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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어주는기자) "하루하루 내려놓고, 주어진 길을 걸어가라"
‘노무현의 필사’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풀어주는 인생과 관계, 행복 이야기
아는 게 재주라서 미안합니다|윤태영 지음|윤혜상 그림|위즈덤하우스 펴냄
2017-11-08 18:00:00 2017-11-08 18:00:00
[뉴스토마토 권익도기자] # 불출씨는 밤낮 없이 일했습니다. 야근은 다반사고, 주말에도 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0년, 불출씨는 초고속 승진을 했습니다. 마침내 회사의 핵심 중역이 되었습니다.
# 불출씨는 밤낮 없이 집에 없었습니다. 날마다 회식 아니면 야근이었습니다. 그렇게 10년, 불출씨는 집안의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존재감이 없어졌습니다.
 
소박하고 잔잔한 일상의 세계에서 건져지는 것들은 진부하고 식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때로 온 감각을 동원해 곱씹다 보면 미처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다. 자기 내면과 주변을 끝없이 되새김질하며 정돈해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가끔 상쾌한 인생의 향을 느낄 수 있다.
 
‘아는 게 재주라서 미안합니다(아·재·미)’의 불출씨는 그런 삶의 맛을 아는 인물이다. 매사 관찰을 하고, 사색을 하고, 성찰을 한다. 그로부터 삶을 살아갈 이유, 즐거움을 얻는다. 스스로를 소심하면서도 이중적이고, 순진하면서도 미련 많은 인물이라 소개하는 불출씨는 바로 저자인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필사’였다. 노 전 대통령 생전 당시 옆에서 말과 글을 옮기는 일에 전념했다. 하지만 2009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몸과 마음의 병을 얻게 되고 그때부터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가 마주한 건 스스로에 대한 못마땅하고 불만스런 감정들이었다. 거기에 그는 ‘불출(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란 이름표를 붙이기로 한다. 그리고 고백투로 그간 자신의 하찮은 말과 행동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책은 그런 윤 전 대변인의 분신 불출씨의 솔직, 담백한 인생 얘기들을 묶은 것이다.
 
매일 저녁 어머니에게 문안 전화를 하던 불출씨. 전화를 하지 못하는 날엔 걱정스러운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를 전화기로 듣는다. 약간의 불만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 “가끔 못할 수도 있지요. 너무 신경 많이 쓰는 것도 건강에 좋지 않아요.”
 
곧바로 입장은 뒤바뀐다. 지방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불출씨의 딸. 밤 12시가 넘도록 아빠에게 전화를 하지 않는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로 불 같이 화를 내는 불출씨에게 딸은 말한다. “그럴 수도 있지. 아빤 걱정이 너무 많아.”
 
연이은 부의금 지출로 한달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고,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란 광고 카피처럼살고 싶지만 밤낮없이 일만 하고, 또 교통사고 확률보다 낮은 로또 당첨 확률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쉬워 하는, 그의 모습은 일상 생활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아재’들의 자화상이다.
 
한 시대를 정치권에서 살아온 저자의 고뇌 역시 실감나게 묘사된다. “불출씨 욕 먹는 거 싫어하죠?” 한 선배격인 참모의 날카로운 질문에 그는 뜨끔한다. ‘정치란 으레 욕먹는’ 직업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선 어제의 동지를 하루 아침에 적으로 몰거나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렇게 그는 정치의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불출씨의 속마음을 빌려 고백한다. ‘욕먹는 일을 안 하면 좋은 사람이란 소리는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당파성을 가지고, 궂은 일도 하는 게 정치다.’
 
치열한 정계에서 내려온 후,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의 삶은 더없이 소박하고 잔잔하게 흘러간다. 주변인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고 살기로 결심하고, 길고양이들에게 참치캔을 따서 주며, 주말마다 평화로움을 위해 강아지들과 산책에 나선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만화경’을 보고 행운과 불행 사이를 고민하거나,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읽고 서울 구석 구석을 일별하기도 한다. 불출씨의 눈이 천천히 동물과 사물, 자연, 사람들을 훑는다. 동시에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려는 저자의 인생관이 비춰진다.
 
“다시 종각으로 향합니다. 눈이 내려 쌓인 뒷골목의 한 귀퉁이. 작은 길고양이 한 마리가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어떤 할머니가 작은 캔 하나를 땁니다. 고양이가 먹기 좋게 눈 위에 쏟아줍니다. 불쌍한 녀석들은 이 혹한의 거리를 얼마나 버틸까요? 불출씨는 갑작스레 불안합니다.”
 
“어쩌면 불출씨에게 남아 있는 숫자들입니다. 스무 번의 생일. 마흔 번의 설날과 추석. 여든 번의 계절. 두 차례의 자녀 결혼. 두 번의 상주. (중략) 어쩌면 예고 없이 찾아오는 단 한 번의 비극. 그리고 사라지는 위의 모든 숫자들.”
 
일상에 쏟아 붓는 감각만큼, 그 일상은 우리 자신을 지탱시켜 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진실된 자기 자신을 마주하며 더 나은 내일의 자신을 꿈꾸게 된다. 때론 씁쓸하고, 때론 짠한 불출씨의 세상 이야기가 상쾌하고 시원한 향이 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불합리와 부조리가 뒤범벅된 일상이고, 냉정한 반성도 마땅한 해결책도 없는 인생이어도 그는 하루하루 ‘내려놓기’를 실천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된다고 우리에게 얘기한다.
 
'아는 게 재주라서 미안합니다'. 사진/위즈덤하우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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