 비율은 √2다. B5 용지는 282㎜×257㎜. 마차가지로 가로와 세로의 비율은 √2.
 
전 세계 사람들은 A 사이즈 또는 B 사이즈의 종이를 사용한다. 나라마다 다른 크기의 종이를 사용한다면 인쇄기, 프린터, 복사기 등이 모두 달라져서 산업과 통상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163개국이 가입한 국제 표준화 기구(ISO)에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A 사이즈는 독일 표준에 기반을 둔 것이고 B 사이즈는 일본 표준을 따른 것이다.
 
국제표준이라고 해서 모든 나라가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주요 국가가 따르지 않으면 좀 귀찮은 일이 생긴다. 예를 들어서 미터법이 그러하다. 전 세계에서 미터법을 따르지 않는 나라가 딱 세 나라다. 미국과 라이베리아와 미얀마. 미얀마야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제적으로 고립된 나라였고 라이베리아는 미국의 흑인들이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세운 나라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는데 미국이 문제다. 미국은 영국마저 포기한 구 도량형을 여전히 쓰고 있다.
 
구 도량형의 길이 단위 사이에는 10진법으로 딱 떨어지는 관계가 없다. 1마일은 1760야드다. 1야드는 3피트. 1피트는 12인치. 이걸 배우는 아이들은 정신이 없을 것 같다. 미국인들은 우리는 문제없이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실제로 걱정할 일이 자주 생긴다. 왜냐하면 미국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1999년 미항공우주국의 화성기후궤도탐사선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기관들이 사용한 단위가 달랐던 것이 문제다. 록히드마틴 연구팀은 야드 단위를 썼는데 제트추진연구소는 미터법을 따랐다. 계산에 혼선이 생겨 탐사선의 진입궤도가 너무 낮아졌고 그 결과 1억 2천만 달러가 소요된 탐사선이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우리 눈에 가장 편한 황금비는 1.618. A와 B 시리즈 용지의 비율은 1.414로 황금비에 근접했다. 이에 비해 미국이 사용하는 레터는 8.5인치×11인치로 가로와 세로 비율이 1.294다. 답답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닭도 A4 용지와 관계가 깊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1년에 먹어치우는 닭은 약 10억 마리. 이들은 평생 딱 A4 한 장의 면적 위에서만 버텨야 한다.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진드기의 공격을 받으면서 말이다. 지금 읽고 있는 이 칼럼 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닭과 달걀을 조금만 더 비싸게 먹자. A4에 가둘 것은 닭이 아니라 글이다. 닭에게 √2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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